정원가의 열두 달 / 카렐 차페크 / 왜 정원을 말했는가?
┃ 도서 정보

| 제목 | 정원가의 열두 달 |
| 저자 | 글 : 카렐 차페크 / 그림 : 요제프 차페크 |
| 번역가 | 배경린 |
| 출판사 / 시리즈 | 펜연필독약 |
| 출간일 | 2019.06.20 |
| 페이지 | 224p |
| 장르 | 에세이 |
| 국가 | 체코 |
| ISBN | 9791195760947 |
| Original Title | Zahradníkův rok / The Gardener’s Year |
| Original Author | Karel Čapek |
| Original Date | 1929 |
┃ 들어가며
세계가 무너진 시대에 카렐 차페크는 왜 사람들에게 정원을 말했을까. 단순히 가드닝을 권유한 것일까. 아니면 마음속 정원을 가꾸라는 자기계발적 의미였을까. 이 책을 여기에서 멈춰 읽는다면 차페크가 살았던 시대와 그가 평생 지켜온 정신에 접근하지 못한다. 『정원가의 열두 달』을 이해하려면 먼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시대적 상황과 차페크가 어떤 작가였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둘을 작품과 함께 놓는 순간, 손바닥만 한 정원 이야기는 폐허가 된 인간과 국가, 관계와 문명을 다시 세우는 이야기로 커진다.
┃ 작가 소개
카렐 차페크(Karel Čapek, 1890~1938)는 체코를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극작가, 저널리스트이다. 희곡 『R.U.R.』을 통해 오늘날 널리 쓰이는 ‘로봇’이라는 단어를 대중화한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기술과 문명의 발전이 인간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탐구했으며,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위협하는 권력에도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제1차 세계대전과 체코슬로바키아의 탄생을 지켜본 그는 민주주의와 휴머니즘을 옹호한 지식인이었다. 1930년대 유럽에서 파시즘과 전체주의가 확산되자 이를 공개적으로 비판했으며, 독재와 획일화에 맞서 개인의 자유와 인간다운 삶을 지키려 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소설과 희곡뿐 아니라 에세이와 신문 기고문에도 꾸준히 나타난다.
┃ 목차
목차 펼쳐보기
정원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인간은 어떻게 정원가로 다시 태어나는가
정원가의 1월
씨앗
정원가의 2월
가드닝 기술
정원가의 3월
새싹
정원가의 4월
노동절
정원가의 5월
단비
정원가의 6월
채소밭 정원가들
정원가의 7월
식물학 챕터
정원가의 8월
선인장 키우는 사람들
정원가의 9월
흙
정원가의 10월
가을의 아름다움
정원가의 11월
준비
정원가의 12월
정원가로 살아간다는 것
┃ 줄거리
카렐 차페크의 『정원가의 열두 달』은 한 해 동안 정원에서 벌어지는 일을 월별로 기록한 에세이다. 씨를 뿌리고 흙을 고르며, 비와 가뭄을 견디고 꽃이 피고 지는 과정을 유머러스하게 그린다. 정원가는 늘 완성된 풍경을 꿈꾸지만 정원은 날씨와 계절, 뜻밖의 실패로 끊임없이 달라진다. 그럼에도 다시 땅을 파고 씨앗을 심으며 다음 계절을 기다린다. 차페크는 정원을 가꾸는 노동과 기쁨, 조급함과 인내를 통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 작품 해석
제1차 세계대전은 1918년에 끝났지만 유럽은 쉽게 안정을 되찾지 못했다. 전쟁으로 무너진 사회를 복구하는 동안 극단적 민족주의와 권위주의가 고개를 들었고, 이탈리아에서는 이미 파시즘이 정권을 장악했다. 『정원가의 열두 달』이 출간된 1929년에는 대공황까지 시작되며 경제와 사회의 기반이 다시 흔들렸다. 전쟁의 폐허가 완전히 복구되기도 전에 새로운 폭력과 불안이 자라나던 시대였다. 카렐 차페크의 『정원가의 열두 달』은 이런 시대의 공기를 먹고 태어난 작품이다.
그런데 당대의 공적 지식인이었던 차페크가 사람들에게 내놓은 것은 전쟁도 정치도 아닌 정원 이야기였다. 그렇다고 이 책을 단순한 가드닝 저서로만 읽는다면 시대와 작가를 모두 지워버리게 된다. 『정원가의 열두 달』은 원예 에세이의 형식을 빌려, 전쟁과 혼란을 통과한 인간이 삶과 문명을 어떻게 다시 가꾸어야 하는지를 정원이라는 가장 작은 공간을 통해 제시한 작품이다.
전쟁은 도시를 무너뜨리고 사람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기반을 무너뜨린다. 그래서 전쟁이 끝난다고 모든 삶이 저절로 원상복구되는 것은 아니다. 폐허가 된 땅은 갈아엎고 재건해야 하며, 무너진 공동체는 다시 신뢰를 쌓아야 하며, 상처 입은 인간 역시 치유의 시간이 필요하다. 차페크는 이러한 회복의 과정을 인간이 가장 가까이에서 마주하는 구체적인 공간인 정원에 담아냈다.
전쟁의 상처를 회복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원 또한 한순간에 완성되지 않는다. 땅을 갈아엎고 씨앗을 심으며, 잡초를 뽑고 가지를 치고 양분을 주어야 한다. 여기에 인간의 힘으로 조절할 수 없는 계절을 기다리는 시간까지 쌓여야 비로소 하나의 정원이 만들어진다. 아무리 아름다운 정원도 가꾸기를 멈추는 순간 잡초의 공격을 받고, 이내 거친 땅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인간의 삶과 사회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차페크는 정원을 통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흥미로운 점은 차페크가 정원을 이야기하면서 가장 먼저 주목하는 대상이 꽃이 아니라 흙이라는 사실이다. 아름답게 피어난 장미나 화려한 풍경보다 먼저 땅을 갈아엎고 흙을 만지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아무리 좋은 씨앗이라도 척박한 땅에서는 자랄 수 없기 때문이다. 꽃은 눈에 보이는 결실이지만, 흙은 그 결실이 가능하도록 오랫동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명을 떠받치는 토대이다. 정원의 시작은 꽃이 아니라 흙이며, 결과가 아니라 기반이다.
이 세계에 보다 깊이 발을 담그면서, 진정한 정원가란 ‘꽃을 가꾸는 사람’이 아니라 ‘흙을 가꾸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 카렐 차페크, 『정원가의 열두 달』, 펜연필독약, p.56
이 장면은 전쟁 이후의 현실과도 닮아 있다. 무너진 사회를 다시 세우기 위해서는 먼저 기반을 복구해야 한다. 건물이 아니라 터를 다지고, 성과보다 토대를 먼저 회복해야 한다. 차페크가 흙을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이유는 정원이 결국 꽃을 감상하는 공간이 아니라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 가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관심은 화려하게 피어난 결과보다 그 결과를 가능하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과정에 머문다. 꽃은 회복의 증거일 뿐이며, 정원의 본질은 그 꽃을 피워 내기까지의 시간과 노동에 있다.
정원을 가꾸는 일은 흙을 고르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차페크는 정원가가 아무 꽃이나 밭에 척 들여놓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정원마다 흙의 성질이 다르고, 식물이 뿌리를 내리는 방식도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원가는 자신의 정원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아가기 위해 오랜 시간 수련해야 한다. 그는 진짜 정원가가 되려면 “수년에 걸친 수련이 필요하다”고 썼다. 이는 삶과 사회를 회복하는 일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무너진 자리에 무엇이든 급하게 채워 넣는다고 회복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곳의 상태를 살피고, 무엇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지를 이해하며, 실패를 거쳐 다시 배우는 시간이 필요하다.
아무 곳에나 발을 척 들여놓는 것 같지만 아무것도 상하게 만들지 않는, 진짜 정원가들 특유의 그 신비롭고 과감무쌍한 몸짓을 터득하려면 수년에 걸친 수련이 필요하다.
― 카렐 차페크, 『정원가의 열두 달』, 펜연필독약, p.90
정원은 인간의 계획대로만 움직이지도 않는다. 차페크는 경험 많은 정원가들의 조언을 모두 들어보더라도 날씨만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예측 불가능하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 인간은 땅을 갈고 씨앗을 심을 수는 있지만 비를 내리게 하거나 계절을 앞당길 수는 없다. 정원가는 자신의 노동이 중요하다는 사실과 동시에 자신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함께 받아들여야 한다. 삶과 문명 역시 인간의 의지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재건은 계획과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환경,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 속에서 천천히 진행된다.
이 점에서 정원가의 태도는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과도 연결된다. 신문은 폭풍으로 인한 농작물의 피해를 이야기하지만, 정원가는 먼저 자신의 정원에서 얼마나 많은 나무가 부러지고 망가졌는지를 살핀다. 거대한 사건을 바라보는 일과 바로 앞의 피해를 돌보는 일은 서로 반대되지 않는다. 오히려 정원가는 추상적인 재난을 구체적인 회복의 문제로 바꾸는 사람이다. 그는 폭풍을 논평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부러진 가지를 정리하고 쓰러진 나무를 다시 세운다. 차페크가 정원을 선택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세상을 한꺼번에 구할 수는 없어도 자신이 맡은 작은 땅부터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은 정원이라고 해서 의미까지 작은 것은 아니다. 차페크는 인간이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온몸을 내던질 수 있지만, 자기만의 작은 정원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온몸뿐 아니라 남을 쫓아내기까지 한다고 유머러스하게 말한다. 이 문장은 정원이 단순한 취미 공간이 아니라 인간이 책임을 지고 돌보는 구체적인 세계임을 보여준다. 거대한 이념은 말로 주장할 수 있지만, 정원은 매일 물을 주고 잡초를 뽑으며 자신의 손으로 유지해야 한다. 정원가에게 정원은 생각이 아니라 삶이며, 소유물이 아니라 책임의 공간이다.
그 책임은 결과만을 향하지 않는다. 차페크는 인간이 정원가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우선 성숙한 마음가짐이 필요하며, 자신만의 정원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정원을 갖는다는 것은 단순히 땅 한 조각을 소유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자신이 돌보고 책임질 세계를 갖는다는 뜻에 가깝다. 정원가는 꽃이 피었을 때만 정원을 사랑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계절에도 땅속의 가능성을 믿으며, 실패한 자리에는 다시 씨앗을 심는다. 정원을 가꾸는 사람은 완성된 아름다움을 소비하는 사람이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위해 오늘의 노동을 감당하는 사람이다.
정원은 언제나 미완의 존재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인생살이와 꼭 닮았다.
― 카렐 차페크, 『정원가의 열두 달』, 펜연필독약, p.167
따라서 차페크의 정원에는 끝이 없다. 그는 한 해는 언제나 봄이고, 인생은 언제나 청춘이며, 꽃은 언제고 핀다고 썼다. 가을이 왔다고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며, 땅 밑에서는 다시 자라날 생명이 다음 계절을 준비한다. 전쟁과 혼란을 겪은 인간에게 필요한 것도 바로 이러한 시간 감각이다. 파괴된 순간만을 세계의 마지막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다시 시작될 가능성을 믿는 것이다. 정원은 이미 완성된 낙원이 아니라 무너지고 자라기를 반복하면서 계속 만들어지는 공간이다.
┃ 결론
그래서 『정원가의 열두 달』은 단순히 꽃을 잘 키우는 방법을 알려주는 원예 에세이가 아니다. 전쟁과 혼란으로 무너진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이 삶과 문명을 어떻게 다시 가꾸어야 하는지를 정원이라는 가장 작은 세계에 담아낸 회복의 기록이다. 차페크가 말한 정원은 현실을 외면하기 위한 도피처가 아니라, 폐허가 된 세계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가장 현실적인 출발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