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움가트너 / 폴 오스터 / 남겨질 아내를 위한 다정한 이별 지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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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열린책들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직접 읽고 작성했습니다.

┃ 도서 정보

폴 오스터 『바움가트너』의 삶과 죽음 사이를 떠올리게 하는 구름 위 외딴 집과 흐릿한 인물
제목바움가트너
저자폴 오스터
번역가정영목
출판사 / 시리즈열린책들 / –
출간일2025.04.30
페이지256p
장르현대문학 · 장편소설
국가미국
ISBN9788932925042
Original TitleBaumgartner
Original AuthorPaul Auster
Original Date2023

┃ 들어가며

바움가트너는 독일어로 과수원을 가꾸는 사람을 가리키는 성씨에서 유래한다. 폴 오스터의 마지막 소설에서 이 이름은 우연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는 죽은 아내의 자리를 지우는 대신 기억으로 돌보고, 사라진 이를 붙잡기보다 남겨진 삶을 다시 가꾸어 나간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죽은 자와 산 자의 위치가 묘하게 뒤집힌다. 아내를 잃은 남자의 이야기였던 소설이, 자신을 잃게 될 아내에게 건네는 이야기처럼 다가오기 때문이다. 평생 존재와 정체성, 우연, 언어를 파고들었던 폴 오스터는 마지막에 꽤 이상한 방식으로 사랑을 남겼다. 죽은 이를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가 아니라, 남겨진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이야기하면서. 『바움가트너』는 그렇게 남겨질 아내를 위한 다정한 이별 지침서로 읽힌다.


┃ 작가 소개

폴 오스터(Paul Auster, 1947~2024)는 미국의 소설가이자 시인, 번역가, 시나리오 작가이다. 우연과 운명, 정체성, 고독, 언어와 기억의 문제를 반복해서 탐구했으며,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흔드는 독특한 서사로 잘 알려져 있다. 대표작으로 『뉴욕 3부작』, 『달의 궁전』, 『우연의 음악』, 『브루클린 풍자극』 등이 있다. 『바움가트너』는 생의 마지막 시기에 집필한 작품으로, 상실과 기억, 몸과 영혼의 문제를 노년의 시선으로 되짚는다.


┃ 줄거리

아내 애나가 세상을 떠난 지 9년, 일흔이 넘은 철학 교수 시모어 바움가트너는 여전히 그녀의 부재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애나가 남긴 시와 글을 정리하는 한편, 자신의 어린 시절과 부모 세대의 기억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지나온 삶을 되짚는다. 그 과정에서 서로 너무 달랐지만 오랜 시간을 함께했던 아내와의 관계도 하나씩 다시 떠오른다. 그의 삶의 방향을 바꾸는 사건은 어느 날 밤 일어난다. 연결조차 되지 않은 전화기가 울리고, 수화기 너머에서 죽은 애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애나는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살아 있는 누군가가 자신을 기억하는 동안 그곳에 머물 수 있다고 말한다. 그 통화 이후 바움가트너는 애나를 잊는 대신 자신의 삶을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글을 쓰고, 애나의 작품을 세상에 내보내며 살아 있는 사람의 자리로 돌아간다. 그러던 중 그의 삶에 또 한 번 변화를 가져올 뜻밖의 편지가 도착한다.


┃ 작품 해석

폴 오스터의 『바움가트너』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죽은 애나가 아니라 살아남은 바움가트너의 모습이다. 아내를 잃은 지 9년이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그녀가 빠져나간 자리를 제대로 메우지 못한다. 두뇌는 죽음을 이해했으나 마음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그는 살아 있으면서도 삶의 한쪽을 죽은 사람에게 내어준 것처럼 지낸다. 애나와 바움가트너는 성격도 생활 방식도 상당히 달랐다. 활동적이고 외향적인 애나와 내향적이며 사유에 익숙한 바움가트너는 언뜻 잘 맞지 않을 것 같은 부부였지만, 그 차이를 품은 채 오랜 시간을 함께 살아왔다. 그래서 애나가 사라진 뒤 남은 빈자리는 한 사람의 부재보다 훨씬 컸다.


자기 연민에 빠져 허우적거리지는 않고, 왜 하필이면 나냐, 하고 하늘을 향해 신음을 토하지 않아요. 왜 내가 아니어야 하나요? 사람들은 죽어요. 젊어서 죽고, 늙어서 죽고, 쉰여덟에 죽죠. 다만 나는 애나가 그리워요. 그게 전부예요. 애나는 내가 세상에서 사랑한 단 한 사람이었고, 이제 나는 애나 없이 계속 살아갈 길을 찾아야 해요.

― 폴 오스터, 『바움가트너』, 열린책들, p.41


그러던 어느 날 밤, 연결조차 되어 있지 않은 전화기가 울린다. 수화기 너머에는 죽은 애나가 있다. 그녀는 자신이 천국도 지옥도 아닌 어딘가에 머물고 있으며, 살아 있는 사람이 자신을 기억하는 동안 그곳에서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기억하는 사람이 죽으면 자신 역시 사라질 것이라고도 한다. 죽은 사람이 전화를 걸어온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그 말을 들은 뒤 바움가트너에게 일어난 변화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를 조금 다르게 이해하기 시작한다.

애나를 잊지 않기 위해 죽은 사람처럼 살아갈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온전하게 살아 있어야 애나도 자신의 기억 속에서 계속 존재할 수 있었다. 그는 과거로 돌아가되 더 이상 그곳에 갇힐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애나의 글을 다시 읽고, 함께했던 시간을 떠올리고, 자신의 삶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자신의 글을 쓰고, 애나의 작품을 세상 밖으로 내보낸다. 애나를 덜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애나를 기억하는 방식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기억은 죽은 사람 곁에 주저앉는 일이 아니라 그 사람의 자리를 품은 채 다시 살아가는 일이 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문제가 남는다. 죽은 사람이 기억 속에서 계속 존재한다는 말에는 아무런 증거가 없다. 연결되지 않은 전화기에서 들려온 목소리도, 삶과 삶이 아닌 것 사이 어딘가에 죽은 이들이 머문다는 이야기도 확인할 방법이 없다. 바움가트너 역시 그것을 증명하지 못한다. 그런데 작품은 얼마 뒤 전혀 다른 곳에서 또 하나의 증명할 수 없는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우크라이나 땅에 오래전 존재했다는 ‘스타니슬라프의 이리들’이다.


시인이 나에게 한 이야기를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정보의 부재 속에서 나는 시인을 믿는 쪽을 선택한다. 그곳에 이리가 있었건 없었건, 나는 이리를 믿는 쪽을 선택한다.

― 폴 오스터, 『바움가트너』, 열린책들, p.199


그 이야기에 역사적 근거가 없다는 말을 듣고도 바움가트너는 믿겠다고 한다. 정말 이리들이 있었는지, 이야기가 사실인지 확인할 수 없는데도 말이다. 중요한 것은 진실을 입증하는 일이 아니라 믿기로 선택하는 태도에 있다. 누군가는 오래전에 사라진 이리 떼를 믿고, 누군가는 죽은 아내가 걸어온 전화 한 통을 믿는다. 죽은 사람이 살아 있는 이의 기억 속에서 계속 존재한다는 믿음 역시 그와 다르지 않다.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버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스타니슬라프의 이리들은 작품 한가운데 놓인 작은 우회로처럼 보이면서도 이상하게 전화 장면과 맞닿는다. 죽은 자가 정말 어딘가에 존재하는지 알 수 없다. 기억이 실제로 한 사람을 살려내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바움가트너가 근거 없는 이야기를 믿기로 했듯, 이 작품 역시 독자에게 하나의 믿음을 슬며시 건넨다. 사라진 사람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수도 있다고. 누군가가 기억하고 있는 동안에는 적어도 그 사람의 자리가 세계에서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는다고.

그렇다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죽은 자는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작품은 다시 방향을 틀어 몸과 영혼의 문제를 꺼낸다. 바움가트너가 쓰는 「운전대의 신비」에서 자동차와 인간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오토’에는 자기라는 의미가 있고, ‘모터’에는 움직임과 운동의 의미가 있다. 자동차는 스스로 움직이는 하나의 몸처럼 놓이고, 그 안에서 판단하고 방향을 정하는 존재는 운전자다. 몸과 영혼, 물질과 비물질의 오래된 문제가 자동차와 운전자의 이미지로 바뀌어 나타난다.


실체가 없는 어떤 것(영혼)이 실체(몸)을 부여받았을 때는 그걸 계속 영혼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물론 그런 상상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아가 물질과 비물질의 결합이라면…(중략) 인간은 순수한 영혼이나 순수한 몸이 아니라 그 둘의 결합이라는 점에서 차의 운전자는 몸을 부여받은 영혼, 즉 육화된 영혼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 폴 오스터, 『바움가트너』, 열린책들, p.227


작중 자율주행 자동차들은 인간이 직접 운전하지 않는 상태에서 사고를 일으킨다. 그런데 바움가트너는 경찰의 공식 보고서가 결국 사고 원인을 인간의 과실로 기록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계가 움직였는데 책임은 인간에게 돌아간다. 이를 몸과 영혼의 관계로 겹쳐 읽으면 묘한 그림이 생긴다. 자동차라는 몸이 파손되어도 마지막 책임은 그 안의 인간, 즉 운전자에게 돌아간다. 몸이 움직임을 멈춘다고 해서 운전자까지 자동차 그 자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에서 바움가트너 자신이 자동차 사고를 당한다. 차는 더 이상 그를 태우고 갈 수 없게 되지만 그는 밖으로 나온다.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는 외딴 장소인데 어딘가에 집 한 채가 나타나고, 그는 도움을 청하기 위해 그곳으로 향한다. 상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바움가트너만 문 안으로 들어간다. 이 장면을 단순히 사고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도움을 구하러 가는 모습으로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앞서 죽은 애나가 머문다고 했던 공간을 떠올리면 집의 모습은 조금 달라진다. 애나는 죽은 뒤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삶과 삶이 아닌 것 사이의 임시적인 공간에 머물렀다.

그리고 누군가가 자신을 기억하는 동안 그곳에 존재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마지막에 자동차라는 몸에서 빠져나온 바움가트너가 들어가는 낯선 집 역시 그 임시적인 공간의 이미지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애나가 그곳에 있었기에 한밤중 전화선을 건너 바움가트너에게 말을 걸 수 있었다면, 이제는 바움가트너가 그곳으로 들어갈 차례다. 처음에는 살아 있는 그가 애나를 기억했고, 마지막에는 누군가가 바움가트너를 기억해야 한다. 죽은 자와 산 자의 위치가 완전히 뒤집힌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소설 바깥에 있는 폴 오스터의 모습이 겹쳐진다. 아내를 갑작스럽게 잃고 제대로 살아가지 못했던 바움가트너는 죽은 사람을 잊는 대신 기억하면서 다시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다른 사람을 만나고, 웃고, 글을 쓰고, 자신의 삶을 다시 움직이면서도 애나를 지우지 않았다. 그것이 오히려 애나를 가장 오래 살게 하는 방법이었다. 죽음을 앞둔 작가는 그렇게 먼저 아내를 잃은 남자를 한 사람 만들어놓고, 그에게 살아남는 법을 끝까지 연습시킨다. 그리고 마지막에 자리를 바꾸어 자신이 죽은 사람이 된다. 이제 그 연습은 바움가트너의 것이 아니라 남겨질 사람의 몫이 된다.


┃ 결론

폴 오스터의 『바움가트너』에서 애나를 잃은 남자가 배운 것은 죽은 사람을 붙잡는 법이 아니라, 그 사람을 기억한 채 다시 살아가는 법이었다. 다른 사람을 만나고, 웃고, 사랑하고, 자신의 삶을 다시 움직이면서도 애나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바움가트너가 살아 있는 동안 그녀는 그의 기억 속에서 계속 존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죽은 자와 산 자의 자리가 뒤집힌다. 이제 남겨질 사람은 바움가트너가 아니라 폴 오스터의 아내다. 나를 따라오지 말 것. 슬픔 때문에 삶을 멈추지 말 것. 다른 사람을 만나고 사랑하며 자신의 몫을 끝까지 살아갈 것. 그리고 그 삶 속에서 나를 기억할 것. 당신이 살아 있는 동안 나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 폴 오스터는 마지막 작품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붙잡는 대신 살아 있는 쪽을 세상에 남겨둔다. 『바움가트너』는 그렇게 남겨질 아내를 위한 다정한 이별 지침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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