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니스 / 에드거 앨런 포 / 부분을 읽다가 전체를 잃어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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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정보ㄱ

에드거 앨런 포 「베르니스」 서평 표지. ‘부분을 읽다가 전체를 잃어버리다’라는 제목 아래 책과 돋보기를 그린 회청색 수채화가 배치되어 있다. 부분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 전체를 놓치는 에게우스의 독해 방식을 시각화한 이미지.
제목에드거 앨런 포 단편선 / 베르니스
저자에드거 앨런 포
번역가조애리
출판사 / 시리즈을유문화사/ 을유세계문학전집 143
출간일2025.09.15
페이지392p
장르고전문학 · 공포소설 · 미스터리 · 단편소설
국가미국
ISBN9788932475738
Original TitleBerenice
Original AuthorEdgar Allan Poe
Original Date1835

┃ 들어가며

에드거 앨런 포의 「베르니스」는 하나의 부분에 몰두한 나머지 전체를 잃어버리는 정신을 그린 작품이다. 작품은 이븐 자이어트의 글에서 인용한 제사로 시작한다. “친구들은 사랑하는 이의 무덤을 찾아가면 내 고통이 조금은 덜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 문장은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이다. 그러나 이 문장에는 기묘한 아이러니가 숨어 있다. 누군가의 무덤을 찾는다는 것은 그 사람을 잃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행위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잃어버린 무언가를 되찾으려는 행위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포는 이 짧은 문장에 서로 다른 두 가지 의미를 겹쳐 놓고, 독자가 마지막에 이르러 제사를 다시 읽게 만든다.


┃ 작가 소개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 1809~1849)는 미국의 시인이자 소설가, 문학평론가이다. 인간의 불안과 강박, 죽음과 광기,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탐구했으며, 고딕문학과 심리 공포소설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모르그가의 살인 사건」을 통해 근대 추리소설의 기틀을 마련했고, 대표작으로 「검은 고양이」, 「어셔가의 몰락」, 「고자질하는 심장」, 「갈가마귀」 등이 있다.


┃ 목차

목차 펼쳐보기

도둑맞은 편지
군중 속의 남자
어셔가의 몰락
검은 고양이
고자질하는 심장
리게이아
베르니스
길쭉한 상자
생매장
아몬티야도 술통
황금충
네가 바로 범인이다
모르그가 살인 사건
주
해설
판본 소개
에드거 앨런 포 연보


┃ 줄거리

에드거 앨런 포의 「베르니스」는 오래된 저택의 서재에서 성장한 에게우스와 사촌 베르니스의 이야기이다. 책과 사색에 몰두하며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혼동하는 에게우스와 달리, 베르니스는 생기 넘치고 활동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베르니스가 원인 모를 질병에 걸리면서 두 사람의 관계에도 변화가 찾아온다. 포는 이들의 대비를 통해 인간의 집착과 왜곡된 인식이 어떤 결과를 불러오는지 서서히 드러낸다.


┃ 작품 해석

우리는 어려운 책을 만났을 때 은유와 비유 등 각종 문학적 수사법을 찾아보려고 노력한다. 또한 작품에 등장하는 사물과 인물에 특별한 의미가 숨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사소한 표현 하나까지 놓치지 않으려 한다. 물론 이러한 과정은 작품을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하나의 표현에 지나치게 매달리다 보면 그 표현이 놓인 문맥을 잊어버리기도 한다. 부분의 의미를 밝히는 데 집중한 나머지 작품 전체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놓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품을 깊이 읽는다는 것은 무엇이며, 우리는 언제부터 이해가 아니라 집착을 하고 있는 것일까?

에드거 앨런 포의 「베르니스」에는 이러한 읽기의 문제를 떠올리게 하는 주인공 에게우스가 등장한다. 그는 어머니가 죽은 장소에서 자신이 태어났다고 말하며, 탄생 이전에도 존재했고 그 시절의 기억까지 간직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일반적으로 탄생은 한 인간의 삶이 시작되는 지점이지만, 에게우스에게는 자신의 존재보다 앞선 기억이 남아 있는 셈이다. 게다가 어머니의 죽음과 자신의 탄생이 같은 장소에서 이루어졌다는 설명은 한 존재의 소멸과 다른 존재의 탄생을 나란히 놓는다. 그런데 이처럼 죽음과 탄생, 과거의 기억이 겹쳐지는 장소는 다름 아닌 서재이다.

에게우스가 자신의 탄생을 묘사하는 방식도 예사롭지 않다. 그는 실재하지만 실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긴 밤에서 깨어나 요정의 나라와 상상의 궁전, 수도원식 사고와 학식이라는 미개척 영지에 들어섰다고 말한다. 요정의 나라와 상상의 궁전이 상상과 이야기의 세계를 떠올리게 한다면, 수도원식 사고와 학식은 종교와 학문의 영역을 가리킨다. 더욱이 그는 현실의 사물들을 환상처럼 받아들이는 반면, 꿈속의 관념은 자신의 유일하고 완전한 삶으로 여긴다. 현실과 관념의 자리가 뒤바뀐 것이다. 그가 태어난 서재는 단순히 책을 보관하는 장소를 넘어, 그가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까지 설명하는 공간으로 읽힌다.

서재에는 누군가의 삶이 끝난 뒤에도 사라지지 않은 생각과 이야기가 남아 있다. 그것들은 다른 생각과 만나 새로운 관념을 낳으며, 때로는 이전의 기억을 간직한 채 전혀 다른 모습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보면 에게우스가 어머니의 죽음이 머무는 장소에서 태어나 출생 이전의 기억까지 지니고 있다는 이야기도 달리 읽힌다. 한 인간의 생애를 설명하기에는 기묘했던 요소들이 사상과 관념의 탄생이라는 관점에서는 서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에게우스는 현실에서 태어나 책을 읽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책과 관념 속에서 태어나 세상을 바라보는 사고 자체를 형상화한 인물은 아닐까?


현실 세계의 실체들은 마치 환상처럼 느껴졌고, 오직 환상으로만 다가왔다. 반면 꿈나라의 광기 어린 생각들이, 일상적 삶의 실체는 아니었지만, 그 자체로 진정으로 완벽하고 유일한 삶이 되었다. — 에드거 앨런 포, 『에드거 앨런 포 단편선』, 을유문화사


그렇다면 관념의 세계에 깊이 뿌리내린 에게우스는 눈앞의 사물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에게우스는 책의 글자나 장식, 벽에 드리워진 그림자, 램프의 불꽃처럼 사소한 대상에 몇 시간씩 몰두한다. 그러나 그의 사색은 일반적인 몽상과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보통의 몽상은 하나의 대상에서 출발해 연상과 추론을 거듭하면서 다른 생각으로 뻗어 나가지만, 에게우스는 아무리 오래 생각해도 최초의 대상으로 되돌아온다. 사물을 다른 것들과 연결하면서 의미를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대상에 계속해서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다. 그 결과 대상은 실제보다 훨씬 중요하고 초자연적인 것으로 변한다. 에게우스가 몰두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대상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그의 정신에서 차지하는 비중만 커지는 셈이다.

특히 하나의 단어를 의미가 사라질 때까지 반복한다는 대목은 이러한 사색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단어는 본래 무언가를 가리키기 위해 존재하지만, 에게우스는 그 단어 자체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그것이 전달하던 의미를 잃어버린다. 신학서에 등장하는 역설적인 문장을 몇 주 동안이나 연구하면서도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하는 모습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그는 문장을 끝없이 생각하지만 그 문장이 속한 더 넓은 사유의 세계로 나아가지 못한다. 여기서 변한 것은 대상 자체가 아니라 대상을 바라보는 에게우스의 인식이다. 그는 대상에 관해 더 많이 생각할수록 그것이 지닌 본래의 의미와 멀어지며, 결국 자신이 만들어 낸 관념 속에 갇히고 만다. 이처럼 에게우스의 사색은 대상을 깊이 이해하는 과정이 아니라, 하나의 부분에 몰두하다 전체를 잃어버리는 과정에 가깝다.


내 경우에는 시각이 혼란되어 굴절되고 비현실적인 중요성을 띠기는 했지만, 하찮은 사물 자체가 늘 관심의 대상이었다. 추론은 거의 없었고, 추론을 하더라도 집요하게 최초의 사색 대상으로 되돌아가 거기에 초점을 맞추었다. 명상은 결코 즐겁지 않았다. 몽상이 끝날 무렵 사색의 원인이었던 최초의 사물이 내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지나친 관심을 받아 초자연적인 대상이 되었다. — 에드거 앨런 포, 『에드거 앨런 포 단편선』, 을유문화사


이러한 사고방식은 사촌 베르니스를 바라보는 태도에서 극단적으로 드러난다. 그는 건강하고 아름다웠던 시절에도 베르니스를 살아 숨 쉬는 존재가 아니라 꿈속의 형상으로,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분석과 사색의 대상으로 받아들였다. 이후 질병으로 그녀의 외모와 성격이 크게 달라지자 에게우스는 더 이상 이전의 베르니스로 알아보지 못한다. 물론 정신이 맑을 때에는 그녀의 불행을 슬퍼하고 변화를 고민하기도 하지만, 병적인 사색에 빠져들면 그러한 관심마저 사라진다. 그때 그의 정신을 사로잡는 것은 베르니스의 삶 전체가 아니라 신체의 일부인 치아이다. 흠 하나 없이 희고 가지런한 치아는 마침내 하나의 관념으로 자리 잡으며, 베르니스라는 존재 전체보다 더 중요한 대상이 된다.


살레 양의 경우 “그녀의 걸음 하나하나가 감정이었다”고 전해지는데, 베르니스의 경우 “그녀의 이 하나하나가 관념이었다”라는 걸 더 진심으로 믿었다. — 에드거 앨런 포, 『에드거 앨런 포 단편선』, 을유문화사


에게우스에게 치아가 하나의 관념이 되었다는 사실은 이후 벌어지는 사건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이다. 치아는 베르니스라는 존재에 속한 신체의 일부이지만, 에게우스의 정신에서는 독립적인 대상으로 자리 잡는다. 그는 치아의 모양과 색깔, 표면의 작은 특징까지 기억하면서도 그 치아가 속한 베르니스라는 존재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더구나 그는 그 치아를 소유해야만 자신의 이성을 회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자신의 정신이 만들어 낸 관념을 소유하기 위해 현실의 대상을 손에 넣으려는 것이다. 결국 에게우스는 베르니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무덤을 파헤쳐 치아를 모두 뽑아 온다. 그러나 베르니스는 죽지 않았다. 에게우스가 관념으로 받아들인 부분을 소유하려는 순간, 살아 있는 존재 전체가 훼손되고 만 것이다.

그가 저지른 행위에서 가장 끔찍한 것은 치아를 뽑았다는 사실만이 아니다. 에게우스는 치아의 표면에 있는 작은 특징들을 놓치지 않을 만큼 세밀하게 관찰했지만, 그 치아가 속한 베르니스라는 존재는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부분의 형태를 기억하고 분석하는 능력과 전체의 상태를 이해하는 능력은 서로 다른 것이었다. 에게우스는 자신이 주목한 부분을 온전히 소유했다고 믿었지만, 바로 그 과정에서 그 부분이 속한 전체를 파괴해 버렸다. 관념에 대한 집착이 실제 대상을 훼손하는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독자에게도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에게우스가 치아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 치아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알아내려고 한다. 아름다움일 수도 있고, 영원성이나 불변성일 수도 있으며, 종교적인 관념과 연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치아라는 부분에만 매달려 작품의 다른 요소들을 놓친다면 독자 역시 에게우스와 같은 방식으로 작품을 읽고 있는 것은 아닐까? 포는 치아에 집착하는 인물을 그려 놓고, 독자마저 그 치아에 집착하도록 유도한다. 바로 여기에서 「베르니스」는 섬뜩한 이야기인 동시에 독서와 해석 자체를 돌아보게 하는 작품이 된다.

이러한 함정은 자신이 발견한 해석을 확신하는 순간 더욱 위험해진다. 우리는 작품의 한 부분에서 특별한 의미를 발견하면 그 해석을 중심으로 나머지 부분까지 바라보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작품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가설이었지만, 어느 순간 그것이 작품 전체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바뀌는 것이다. 자신의 해석과 일치하는 문장에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면서도 그와 어긋나는 문장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거나 억지로 끼워 맞추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독서는 작품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자신이 옳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과정으로 변한다. 에게우스가 베르니스의 치아에 부여한 관념을 실제 존재보다 중요하게 여겼듯, 독자 역시 자신이 만들어 낸 해석을 작품 자체보다 우선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하나의 단어나 사물을 세밀하게 읽는 일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때로는 사소해 보이는 표현 하나가 작품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발견한 의미가 작품의 다른 부분들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 살피는 일이다. 자신의 해석을 뒷받침하는 문장뿐 아니라 그 해석과 어긋나는 문장까지 검토하면서, 처음 발견한 의미가 작품 전체를 설명할 수 있는지 끊임없이 확인해야 한다. 부분에 집중하는 행위와 부분에 갇히는 행위는 여기에서 갈라진다.

「베르니스」는 우리가 무엇을 읽고 있는지보다 어떻게 읽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만든다.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시작한 해석이 어느 순간 작품을 자신의 생각에 종속시키는 행위로 바뀔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상징을 찾아냈다는 기쁨에 사로잡혀 그 상징이 속한 이야기를 잊어버린다면, 우리는 에게우스와 얼마나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결국 깊이 읽는다는 것은 부분을 끝없이 확대하는 일이 아니라, 부분에서 발견한 의미를 다시 전체 속에 놓고 바라보는 일일 것이다.


┃ 결론

에드거 앨런 포의 「베르니스」는 부분을 읽다가 전체를 잃어버리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주는 작품이다. 우리는 책을 읽으며 수많은 의미를 발견하고, 때로는 자신만의 해석에 깊이 빠져든다. 그러나 그 해석이 작품 전체와 연결되지 못한다면 아무리 정교한 분석이라도 에게우스가 치아에 부여했던 관념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에게우스의 끔찍한 행동에 경악하는 동안에도, 우리의 독서는 이미 그와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을지 모른다. 책을 덮기 전에 한 번쯤 자신의 독서를 돌아보는 것도 좋겠다. 오늘 당신은 책을 읽으며 베르니스의 이를 몇 개나 뽑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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