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마니아』를 읽기 전에 ① : 로마는 어떻게 황제의 나라가 되었을까
트로이의 마지막 영웅에서 클레오파트라의 죽음까지
┃ 들어가며

로마라고 하면 무엇이 먼저 떠오를까. 콜로세움(Colosseum)과 목욕탕, 사방으로 뻗은 도로,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말을 남긴 카이사르, 로마에 불을 질렀다고 알려진 네로 정도일 것이다.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 코끼리를 이끌고 알프스산맥(Alps)을 넘은 한니발도 어딘가 로마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알지만, 이들이 어느 시대에 살았고 서로 어떤 관계였는지는 쉽게 이어지지 않는다. 익숙한 이름은 많지만 시간의 순서가 보이지 않으니, 로마는 아는 것 같으면서도 막상 설명하려 하면 손에 잡히지 않는 나라가 된다.
그래서 로마사를 조금 읽어도 지식은 자주 파편으로 남는다. 한니발이 로마 사람인지 카르타고 사람인지 헷갈리고, 옥타비아누스와 아우구스투스가 서로 다른 인물처럼 보이며, 카이사르와 시저는 두 사람처럼 들린다. 그러다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Germania)』를 펼치면 또 다른 이름들이 한꺼번에 쏟아진다. 갈리아(Gallia)와 게르마니아(Germania), 라인강(Rhine), 아르미니우스(Arminius), 아우구스투스(Augustus)와 도미티아누스(Domitianus)까지 등장하지만 이들이 놓인 시간의 자리가 보이지 않는다. 사건 하나하나는 흥미로운데 서로 어느 만큼 떨어져 있는지 알 수 없으니, 독자는 본문보다 주석과 검색창을 더 오래 들여다보게 된다.
『게르마니아』를 읽기 전에 로마를 먼저 알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만 왕과 전쟁의 연도를 빼곡하게 외우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역사사전이나 연표에 맡겨도 충분하다. 여기서는 불타는 트로이에서 살아남은 한 영웅이 어떻게 로마인의 조상이 되었고, 늑대의 젖을 먹은 쌍둥이가 세웠다는 도시가 어떤 길을 거쳐 한 사람의 지배 아래 놓였는지를 이야기로 따라가려 한다. 카르타고와의 전쟁, 갈리아 정복, 카이사르의 암살,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몰락은 따로 떨어진 사건이 아니라 로마가 공화정에서 황제의 나라로 이동하는 하나의 긴 과정이었다.
로마는 어떻게 황제의 나라가 되었을까? 그 답은 황제에게서 시작되지 않는다. 로마의 이야기는 패망한 도시에서 살아남은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한다.
┃ 트로이가 무너지던 날
그리스 연합군과 트로이(Troy)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은 수많은 영웅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트로이 최고의 전사 헥토르(Hector)는 아킬레우스(Achilles)에게 죽었고, 아킬레우스 역시 전쟁이 끝나기 전에 목숨을 잃었다. 오랜 전쟁을 견디던 트로이는 결국 목마를 이용한 그리스군의 계략에 넘어가 불길 속에서 무너졌다.
그러나 트로이의 모든 영웅이 죽은 것은 아니었다. 아이네이아스(Aeneas)는 살아남았다. 그는 아프로디테의 아들이자 트로이의 전사였으며, 멸망하는 도시를 혼자 빠져나온 도망자가 아니었다. 전승 속 아이네이아스는 늙은 아버지 안키세스(Anchises)를 등에 업고 어린 아들 아스카니우스(Ascanius)의 손을 잡은 채 트로이를 떠난다. 그의 탈출은 목숨 하나를 건진 사건이 아니라 가족과 신, 그리고 사라진 공동체의 미래를 함께 옮기는 장면이었다.
이후 아이네이아스는 지중해 여러 지역을 떠돌다가 이탈리아의 라티움(Latium)에 도착한다. 그의 아들 아스카니우스는 율루스(Iulus)라고도 불렸으며, 전승에서는 알바 롱가(Alba Longa) 왕가의 시조가 된다. 훗날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가문은 바로 이 율루스의 후손이며, 더 멀리 올라가면 아프로디테의 혈통이라고 주장했다. 로마의 권력자들은 단순히 오래된 전설을 믿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전설을 자신의 정치적 정통성과 연결했다.
물론 아이네이아스에서 로마 건국까지 이어지는 계보는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 여러 시대의 신화와 전승이 결합한 이야기다. 특히 오늘날 우리가 잘 아는 형태는 로마 최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베르길리우스가 쓴 서사시 『아이네이스』를 통해 정교하게 다듬어졌다. 트로이의 몰락이 로마의 탄생으로 이어진다는 이야기는 새롭게 등장한 제국에 신성하고 오래된 기원을 마련해 주었다.
트로이는 사라졌지만 그 불씨는 아이네이아스의 손에 들려 이탈리아로 건너왔다. 그리고 여러 세대가 지난 뒤, 그 왕가에서 두 아이가 태어난다.
┃ 늑대가 키운 쌍둥이
아이네이아스의 후손들이 다스렸다는 알바 롱가 왕가에는 누미토르(Numitor)와 아물리우스(Amulius)라는 형제가 있었다. 동생 아물리우스는 형의 왕위를 빼앗고, 누미토르의 딸 레아 실비아(Rhea Silvia)가 아이를 낳지 못하도록 베스타 여신을 섬기는 사제로 만든다.
그러나 레아 실비아는 쌍둥이를 낳는다. 전승에서는 전쟁의 신 마르스(Mars)가 그들의 아버지였다고 말한다. 아물리우스는 훗날 왕위를 위협할 수 있는 아이들을 죽이려 했고, 쌍둥이는 티베르강(Tiber River)에 버려진다.
아이들이 담긴 바구니는 강물에 휩쓸려 사라지지 않았다. 물가에 닿은 두 아이를 암늑대가 발견해 젖을 먹였고, 이후 목동 파우스툴루스(Faustulus)가 데려가 길렀다고 전해진다. 이 아이들이 로물루스(Romulus)와 레무스(Remus)이다. 로마 건국 신화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도 바로 이 순간이다. 늑대의 배 아래에서 젖을 먹는 쌍둥이의 형상은 로마라는 도시가 사라진 왕가의 혈통과 야생의 생명력, 신의 보호를 동시에 이어받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로마인은 전통적으로 로물루스가 기원전 753년에 도시를 세웠다고 여겼다.
성인이 된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자신들의 출생을 알게 되고, 아물리우스를 몰아낸 뒤 외할아버지 누미토르를 다시 왕위에 올린다. 이후 형제는 자신들이 자란 곳에 새로운 도시를 세우려 한다. 그런데 시작부터 문제가 생긴다. 어느 언덕에 도시를 세울지, 누가 그 도시를 다스릴지를 두고 두 사람이 다툰 것이다. 싸움의 끝에서 레무스가 죽고 로물루스가 살아남는다. 판본에 따라 로물루스가 직접 동생을 죽였다고도 하고, 그의 부하가 죽였다고도 하지만 결과는 같다.
새 도시는 로물루스의 이름을 따라 로마(Roma)가 된다. 로마의 건국 이야기는 아름다운 화해로 끝나지 않는다. 살아남은 형제가 피를 흘려 도시를 세운다. 이후의 로마 역사에서 반복될 내전과 권력 투쟁이 이미 건국 신화 안에 들어 있는 셈이다.
┃ 로마는 처음부터 황제의 나라가 아니었다
로물루스는 로마의 첫 번째 왕으로 기억된다. 전승에 따르면 이후 로마에는 모두 일곱 명의 왕이 이어졌다. 초기 로마는 라틴인과 사비니인, 에트루리아인의 문화가 뒤섞인 작은 도시였으며, 오늘날 사람들이 떠올리는 거대한 제국과는 거리가 멀었다.
마지막 왕으로 전해지는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Tarquinius Superbus)는 ‘오만한 타르퀴니우스’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왕권은 이미 강압적이었고, 왕가에 대한 불만도 쌓여 있었다. 그러던 중 그의 아들 섹스투스 타르퀴니우스(Sextus Tarquinius)가 로마 귀족 여성 루크레티아(Lucretia)의 집을 찾아가 그녀를 겁박하고 욕보이는 사건이 벌어진다. 루크레티아는 남편과 아버지, 친족들을 불러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밝힌 뒤 복수를 맹세하게 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전해진다.
이 비극은 한 여성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Lucius Junius Brutus)를 비롯한 귀족들은 루크레티아의 시신 앞에서 더는 왕가의 폭력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맹세했고, 분노한 시민들과 함께 타르퀴니우스 왕가를 로마에서 몰아냈다. 역사와 전승이 뒤섞인 이야기이지만, 로마인이 왕정을 어떻게 기억했는지는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들에게 왕은 단지 오래된 통치자가 아니라 권력이 한 집안에 집중될 때 어떤 폭력이 벌어질 수 있는지를 상징하는 존재가 되었다.
기원전 509년경 로마에는 왕 대신 해마다 선출되는 집정관과 원로원이 나라를 운영하는 공화정이 들어섰다. 물론 오늘날의 민주공화국과 같지는 않았다. 로마 공화정의 권력은 오랫동안 귀족에게 집중되었고, 평민은 수백 년에 걸친 정치적 투쟁을 통해 권리를 넓혀 갔다. 그럼에도 왕 한 사람이 국가를 소유해서는 안 된다는 기억은 로마 정치문화 깊숙이 남았다.
이 기억은 훗날 카이사르가 지나치게 큰 권력을 손에 넣었을 때 다시 살아난다. 로마인이 그를 왕이 되려는 사람으로 의심한 까닭도, 옥타비아누스가 최고 권력을 쥐고도 자신을 왕이라 부르지 않은 까닭도 이 오래된 반감과 연결된다.
왕을 쫓아낸 로마는 이후 수백 년 동안 공화정을 유지한다. 그동안 주변 도시들을 복속시키고 이탈리아반도 대부분을 지배하게 된다. 그리고 바다 건너에는 로마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성장한 강국이 있었다.
그 나라가 카르타고(Carthage)였다.
┃ 카르타고와 로마가 바다에서 만나다
카르타고(Carthage)는 오늘날 튀니지 인근에 있던 북아프리카의 도시국가였다. 페니키아인이 세운 식민도시에서 출발했지만, 시간이 흐르며 서부 지중해의 해상 무역을 장악한 강국으로 성장했다.
육지에서 세력을 넓힌 로마와 바다를 장악한 카르타고는 결국 시칠리아(Sicilia)를 두고 충돌한다. 두 나라 사이에서 벌어진 세 차례의 전쟁을 포에니 전쟁(Punic Wars)이라고 부른다. 첫 전쟁에서 로마는 원래 익숙하지 않았던 해군을 새로 키워 카르타고를 꺾었고, 시칠리아를 최초의 해외 속주로 얻었다.
패배한 카르타고는 새로운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이베리아반도(Iberian Peninsula), 곧 오늘날의 스페인 쪽으로 세력을 넓힌다. 이곳에는 풍부한 은광과 병력을 충당할 수 있는 여러 민족이 있었다. 카르타고 장군 하밀카르 바르카(Hamilcar Barca)의 아들 한니발 바르카(Hannibal Barca)도 이베리아에서 성장했다.
그래서 ‘카르타고 장군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었다’는 말만 들으면 지도가 이상해 보인다. 카르타고는 아프리카에 있는데 알프스는 스위스와 프랑스, 이탈리아 부근에 있기 때문이다. 한니발이 군대를 출발시킨 곳은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가 아니라 카르타고가 지배하던 이베리아반도였다.
한니발의 군대는 이베리아에서 출발해 피레네산맥(Pyrenees)을 넘고, 오늘날 프랑스 남부를 지나 론강(Rhône) 유역으로 이동한 뒤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북부에 나타났다. 그 유명한 코끼리도 이 원정에 동원되었다.
┃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다
기원전 218년 시작된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은 로마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이탈리아에 들어왔다. 험준한 알프스를 넘어온 그의 군대는 긴 이동으로 큰 손실을 입었지만, 이탈리아에 도착한 뒤 로마군을 연달아 격파했다.
특히 기원전 216년 칸나이 전투(Battle of Cannae)에서 로마군은 포위당해 참혹한 패배를 입었다. 로마와 동맹을 맺었던 여러 도시가 한니발 편으로 돌아섰고, 로마는 국가의 존립을 걱정해야 할 만큼 궁지에 몰렸다. 그러나 한니발은 로마시를 함락하지 못했다. 로마는 큰 패배를 당하고도 전쟁을 포기하지 않았고, 정면승부를 피하면서 한니발의 병력을 서서히 소모시켰다. 동시에 로마군은 카르타고의 기반이던 이베리아와 북아프리카를 공격했다.
결국 한니발은 본국을 지키기 위해 아프리카로 돌아갔고, 기원전 202년 자마 전투(Battle of Zama)에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Scipio Africanus)가 이끄는 로마군에게 패했다. 카르타고는 해외 영토와 군사적 자율성을 잃었고 로마는 서부 지중해의 주도권을 차지했다. 이후 세 번째 전쟁 끝에 로마는 기원전 146년 카르타고를 파괴한다. 같은 시기 그리스 세계의 중심지였던 코린토스(Corinth)도 로마군에게 함락되었다. 로마는 이제 지중해의 강자가 아니라 지중해 자체를 지배하는 나라로 변하고 있었다.
그러나 승리했다고 해서 한니발의 공포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로마 본토 안에서 로마군을 거듭 무너뜨렸고, 로마와 맺은 동맹이 언제든 깨질 수 있다는 사실까지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칸나이의 패배는 한 번의 전투 손실이 아니라 국가 전체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감각을 로마인에게 남겼다. 훗날 로마군이 북방의 숲에서 또다시 대규모로 무너졌을 때 한니발의 기억이 되살아난 까닭도 여기에 있다. 한니발은 패배한 적장이었지만, 로마가 수백 년 동안 잊지 못한 악몽으로 남았다.
그러나 외부의 승리는 내부의 평화를 가져오지 않았다.
┃ 세계를 차지한 뒤 로마 안에서 벌어진 일
정복 전쟁은 로마에 막대한 부와 노예, 새로운 영토를 안겨 주었다. 그러나 그 부는 고르게 나뉘지 않았다. 오랫동안 전쟁터에 나가 있던 소농들은 토지를 잃었고, 귀족들은 넓은 토지와 노예 노동을 바탕으로 더 강해졌다. 정복지가 늘어나면서 그곳을 다스리는 총독과 군대의 권한도 커졌다. 장군들은 국가가 아니라 자신에게 충성하는 병사들을 거느리기 시작했고, 정치인은 선거와 법정뿐 아니라 군사력으로 경쟁하게 되었다.
로마 공화정의 제도는 작은 도시국가를 운영하던 시절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제 로마는 이탈리아를 넘어 스페인과 북아프리카, 그리스와 소아시아까지 지배하고 있었다. 영토는 커졌지만 권력을 나누는 방식은 그 변화를 따라가지 못했다.
기원전 1세기에 들어서자 로마의 정치는 개혁과 암살, 반란과 내전으로 얼룩진다. 마리우스(Gaius Marius)와 술라(Lucius Cornelius Sulla)가 군대를 이끌고 로마의 권력을 차지했고, 술라는 로마시를 점령한 뒤 독재관으로 집권했다. 공화정은 여전히 존재했지만, 무장을 갖춘 장군이 정치의 최종 승자가 되는 길이 이미 열려 있었다.
그 길의 끝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등장한다.
┃ 브루투스가 죽인 그 카이사르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는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말로 기억되는 바로 그 인물이다. 영어식 이름인 줄리어스 시저(Julius Caesar)와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같은 사람이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Gnaeus Pompeius Magnus), 크라수스(Marcus Licinius Crassus)와 정치적 동맹을 맺었다. 흔히 제1차 삼두정치라고 부르지만, 후대의 제2차 삼두정치처럼 법으로 설치된 공식 통치기관은 아니었다. 서로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세 명의 유력자가 손을 잡은 정치연합에 가까웠다.
카이사르는 갈리아(Gallia) 총독이 된 뒤 기원전 58년부터 여러 전쟁을 벌였다. 당시 갈리아는 오늘날의 프랑스와 벨기에, 스위스 일부를 포함하는 넓은 지역이었으며 하나의 통일국가가 아니라 여러 부족과 정치세력이 존재하는 공간이었다. 부족들은 서로 경쟁했고, 때로는 로마를 이용해 다른 부족을 견제했으며, 카이사르는 이 분열을 파고들어 세력을 넓혔다.
그러나 갈리아가 순순히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기원전 52년 아르베르니족의 젊은 지도자 베르킨게토릭스(Vercingetorix)는 흩어진 여러 부족을 하나로 묶어 로마에 맞섰다. 그는 카이사르의 군대가 현지에서 식량을 얻지 못하도록 마을과 곡물을 태우는 초토화 전략을 펼쳤고, 게르고비아(Gergovia)에서는 로마군에 뚜렷한 패배를 안기기도 했다. 갈리아 정복은 이미 끝난 전쟁이 아니라, 카이사르가 가장 위험한 반격과 마주한 순간을 지나고 있었다.
마지막 승부는 알레시아(Alesia)에서 벌어졌다. 카이사르는 성 안의 베르킨게토릭스 군을 가두기 위해 안쪽을 향한 포위선을 만들고, 외부에서 몰려올 갈리아 지원군까지 막기 위해 그 바깥에 또 하나의 방어선을 둘렀다. 로마군은 안과 밖에서 동시에 공격받았지만 끝내 버텼고, 베르킨게토릭스는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해 항복했다. 이 승리로 갈리아 정복은 사실상 굳어졌지만, 로마가 넓은 땅을 손쉽게 집어삼킨 것은 아니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인과 싸웠을 뿐 아니라 라인강(Rhine)을 건너온 여러 집단을 ‘게르만인’으로 구분했다. 그의 기록에서 라인강은 서쪽의 갈리아와 동쪽의 게르마니아를 가르는 중요한 경계로 그려진다. 하지만 실제 사람들의 이동과 혈연, 언어와 정치 관계가 강 하나를 따라 깔끔하게 나뉘었던 것은 아니다. 라인강 서쪽에도 게르만인으로 불린 집단이 있었고, 강 양쪽의 부족들은 전쟁과 동맹, 이주를 반복했다.
카이사르는 기원전 55년과 53년에 라인강 위에 목조 다리를 건설하고 강 동쪽으로 진입했다. 게르마니아를 정복해 속주로 만들기 위한 장기 원정은 아니었지만, 로마군은 필요하다면 라인강 너머까지 올 수 있다는 사실을 과시했다. 그의 갈리아 원정과 기록은 훗날 로마인이 갈리아와 게르마니아를 이해하는 방식에 큰 영향을 남겼다.
갈리아 정복으로 카이사르는 막대한 부와 자신에게 충성하는 군대를 얻었다. 그러자 로마 안에서 그의 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전쟁
제1차 삼두정치는 오래가지 못했다. 크라수스가 파르티아 원정에서 죽고, 카이사르의 딸이자 폼페이우스의 아내였던 율리아도 세상을 떠나면서 두 사람을 묶던 고리가 사라졌다. 폼페이우스는 원로원 다수파와 가까워졌고, 카이사르에게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로 돌아오라고 요구했다. 군대 없이 귀환하면 정적들에게 기소될 가능성이 높았던 카이사르는 이를 거부했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는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강(Rubicon)을 건넜다. 로마 장군은 원래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이 경계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강을 건넌 행위는 사실상 공화정에 대한 무장 도전이었다. 내전이 시작되자 폼페이우스는 로마를 떠나 동쪽으로 물러났고, 결국 기원전 48년 파르살루스 전투(Battle of Pharsalus)에서 패했다. 그는 이집트로 도망쳤지만, 당시 이집트를 다스리던 프톨레마이오스 13세(Ptolemy XIII) 측근들은 카이사르의 환심을 사려 폼페이우스를 살해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정적의 잘린 머리를 선물로 받고 기뻐하지 않았다. 로마의 유력 정치인이자 한때 자신의 동맹이었던 폼페이우스가 외국인의 손에 살해된 일을 모욕으로 여겼다고 전해진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추격해 이집트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또 다른 권력 싸움과 마주친다.
┃ 이집트의 어린 여왕 클레오파트라
당시 이집트는 고대 파라오 왕조가 아니라 알렉산드로스 대왕(Alexander the Great)의 장군 프톨레마이오스가 세운 그리스계 왕조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클레오파트라 7세(Cleopatra VII)는 이 왕조의 마지막 여왕이었다.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Ptolemy XII)가 죽은 뒤 클레오파트라는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가는 혈통을 보존한다는 명분으로 형제자매가 혼인하는 관습을 유지했으며, 두 사람도 명목상 부부였다.
그러나 왕궁의 권력은 둘로 갈라졌다. 클레오파트라는 동생을 앞세운 세력에게 밀려 이집트를 떠났고, 군대를 모아 왕위를 되찾으려 했다. 이 와중에 폼페이우스가 이집트로 도망쳐 왔다가 살해되었고, 뒤이어 카이사르가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에 도착했다.
클레오파트라는 로마 최고 권력자에게 접근해 자신의 왕위 계승권을 인정받으려 했다. 카펫이나 침구 속에 몸을 숨겨 카이사르 앞에 나타났다는 유명한 이야기도 이 만남에서 나왔다. 두 사람의 관계에는 연애적 감정이 있었을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당시 상황을 설명할 수 없다. 클레오파트라에게 카이사르는 잃어버린 왕위를 되찾게 해 줄 군사적 후원자였고, 카이사르에게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에 협조적인 이집트 통치자가 될 수 있었다.
이어진 알렉산드리아 전쟁에서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패배해 죽었고, 클레오파트라는 다시 왕위에 올랐다. 그녀는 또 다른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4세(Ptolemy XIV)와 공동 통치했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자신이 쥐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이후 카이사리온(Caesarion)이라 불린 아들을 낳았다. 정식 이름은 프톨레마이오스 15세 카이사르였으며, 클레오파트라는 그가 카이사르의 아들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카이사리온을 자신의 공식 후계자로 삼지 않았고, 유언에서는 옥타비아누스를 입양해 재산과 이름을 물려주었다.
┃ 카이사르는 왕이 되었을까
폼페이우스를 무너뜨린 뒤에도 카이사르는 여러 지역에서 남은 반대 세력과 싸워야 했다. 내전에서 승리한 그는 로마의 독재관이 되었고, 기원전 44년에는 종신 독재관이라는 지위까지 얻었다. 독재관은 원래 국가의 위기 때 일정 기간 강한 권한을 행사하도록 만든 공화정의 임시 관직이었다. 그러나 ‘종신 독재관’은 임시직이라는 본래 의미를 무너뜨렸다. 카이사르의 동상과 초상은 신과 왕을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세워졌고, 그의 권력이 어디까지 커질지 알 수 없었다.
로마인은 수백 년 전에 왕을 몰아낸 일을 자랑스럽게 기억했다. 그러므로 카이사르가 실제로 왕관을 쓰려 했는지와 별개로, 원로원 귀족들에게 그가 왕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원로원 회의장에 들어간 카이사르는 여러 원로원 의원에게 둘러싸여 칼에 찔렸다. 음모에 참여한 사람 중에는 마르쿠스 브루투스(Marcus Junius Brutus)와 가이우스 카시우스(Gaius Cassius Longinus)도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통해 널리 알려진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문장은 역사적 사실로 확인되는 카이사르의 마지막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이 문장이 상징하는 배신은 분명하다.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와 가까운 관계였고, 카이사르는 자신이 장악한 공화정을 지키겠다고 나선 공화주의자들의 칼에 쓰러졌다.
암살자들은 카이사르 한 사람을 죽이면 공화정이 되살아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죽음은 공화정을 구하지 못했다. 오히려 더 큰 내전을 불러왔다.
┃ 옥타비아누스는 누구였을까
카이사르가 죽었을 때 옥타비아누스는 아직 열여덟 살의 청년이었다. 본래 이름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Gaius Octavius)였으며, 카이사르의 누나 율리아의 외손자였다. 카이사르는 유언으로 그를 입양하고 자신의 재산과 이름을 물려주었다. 입양 이후 옥타비아누스의 정식 이름에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들어갔다. 그래서 같은 시대의 문헌과 희곡에서 카이사르라는 이름이 다시 나타난다.
이 지점에서 이름들이 한꺼번에 엉키기 쉽다.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 브루투스에게 암살당한 갈리아 정복자다. 영어식으로 줄리어스 시저라고도 부른다. 옥타비아누스(Octavian)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유언으로 입양된 후계자다. 아우구스투스(Augustus)는 옥타비아누스가 훗날 원로원에서 받은 칭호다. 옥타비아누스와 아우구스투스는 같은 사람이다. 카이사리온(Caesarion)은 클레오파트라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친아들이라고 주장한 인물이다.
한국에서는 Caesar를 라틴어식에 가깝게 ‘카이사르’라고도 하고 영어식으로 ‘시저’라고도 부른다. 따라서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줄리어스 시저는 같은 사람이다. 옥타비아누스는 젊고 정치적 기반도 약했지만, 카이사르의 이름을 물려받았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카이사르를 지지하던 군인과 민중에게 그는 죽은 지도자의 아들이자 복수자였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가장 강력한 부하는 따로 있었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였다.
┃ 두 번째 삼두정치
카이사르가 죽은 뒤 로마의 권력을 둘러싸고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경쟁했다. 여기에 레피두스(Marcus Aemilius Lepidus)까지 합류하면서 세 사람은 기원전 43년 제2차 삼두정치를 결성했다.
제1차 삼두정치와 달리 이 동맹은 법적으로 국가 운영 권한을 부여받은 공식 체제였다. 세 사람은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제거하고 로마 세계를 나누어 다스렸다. 그러나 공동 통치는 오래갈 수 없었다. 레피두스는 점차 권력에서 밀려났고, 로마의 서쪽은 옥타비아누스가, 동쪽은 안토니우스가 지배하는 구도가 만들어졌다.
안토니우스는 동부 속주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클레오파트라를 불러들였고, 두 사람은 본격적인 정치적 관계를 맺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가 죽은 뒤에도 이집트의 독립과 자신의 왕조를 지켜야 했다. 안토니우스에게는 이집트의 막대한 재정과 물자가 필요했고, 클레오파트라에게는 로마 권력자의 후원이 필요했다.
두 사람은 연인이자 정치적 동맹자가 되었다.
┃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와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그의 누이 옥타비아(Octavia)와 결혼했지만, 이후 다시 클레오파트라와 결합했다. 그는 클레오파트라와 사이에서 세 자녀를 두었고, 이집트를 중심으로 동부 지역에 자신들의 질서를 세우려 했다.
기원전 34년 알렉산드리아에서 열린 행사에서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 자녀들에게 여러 동방 영토와 칭호를 나누어 주었다. 특히 카이사리온을 신격화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아들로 공식 선포한 것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직접적인 위협이었다. 옥타비아누스가 가진 가장 강력한 정치적 자산은 자신이 카이사르의 아들이자 후계자라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클레오파트라의 아들이 카이사르의 친아들로 인정받는다면 그의 정통성은 흔들릴 수 있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로마인으로서의 의무를 저버리고 이집트 여왕에게 지배당하고 있다고 선전했다. 로마 내부의 권력 투쟁은 ‘로마와 이집트의 전쟁’처럼 포장되었다. 원로원은 안토니우스가 아니라 클레오파트라에게 전쟁을 선포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사이의 마지막 내전이었다.
┃악티움에서 끝난 공화정의 마지막 전쟁
기원전 31년, 그리스 서부의 악티움(Actium) 앞바다에서 옥타비아누스의 군대와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이 맞붙었다. 옥타비아누스 측 해군은 그의 오랜 동료이자 뛰어난 장군이었던 아그리파(Marcus Vipsanius Agrippa)가 지휘했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함대는 전투 도중 포위망을 뚫고 이집트로 향했지만, 많은 병력과 함선이 뒤에 남겨졌다. 남은 군대가 차례로 항복하면서 승부는 사실상 끝났다.
다음 해 옥타비아누스는 알렉산드리아에 입성했다. 안토니우스는 패배를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클레오파트라도 옥타비아누스의 포로가 되어 로마의 개선식에 끌려갈 가능성을 앞두고 자결했다. 독사에게 물렸다는 이야기가 가장 유명하지만 정확한 죽음의 방식은 확실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그녀의 죽음과 함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끝났고, 이집트가 로마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는 점이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리온도 살려 두지 않았다. 카이사르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두 사람이 함께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자녀들은 로마로 보내졌고, 옥타비아누스의 누이 옥타비아가 돌보게 되었다.
이제 옥타비아누스에게 맞설 경쟁자는 남아 있지 않았다.
┃ 나가며
로마는 왕을 몰아내고 공화정을 세운 도시였다. 한 사람의 손에 국가가 들어가는 일을 두려워했으며, 바로 그 두려움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죽였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죽음은 공화정을 되살리지 못했다. 암살 뒤에는 또 다른 내전이 이어졌고,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레피두스와 안토니우스가 차례로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리온까지 제거되자 카이사르의 젊은 양자 옥타비아누스만이 로마 세계의 유일한 지배자로 남았다.
기원전 27년, 원로원은 그에게 ‘존엄한 자’라는 뜻을 지닌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준다. 그는 왕관을 쓰지 않았고 자신을 왕이라고 부르지도 않았다. 집정관과 원로원, 공화정의 여러 제도도 없애지 않았다. 그러나 실질적인 군사력과 권력은 한 사람에게 모였다.
늑대의 젖을 먹은 두 아이로 시작한 도시, 왕을 쫓아내고 공화정을 세운 로마가 수백 년의 정복과 내전 끝에 다시 한 사람의 지배 아래 들어간 것이다. 이것이 로마는 어떻게 황제의 나라가 되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첫 번째 답이다. 황제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끝없이 넓어진 영토와 무너진 공화정, 반복된 내전과 살아남은 단 한 명의 후계자가 함께 만들어 낸 결과였다.
다음 이야기는 바로 이곳에서 시작한다.
아우구스투스는 내전으로 지친 로마에 질서와 평화를 가져왔지만, 동시에 황제가 지배하는 새로운 정치체제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의 시대에 로마군은 라인강을 넘어 게르마니아를 정복하려 했다. 그곳에는 로마군에서 복무하고 시민권과 기사 신분까지 얻은 한 게르만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르미니우스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