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가교환은 정말 공평할까?

┃ 들어가며

검은 배경 위 황금빛 영수증들이 떠오르고 연금술진이 빛나는 등가교환 칼럼 이미지

우리는 삶에서 무언가를 얻고 다른 것을 포기하는 일에 흔히 ‘등가교환’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 용어가 우리의 뇌리에 깊이 자리 잡게 된 데에는 애니메이션 『강철의 연금술사』의 오프닝에 등장하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동등한 대가를 필요로 한다. 그것이 연금술의 등가교환의 법칙이다”라는 말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신이 치러야 할 대가를 충분히 계산한 뒤 선택하지 않는다. 세상의 시간이 빠르게 흐를수록 이런 경향은 더욱 짙어진다. 당장 얻게 될 것은 보이지만, 그 선택으로 무엇을 잃게 될지는 좀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른 뒤 삶을 돌아보고서야 우리는 당시의 선택에 어떤 대가가 따라왔는지를 깨닫는다. 동등한 가치를 맞바꾸는 일이라는 등가교환. 그렇다면 삶에서 이루어지는 등가교환은 정말 공평할까?


┃ 칼럼

등가교환은 정말 공평할까

등가교환이 공평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얻은 것과 잃은 것의 무게가 서로 같다고 믿기 때문이다. 적어도 무엇인가를 손에 넣었다면 그만한 값을 치렀고, 무엇인가를 잃었다면 그에 상응하는 것을 얻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의 교환은 그렇게 선명하지 않다. 우리는 무엇을 얻었는지는 금방 알 수 있지만, 그것을 위해 무엇을 지불했는지는 훨씬 나중에야 깨닫는다.

선택하는 순간에는 가격표가 보이지 않고 거래가 끝났다는 신호도 들리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원하던 것을 얻었다고 생각하며 살아갈 뿐이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삶이 침묵의 영수증 한 장을 건넨다.

우리는 얻는 것만 바라본다

사람은 선택 앞에 서면 대개 무엇을 얻게 될지를 먼저 생각한다. 이 직장을 선택하면 얼마나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을지, 이 사람을 사랑하면 얼마나 행복해질 수 있을지, 이 길을 포기하면 얼마나 편안해질 수 있을지를 계산한다. 선택의 결과로 손에 들어올 것들은 비교적 선명하게 보인다. 돈과 지위, 자유와 사랑, 안정과 성취처럼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반면 그 선택으로 잃게 될 것은 쉽게 보이지 않는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며, 포기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 채 사라질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안정을 선택한 사람은 불안을 줄이고 예측 가능한 삶을 얻지만, 그 과정에서 낯선 길로 떠날 가능성과 실패할 자유를 포기할 수 있다. 자유를 선택한 사람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삶을 얻지만 자신을 붙들어 줄 관계와 돌아갈 장소를 잃을 수 있다. 성공을 선택한 사람은 인정과 성취를 얻는 대신 시간과 잠, 평범한 일상을 지불할 수 있고, 사랑을 선택한 사람은 누군가와 함께하는 삶을 얻는 대신 혼자일 때 가능했던 다른 삶들을 내려놓아야 한다. 어느 선택도 단순히 하나를 얻는 일로 끝나지 않는다. 무언가를 얻는 순간, 보이지 않는 다른 가능성들은 조용히 닫힌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삶을 볼 때도 그가 얻은 것만 바라본다. 성공한 사람에게서는 성공을 보고, 자유롭게 사는 사람에게서는 자유를 보며, 안정된 가정을 이룬 사람에게서는 평온함을 본다. 그 사람이 무엇을 지불했는지는 잘 보지 않는다. 보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부러워할 때 그 대가까지 함께 부러워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타인의 결과만 가져오고 싶어 하지, 그 결과와 한 묶음으로 붙어 있는 희생까지 떠안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타인의 삶은 언제나 실제보다 완전해 보인다. 그가 가진 것은 보이지만 그가 포기한 것은 보이지 않고, 그가 도착한 장소는 보이지만 그곳까지 가기 위해 지나온 길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크눌프와 재단사는 서로의 영수증을 보지 못했다

헤르만 헤세의 『크눌프』에는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가는 두 사람이 등장한다. 재단사는 한곳에 머물러 일하고 가정을 이루며 안정된 삶을 살아가고, 크눌프는 정착하지 않은 채 길을 떠돌며 자유롭게 살아간다. 겉으로 보면 두 사람의 삶은 선명하게 대비된다. 한쪽에는 질서와 책임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자유와 이동이 있다.

어느 쪽이 옳다고 쉽게 말하기도 어렵고, 어느 쪽이 더 행복하다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재단사는 크눌프의 삶을 보며 자신이 잃어버린 자유를 떠올릴 수 있다.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고 가족을 책임지며 살아가는 사람에게 어디에도 묶이지 않고 떠날 수 있는 크눌프의 삶은 눈부셔 보일 수 있다. 반대로 크눌프는 재단사의 집과 일상, 돌아갈 장소를 보며 자신에게 없는 안정을 바라볼 수 있다. 자유롭게 떠돌 수 있다는 것은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뜻이지만, 동시에 어느 곳에도 완전히 머물지 못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서로가 가진 것을 보지만 서로가 치른 대가는 보지 못한다. 재단사는 안정을 얻기 위해 자유를 지불했고, 크눌프는 자유를 얻기 위해 안정을 지불했다. 재단사가 바라본 것은 크눌프의 자유였지 그의 외로움과 불안정이 아니었고, 크눌프가 바라본 것은 재단사의 평온한 일상이었지 그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반복해서 포기해야 했던 가능성들이 아니었다. 둘은 서로의 삶을 부러워할 수 있었지만 서로의 영수증까지 읽을 수는 없었다.

이 장면에서 등가교환은 노력과 보상의 문제가 아니게 된다. 누가 더 성실했는지, 누가 더 많은 대가를 치렀는지를 비교하는 일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삶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값을 치른다는 사실이다. 어떤 사람은 자유를 얻기 위해 관계를 내놓고, 어떤 사람은 관계를 지키기 위해 자유를 포기한다. 어느 쪽도 공짜가 아니며, 어느 쪽도 완전하지 않다. 선택은 하나의 삶을 얻는 동시에 다른 삶을 잃는 일이다.

현실의 거래에는 가격표가 없다

『강철의 연금술사』 속 등가교환은 적어도 거래가 일어나는 순간 대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무엇을 얻으려면 무엇을 내놓아야 하는지가 비교적 분명하다. 그러나 현실의 선택에는 그런 가격표가 붙어 있지 않다. 우리는 직장을 선택하면서 앞으로 몇 년의 시간을 지불하게 될지 알지 못한다. 사랑을 시작하면서 그 관계를 위해 얼마나 많은 자신을 포기하게 될지 알지 못하고, 자유를 택하면서 훗날 얼마나 깊은 외로움을 감당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안정을 택하면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들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다.

선택하는 순간에 대가가 보였다면 우리는 전혀 다른 결정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성공을 위해 젊음 대부분을 내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 성공을 원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안정된 삶을 얻는 대신 평생 한 번도 자신이 원하는 길을 걸어 보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잠시 더 망설였을 수도 있다. 반대로 자유를 얻는 대신 누구에게도 완전히 이해받지 못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정착을 선택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런 정보를 미리 제공하지 않는다. 우리는 불완전한 지식으로 선택하고, 그 선택이 무엇을 가져갔는지는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알게 된다.

영수증은 거래가 끝난 뒤에 받는다. 이미 물건을 손에 넣었고 비용도 지불한 다음에야 그 안에 무엇이 계산되어 있는지를 확인한다. 삶도 이와 비슷하다. 우리는 먼저 선택하고 살아가며, 그 선택의 결과 속에 오래 머문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자신이 무엇을 내놓았는지를 깨닫는다. 너무 오래 일한 뒤에야 잃어버린 시간을 알고, 관계가 끝난 뒤에야 그 관계를 지키기 위해 지불한 자신을 본다. 한곳에 정착한 뒤에야 떠날 수 있었던 길들을 떠올리고, 평생 떠돌고 난 뒤에야 돌아갈 장소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영수증에는 시간, 자유, 젊음, 잠, 가능성, 사랑 같은 단어들이 길게 나열되어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제야 대가를 치르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무엇을 대가로 치렀는지를 몰랐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선택 당시에는 사소해 보였던 것들이 뒤늦게 가장 비싼 항목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언젠가 다시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일, 언제든 돌아갈 수 있다고 믿었던 장소, 나중에도 곁에 있을 것이라 여겼던 사람은 시간이 지나고 나면 되찾을 수 없는 값이 되어 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은 계산하지 않는다

그러나 등가교환에는 우리가 자주 놓치는 반대편도 있다. 우리는 앞으로 무언가를 얻기 위해 무엇을 지불해야 하는지만 생각하지만, 이미 자신이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는 좀처럼 계산하지 않는다. 『강철의 연금술사』에는 “일어서라, 그리고 나아가라. 너에겐 훌륭한 다리가 있잖아”라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은 새로운 다리를 얻기 위해 대가를 치르라는 뜻이 아니다. 이미 있는 다리로 일어서라는 뜻이다. 그 다리를 얻기 위한 값을 자신이 직접 치른 것도 아니다. 부모가 생명을 주고 길렀으며, 수많은 사람과 환경이 한 인간이 자라날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대가를 치렀다.

그런데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은 다리처럼 눈에 보이는 것만이 아니다. 누군가에게서 배운 말, 오래 읽은 책에서 얻은 생각, 실패를 지나며 생긴 판단력, 상처를 견디고도 남아 있는 힘, 자신도 몰랐던 재능과 습관처럼 우리는 알게 모르게 많은 것을 가지고 살아간다. 어떤 것은 타인이 치른 대가로 내게 주어졌고, 어떤 것은 과거의 내가 이미 값을 지불해 얻었지만 너무 오래 가지고 있었기에 처음부터 내 것이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우리는 없는 것을 얻기 위해 또 무엇을 내놓아야 할지만 고민하다가, 이미 손에 쥔 것을 사용하지 못하기도 한다. 모든 출발이 새로운 거래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시 대가를 치르는 일이 아니라, 이미 자신에게 주어진 것과 자신 안에 축적된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일이다. 우리는 빈손으로 다음 교환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보면 등가교환은 단순히 잃은 것과 얻은 것을 맞바꾸는 법칙으로만 남지 않는다. 지금의 나는 과거의 수많은 교환이 남긴 결과이기도 하다. 내가 선택해 얻은 것뿐 아니라 누군가가 건네준 것, 이전 세대가 만들어 놓은 것, 과거의 내가 힘들게 익혀 둔 것도 현재의 나를 이룬다. 삶이 건네는 영수증에는 내가 지불한 항목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결제가 끝났지만 아직 제대로 사용하지 않은 것들도 함께 남아 있다.

그러므로 자신이 잃은 것만 세는 일 역시 삶의 전체를 보는 방식은 아니다. 자유를 위해 안정을 지불했다면 그 대가로 얻은 자유도 여전히 남아 있고, 실패를 겪으며 시간을 지불했다면 그 과정에서 얻은 경험과 판단도 남아 있다. 대가가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대가만 남은 것도 아니다.

모든 선택은 다른 삶을 포기하는 일이다

이미 가진 것을 발견한다고 해서 선택의 대가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여전히 하나의 삶만 살 수 있으며, 어떤 길을 선택하든 선택하지 않은 길들은 현실이 되지 못한 채 사라진다. 그렇다고 선택하지 않은 모든 삶이 더 좋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자유를 택하지 않았다고 반드시 불행한 것도 아니고, 안정을 포기했다고 반드시 후회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선택이든 그것만의 비용을 가진다는 사실이다. 완벽한 선택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모든 것을 얻고 아무것도 잃지 않는 길은 없다. 하지만 아무것도 가진 적 없이 모든 것을 새로 얻어야 하는 삶도 없다. 우리는 무언가를 지불하며 앞으로 나아가지만, 다음 선택 앞에 완전히 빈손으로 서지는 않는다.

우리는 종종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기 위해 오래 고민한다. 그러나 선택의 문제는 정답을 찾는 일과 다를 수 있다. 어떤 선택이 옳은지를 묻기 전에 그 선택을 위해 무엇을 지불할 수 있는지를 묻는 편이 더 현실적이다. 자유가 중요하다면 자유를 위해 감당해야 할 외로움과 불안을 함께 받아들여야 하고, 안정이 중요하다면 안정 때문에 닫힐 가능성과 반복되는 책임도 함께 받아들여야 한다. 성공을 원한다면 성공에 필요한 시간과 실패의 위험을, 사랑을 원한다면 사랑으로 인해 생길 상처와 상실의 가능성을 함께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그 질문만으로는 부족하다. 무엇을 더 얻기 위해 무엇을 지불해야 하는지를 묻기 전에, 이미 내게 무엇이 있는지도 살펴야 한다. 다리가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다리가 아니라 걷는 일이며, 오래 쌓인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또 다른 준비가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일일 수 있다. 선택은 언제나 빈손으로 시작되지 않는다.


┃ 마치며

등가교환은 노력한 만큼 보상을 받는다는 낙관적인 법칙처럼 들린다. 그러나 삶에서 그것은 훨씬 어둡고 복잡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대가를 치르지만 그 대가가 무엇인지 선택하는 순간에는 알지 못한다. 무엇을 얻었는지는 즉시 확인할 수 있지만 무엇을 잃었는지는 몇 년 뒤에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의 삶을 쉽게 부러워하고 자신의 선택을 뒤늦게 의심한다. 상대가 가진 것은 보이지만 그가 지불한 것은 보이지 않고, 내가 지불한 것은 선명하지만 그 대가로 얻은 것은 너무 익숙해져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크눌프와 재단사 중 누가 더 나은 삶을 살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두 사람은 각자 원하는 것을 얻었고 각자 다른 것을 지불했다. 서로의 삶을 바라보며 자신에게 없는 것을 발견했지만, 상대가 그것을 얻기 위해 내놓은 것까지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우리 역시 다른 사람의 결과는 볼 수 있지만 그의 영수증은 볼 수 없다. 그러나 자신의 영수증을 펼쳐 볼 때조차 지불한 항목만 읽어서는 안 된다. 그 대가로 무엇이 남았는지, 누군가가 먼저 값을 치러 내게 건넨 것은 무엇인지, 오래전의 내가 이미 얻어 둔 것은 무엇인지도 함께 보아야 한다.

삶은 대가를 먼저 알려 주지 않는다. 다만 선택이 끝난 뒤 이미 되돌릴 수 없는 거래의 영수증을 건넨다. 그렇다고 삶이 영수증만 보내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은 부모와 타인과 이전 세대가 값을 치러 이미 내 손에 놓아 주었고, 어떤 것은 과거의 내가 값을 치른 뒤 지금의 나에게 남겨 두었다. 우리는 아직 얻지 못한 것만 바라보느라 그것을 보지 못할 뿐이다.

그러므로 선택 앞에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만이 아닐 것이다.

나는 이것을 얻기 위해 무엇을 지불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보다 먼저 한 번쯤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나는 이미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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