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현실을 책처럼 읽은 작가

┃ 한눈에 보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의 중년 모습을 표현한 펜 드로잉 초상화
출생1899.08.24
사망1986.06.14
출생지부에노스아이레스
국적아르헨티나
직업소설가 · 시인 · 에세이스트 · 번역가 · 사서
문학 사조모더니즘 · 아방가르드 · 울트라이스모
대표 장르단편소설 · 시 · 에세이 · 환상문학
핵심 키워드미로 · 도서관 · 거울 · 무한 · 시간 · 기억 · 언어 · 번역 · 동일성
대표작『픽션들』 · 『알레프』 · 『불한당들의 세계사』 · 『모래의 책』
주요 영향에드거 앨런 포 ·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 G. K. 체스터턴 · H. G. 웰스 · 프란츠 카프카 ·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주요 협업 작가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 실비나 오캄포
주요 수상포르멘토르 국제상 · 미겔 데 세르반테스상 등

┃ 들어가며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를 읽는 일은 한 작가가 만들어낸 기묘한 상상의 세계를 구경하는 일과는 조금 다르다. 그의 작품에는 존재하지 않는 책과 가상의 저자, 끝없는 도서관과 미로, 거울과 분신, 기억과 시간의 역설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얼핏 보면 현실에서 멀리 떨어진 환상처럼 보인다. 그러나 보르헤스가 평생 파고든 것은 오히려 현실에 가까웠다. 인간은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언어는 사물을 얼마나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가. 하나의 철학은 세계 전체를 설명할 수 있는가. 기억 속의 과거는 실제 과거와 같은가. 번역된 작품은 원작과 같은 작품인가. 한 사람이 다른 시대의 문장을 그대로 다시 쓴다면 그것은 같은 작품인가, 새로운 작품인가.

그에게 철학은 단순히 공부해야 할 이론이 아니었다. 하나의 철학적 가정을 끝까지 밀어붙였을 때 어떤 세계가 만들어지는지를 직접 보여주는 문학적 재료에 가까웠다. 그래서 그는 “관념론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하기보다 명사가 없는 언어를 가진 세계를 만들고, 무한이라는 개념을 논증하기보다 모든 책이 들어 있는 도서관을 만들어버린다. 이 독특한 사고법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다. 영어와 스페인어가 함께 사용되던 어린 시절의 집, 아버지의 도서관, 어린 나이에 시작한 번역, 유럽에서 만난 여러 언어와 문학, 아르헨티나로 돌아온 뒤 이어진 시와 에세이 작업, 도서관에서 보낸 세월, 비오이 카사레스와의 협업, 그리고 점점 사라져간 시력까지 그의 삶 전체가 글쓰기와 연결되어 있다.

보르헤스를 이해하려면 그래서 작품 속 미로만 바라보아서는 부족하다. 그 미로를 만든 사람이 평생 무엇을 읽었고, 어떻게 언어를 바라보았으며, 왜 현실과 허구 사이의 경계를 끊임없이 흔들었는지를 함께 볼 필요가 있다.


┃ 아버지의 도서관에서 시작된 세계

보르헤스는 1899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에서는 스페인어와 영어가 모두 사용되었다. 영국계 할머니가 함께 살았고, 아버지 호르헤 기예르모 보르헤스는 영어와 스페인어 책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보르헤스는 훗날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을 하나 꼽으라면 아버지의 도서관이라고 말할 정도로 어린 시절부터 책 속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에게 책은 현실 바깥의 별도 공간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책은 이미 현실의 일부였다. 그는 영어를 스페인어보다 먼저 읽을 수 있게 되었고, 마크 트웨인과 에드거 앨런 포,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H. G. 웰스 등을 영어로 읽었다. 심지어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도 처음에는 영어판으로 읽었다고 회고했다.

이 경험은 이후 그의 작품을 이해할 때 중요하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원문과 번역은 분명하게 구분된다. 그러나 어린 보르헤스에게 스페인어 고전인 『돈키호테』조차 먼저 영어를 통해 들어왔다. 작품과 번역, 원본과 복제 사이의 경계가 처음부터 절대적이지 않았던 셈이다. 훗날 그가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에서 동일한 문장이 시대와 저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기묘한 이야기를 쓰게 되는 배경을 어린 시절의 경험 하나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보르헤스에게 언어와 번역의 문제는 이론으로 나중에 배운 문제가 아니라 아주 일찍부터 몸으로 경험한 문제였다는 점은 분명하다.

┃ 아홉 살 무렵의 번역가

보르헤스는 어린 시절부터 글을 썼다. 일곱 살 무렵 첫 이야기를 썼고, 아홉 살 무렵에는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를 스페인어로 번역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신문에 실었다. 이 일화는 단순히 “어릴 때부터 천재였다”는 이야기로 끝내기 아깝다. 보르헤스의 문학에서 번역은 평생 중요한 문제로 남기 때문이다. 번역은 다른 언어로 같은 내용을 옮기는 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문장의 리듬이 달라지고, 단어가 가진 역사와 뉘앙스가 달라지며, 독자가 공유하는 문화적 배경도 달라진다. 같은 작품을 옮겨도 번역자는 끊임없이 선택해야 한다.

보르헤스는 이후에도 여러 작품을 번역했고, 세계 문학을 폭넓게 읽었다. 그의 글에서 서로 다른 시대와 언어의 작가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한 문장 안에서 만나는 것은 이런 독서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보르헤스에게 책은 고립된 한 권이 아니었다. 한 책은 다른 책으로 이어지고, 번역은 또 다른 판본을 만들고, 한 시대의 독자는 이전 시대의 작품을 자기 언어로 다시 읽는다. 그의 작품에 반복해서 나타나는 복제, 변형, 개정, 재해석의 문제는 작가 자신의 독서와 번역 경험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 제네바에서 넓어진 세계

1914년 보르헤스 가족은 아버지의 시력 치료와 자녀 교육 등을 위해 유럽으로 떠났다. 보르헤스와 여동생은 제네바에서 학교를 다닐 예정이었고, 아버지는 현지 안과 전문의에게 치료를 받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해 여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가족은 예상보다 오랫동안 스위스에 머물게 되었다. 보르헤스는 그곳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프랑스어와 라틴어를 배우고 독일어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훗날 그는 제네바 시절을 돌아보며 프랑스어와 독일어, 표현주의와 쇼펜하우어, 불교와 도교 등을 자신의 지적 경험으로 언급했다. 이 시기는 그의 독서 세계가 한 국가의 문학에서 벗어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보르헤스의 작품에는 특정한 전통 하나만 존재하지 않는다. 영국 탐정소설과 독일 철학, 유대교 신비주의와 북유럽 신화, 이슬람 사상과 아르헨티나의 거리, 고대 철학과 현대 문학이 계속 뒤섞인다. 그에게 세계 문학은 서로 구분된 여러 나라의 문학이 아니라 거대한 하나의 도서관에 가까웠다. 그래서 보르헤스 작품을 읽다 보면 실제 작가와 가상의 작가, 유명한 고전과 존재하지 않는 책이 같은 무게로 등장한다. 독자는 어느 순간부터 “이 사람이 진짜 있었던 사람인가?”를 계속 확인해야 한다.

그러나 바로 그 확인 과정에서 보르헤스가 던지는 질문 하나가 생긴다.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어떤 정보를 현실이라고 믿는가.

┃ 스페인에서 만난 아방가르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보르헤스 가족은 스페인으로 이동했다. 보르헤스는 이곳에서 당시 아방가르드 문학 운동이었던 울트라이스모(Ultraísmo)와 가까워졌다. 그는 시와 비평을 발표하며 젊은 작가들과 교류했고, 1921년 아르헨티나로 돌아온 뒤에는 울트라이스모의 문학적 실험을 부에노스아이레스 문단에 소개했다. 울트라이스모는 장황한 수사보다 강렬한 이미지와 은유를 중시했다.

그러나 보르헤스는 이후 자신의 초기 울트라이스모 작품을 수정하거나 일부 삭제했고, 젊은 시절의 과도한 실험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는 첫 시집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열기』에서 이후 자신의 작품에 반복될 여러 주제가 이미 시작되었다고 회고했다. 시간의 반복, 동일성, 도시, 기억 같은 문제는 이후 그의 소설과 에세이에서도 계속 변형되어 등장한다. 이 점에서 보르헤스의 글쓰기는 끊임없는 개정처럼 보인다. 하나의 질문을 버리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같은 질문을 다른 장르와 다른 형태로 반복해서 다시 써나간다.

┃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다시 발견하다

1921년 아르헨티나로 돌아온 보르헤스는 자신이 태어난 도시를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알고 있던 부에노스아이레스였지만, 유럽에서 여러 해를 보낸 뒤 돌아온 도시의 모습은 이전과 같을 수 없었다. 그는 도시 외곽의 거리와 골목, 오래된 집과 지역의 기억을 시와 에세이에 담았다. 1923년 첫 시집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열기(Fervor de Buenos Aires)』를 발표했고, 이후 시와 에세이를 계속 발표했다.

흥미로운 점은 훗날 우리가 보르헤스를 주로 환상적인 단편소설의 작가로 기억하지만, 처음부터 소설가였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는 먼저 시인이었고, 에세이스트였으며, 비평가였고, 번역가였다. 그래서 그의 단편 역시 일반적인 소설과 다른 모습을 보인다. 등장인물과 사건을 따라가는 대신 가상의 책을 비평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철학을 설명하거나, 하나의 개념을 논증하는 에세이처럼 시작한다. 보르헤스의 소설이 자주 소설과 에세이 사이에 놓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는 오랫동안 두 장르를 동시에 사용해왔고, 결국 그 둘을 구분하기 어려운 형태의 작품을 만들어냈다.

┃ 시립도서관에서 보낸 시간

1937년 보르헤스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미겔 카네 시립도서관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그는 책을 분류하고 목록을 만드는 일을 했다. 업무가 많지 않은 시간에는 읽고 쓰는 데 시간을 사용했다. 보르헤스에게 도서관은 단순한 직장이 아니었다. 도서관은 인간이 세계의 지식을 분류해놓은 공간이다. 책마다 이름을 붙이고, 분야를 나누고, 번호를 매기고, 위치를 지정한다. 아무리 많은 책이 있어도 인간은 그것을 하나의 질서 안에 넣으려고 한다.

그러나 보르헤스의 작품에서 그 질서는 계속 무너진다. 「바벨의 도서관」에서는 모든 가능한 책을 포함하는 거대한 도서관이 등장하지만, 책이 무한에 가까워지는 순간 지식은 오히려 해독 불가능해진다. 모든 정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곧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보르헤스의 도서관은 그래서 지식의 상징인 동시에 분류와 해석의 한계를 보여주는 공간이 된다.

실제로 그는 이 시기 『픽션들』에 수록될 여러 작품을 쓰기 시작했고,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와 「바벨의 도서관」 같은 작품도 이 시기에 나왔다.

┃ 죽음 가까이에서 시작된 새로운 글쓰기

1938년은 보르헤스에게 중요한 해였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같은 해 크리스마스이브에는 계단을 오르다 열린 창문에 머리를 다치는 사고를 당했다. 상처가 감염되면서 패혈증이 생겼고, 그는 한동안 생명이 위험한 상태에 놓였다. 회복 과정에서 보르헤스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자신의 정신과 글쓰기 능력이 손상되었을 가능성이었다. 그는 이전 방식의 글을 써서 실패하면 더 이상 예전처럼 쓸 수 없다는 사실이 확인될까 두려웠다고 회고했다. 그래서 자신에게 익숙했던 시나 비평 대신 전혀 다른 형태의 글을 시도했고, 그 결과 가운데 하나가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였다.

이후 보르헤스의 대표적인 환상 단편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1941년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이 나왔고, 여기에 다른 작품들을 더해 1944년 『픽션들(Ficciones)』이 출간되었다. 『알레프(El Aleph)』는 1949년에 출간되었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보르헤스적인 소설’은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만들어졌다.

┃ 철학을 설명하지 않고 세계로 만들다

보르헤스 작품을 읽다 보면 철학자가 계속 등장한다. 버클리, 흄, 스피노자, 쇼펜하우어를 비롯해 여러 철학적 전통이 작품 속에 들어온다. 그러나 보르헤스는 철학 논문을 쓰지 않았다. 그가 흥미를 느낀 것은 어떤 사상이 사실인지 최종적으로 판정하는 일보다, 그 사상을 끝까지 밀어붙이면 어떤 세계가 만들어지는가에 가까웠다. 관념론을 논증하는 대신 관념론이 상식이 된 세계를 만들고, 무한을 정의하는 대신 무한한 도서관이나 하나의 점에 모든 공간이 들어 있는 알레프를 만든다.

이 때문에 그의 소설은 철학적이지만 철학 교과서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하나의 가설을 세운다. 그리고 그 가설이 현실이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끝까지 보여준다. 처음에는 완벽해 보이는 체계가 나타난다. 그러나 조금 더 진행하면 그 체계로 설명되지 않는 문제가 생긴다. 다시 새로운 설명이 등장하지만, 그것 역시 다른 문제를 낳는다. 보르헤스에게 철학은 정답이라기보다 세계에 적용해볼 수 있는 사고 실험에 가까웠다. 이 방식 때문에 그의 짧은 단편 하나 안에는 여러 권의 철학책에서 다룰 만한 문제가 압축되어 들어가기도 한다.

┃ 언어를 의심하다

보르헤스에게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언어였다. 우리는 이름을 붙이면 대상을 이해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하나의 명사는 서로 다른 수많은 개별 대상을 하나의 범주 안에 넣는다. ‘나무’라는 단어 하나에는 서로 다른 모양과 크기, 종류와 상태의 나무가 함께 들어간다. 단어는 세계를 이해하기 쉽게 만들지만, 동시에 차이를 지운다.

보르헤스는 이런 문제를 작품 속에서 극단적인 형태로 보여준다. 어떤 세계에서는 명사가 사라지고, 어떤 세계에서는 하나의 사물을 여러 형용사의 조합으로 표현한다. 그 설정은 기묘하지만 질문 자체는 현실에 가깝다. 언어가 세계를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하나의 분류 체계인가. 이 질문은 보르헤스의 문학 전체에서 끊임없이 반복된다.

┃ 비오이 카사레스와 만들어낸 ‘세 번째 작가’

보르헤스의 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Adolfo Bioy Casares)이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가까운 친구이자 공동 작업자였다. 보르헤스는 비오이와 함께 글을 쓰면서 자신의 문체가 달라졌다고 회고했다. 비오이가 절제와 간결함의 가치를 느끼게 해주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1940년대부터 공동으로 탐정소설과 풍자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이때 사용한 대표적인 필명이 H. 부스토스 도메크(H. Bustos Domecq)였다. 흥미로운 것은 보르헤스가 이 공동 필명을 단순한 가명으로 설명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둘이 함께 쓰기 시작하자 자신들과 다른 ‘세 번째 사람’이 나타난 것처럼 느껴졌다고 회고했다. 부스토스 도메크는 보르헤스도 아니고 비오이도 아닌 독자적인 문체와 취향을 가진 작가처럼 변해갔다.

이 경험은 보르헤스 작품에서 반복되는 저자와 동일성의 문제와 묘하게 겹친다. 한 작품의 저자는 누구인가. 두 사람이 함께 쓰면 작품에는 누구의 목소리가 남는가. 공동 작업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문체는 두 사람 중 누구에게 속하는가. 보르헤스는 이런 질문을 철학적 문제로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실제 글쓰기 과정에서도 경험하고 있었다.

┃ 환상문학을 함께 만들다

보르헤스는 비오이 카사레스와 실비나 오캄포와 함께 1940년 『환상문학 선집(Antología de la literatura fantástica)』을 편집했다. 이 작업 역시 그의 문학적 방향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보르헤스에게 환상은 현실을 버리고 다른 세계로 도망가는 방식과는 달랐다. 오히려 현실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전제를 하나만 바꾸었을 때 세계 전체가 얼마나 이상하게 보이는지를 드러내는 방식에 가까웠다.

시간이 직선으로 흐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가.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동일하다면 어떻게 되는가. 모든 가능한 책이 이미 존재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한 세계가 물질보다 관념을 먼저 믿는다면 어떻게 되는가. 질문 하나를 바꾸었을 뿐인데 현실 전체의 모습이 달라진다. 보르헤스의 환상은 그래서 현실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낯설게 보는 하나의 방법이 된다.

┃ 정치적 충돌과 도서관을 떠난 보르헤스

1946년 후안 페론이 집권한 뒤 보르헤스는 시립도서관의 자리에서 다른 직무로 이동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보르헤스는 훗날 자신이 가금류와 토끼를 검사하는 직무로 전보되었다고 회고했고, 이를 모욕적인 인사 조치로 받아들여 사직했다고 말했다. 이 일은 당시 보르헤스가 연합국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페론주의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던 것과 연결되어 설명된다.

도서관을 떠난 뒤 그는 강연과 교육 활동을 늘렸다. 이 시기부터 보르헤스는 글을 쓰는 작가일 뿐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문학과 철학을 말하는 강연자로도 활동하게 된다. 여기서도 그의 넓은 독서가 중요했다. 영미 문학, 북유럽 문학, 철학, 종교, 신화가 강연의 주제가 되었다. 책에서 읽어온 수많은 지식이 이제 말로 다시 구성되기 시작한 셈이다.

┃ 시력을 잃으며 다시 달라진 문학

보르헤스의 시력은 오랜 시간에 걸쳐 악화되었다. 그의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에게도 심각한 시력 문제가 있었으며, 보르헤스 자신도 이를 가족력으로 설명했다. 1950년대 중반이 되면 그는 사실상 책을 직접 읽거나 글을 쓰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글쓰기는 멈추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책을 읽어주었고, 그는 글을 기억하고 구술했다. 직접 쓴 초안을 눈으로 확인하기 어려워지면서 기억과 구술의 비중이 커졌고, 특히 운율과 각운을 기억하기 쉬운 시가 다시 중요한 형식이 되었다.

1955년 그는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장으로 임명되었고, 이듬해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에서 영미 문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거대한 도서관을 책임지게 되었지만 정작 자신은 그 책들을 눈으로 읽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보르헤스에게 도서관과 실명의 결합은 이후 작품과 강연에서 중요한 이미지로 남는다. 책은 눈앞에 존재하지만 직접 읽을 수 없다. 그러면 책은 기억과 타인의 목소리를 통해 다시 들어온다. 이 상황에서 문학은 더 이상 눈으로 읽는 글자만이 아니다. 기억되고, 말해지고, 다시 쓰이며 계속 변형되는 것이 된다.

┃ 기억과 망각 사이에서

보르헤스 작품에서 기억은 단순히 과거를 저장하는 능력이 아니다. 「기억의 천재 푸네스」에는 거의 모든 것을 잊지 못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일반적으로 완벽한 기억은 뛰어난 능력처럼 보인다. 그러나 모든 세부를 기억한다면 서로 다른 사물을 하나의 범주로 묶기도 어려워진다. 추상화는 어떤 차이를 잊는 능력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보르헤스는 기억과 언어를 다시 연결한다. 인간은 모든 차이를 기억하지 않는다. 잊고, 묶고, 이름을 붙인다. 그래야 사고할 수 있다. 보르헤스의 문학에서 인간의 지식은 그래서 완벽한 기록이 아니다. 기억과 망각, 분류와 생략이 함께 만들어낸 체계에 가깝다.

┃ 미로는 길을 잃는 장소만이 아니다

보르헤스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 가운데 하나가 미로이다. 그러나 그의 미로는 단순히 복잡한 공간을 뜻하지 않는다. 하나의 철학도 미로가 될 수 있고, 하나의 책도 미로가 될 수 있으며, 시간이나 기억도 미로가 될 수 있다. 미로에는 규칙이 있다. 완전히 무질서한 공간이라면 미로라고 부르기도 어렵다. 누군가 설계했기 때문에 길이 있고, 길이 있기 때문에 사람은 출구를 찾으려고 한다.

문제는 그 규칙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가에 있다. 보르헤스의 인물들은 자주 세계에서 질서를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너무 완벽한 질서를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오히려 그 질서 안에 갇힌다. 「죽음과 나침반」의 탐정 역시 사건 뒤에 완벽한 구조가 있다고 믿기 때문에 범인이 만들어놓은 구조 안으로 스스로 들어간다. 보르헤스 작품에서 질서는 혼돈의 반대라기보다 또 다른 위험이 되기도 한다.

┃ 거울과 분신, ‘나’라는 존재를 의심하다

보르헤스 작품에는 거울과 분신도 반복해서 등장한다. 거울은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원본은 아니다. 분신 역시 나와 닮았지만 내가 아니다. 그러나 어디까지가 원본이고 어디부터가 복제인지 묻기 시작하면 경계는 쉽게 흔들린다. 「보르헤스와 나」에서는 글을 쓰고 유명해진 ‘보르헤스’와 일상을 살아가는 개인 ‘나’가 분리된다. 결국 어느 쪽이 이 글을 쓰고 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다.

이 문제는 작가에게도 적용된다. 작품 속에 남아 있는 작가와 실제 삶을 살았던 인간은 같은 사람인가. 독자들이 알고 있는 ‘보르헤스’라는 이름은 한 인간인가, 아니면 책과 평론과 기억이 만들어낸 인물인가. 보르헤스는 자신에게조차 이런 질문을 돌려준다.

┃ 세계적인 작가가 되다

보르헤스는 아르헨티나와 스페인어권에서는 일찍부터 알려져 있었지만, 세계적인 명성이 크게 확대된 것은 1960년대 이후였다. 1961년 그는 사뮈엘 베케트와 함께 포르멘토르 국제상을 받았고, 이후 영어를 비롯한 여러 언어로 작품이 번역되면서 유럽과 미국에서도 널리 읽히기 시작했다. 그의 『픽션들』을 비롯한 작품들은 1960년대부터 국제적으로 빠르게 소개되었다.

이후 보르헤스는 세계 여러 대학에서 강연했고, 여러 문학상과 명예 학위를 받았다. 1979년에는 미겔 데 세르반테스상을 공동 수상했다. 그의 영향은 단편소설에만 머물지 않았다. 허구의 문헌을 실제 자료처럼 사용하는 방식, 작가와 독자의 관계를 뒤집는 방식, 소설과 비평을 섞는 방식, 텍스트가 다른 텍스트를 끝없이 낳는 구조는 이후 여러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오늘날에는 ‘보르헤스적’이라는 표현이 하나의 문학적 형식을 설명하는 말처럼 사용될 정도이다.

┃ 다시 제네바로

보르헤스는 말년에 다시 제네바로 갔다. 1914년 소년 시절 머물며 여러 언어와 철학을 만났던 도시였다. 그는 제네바를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장소로 기억했고, 결국 1986년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난 작가가 유럽에서 여러 언어와 책을 만나고, 다시 아르헨티나로 돌아가 수많은 세계를 만들다가 마지막에는 젊은 시절 자신이 지적 세계를 넓혔던 도시로 돌아온 셈이다.

그의 삶 역시 한 방향으로만 움직이지 않았다. 출발했던 장소가 다시 마지막 장소가 되고, 어린 시절 읽었던 책이 노년의 작품에서 다른 모습으로 돌아오며, 오래된 철학은 새로운 소설의 재료가 된다. 보르헤스가 평생 써온 시간의 원형과 반복이 그의 삶에서도 묘하게 겹쳐 보인다.

┃ 보르헤스는 왜 이런 이야기를 썼을까

보르헤스를 단순히 상상력이 뛰어난 환상문학 작가라고 설명하면 그의 작품에서 중요한 부분이 빠진다. 그의 상상력은 현실에서 멀어지는 방향보다 현실을 지나치게 오래 들여다본 결과에 가까워 보인다. 책을 오래 읽다 보면 같은 사건도 기록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여러 언어를 알게 되면 하나의 단어가 다른 언어에서는 정확히 대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번역을 하면 원문을 그대로 옮기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된다. 철학을 여러 개 읽으면 서로 다른 체계가 모두 세계 전체를 설명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역사를 읽으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과거 역시 남겨진 기록을 통해 재구성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보르헤스는 이런 문제를 하나씩 붙잡았다. 그리고 설명하는 대신 세계를 만들었다. 명사에 문제가 있다면 명사가 없는 세계를 만들었다. 모든 책의 가능성을 생각한다면 모든 책이 존재하는 도서관을 만들었다. 작품의 의미가 독자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면 『돈키호테』를 글자 하나 바꾸지 않고 다시 쓰는 작가를 만들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완전히 분리된 존재인지 의심된다면 서로 다른 인간이 결국 하나의 존재일 수도 있는 이야기를 만들었다.

이 때문에 보르헤스의 작품은 짧아도 쉽게 끝나지 않는다. 이야기가 끝난 뒤에 질문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 책을 읽는 일이 작품이 된 작가

보르헤스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한 가지가 계속 반복된다. 그는 평생 읽었다.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의 도서관에서 읽었고, 젊은 시절에는 여러 언어로 읽었으며, 번역하면서 다시 읽었다. 도서관에서 일하며 읽었고, 시력을 잃은 뒤에는 다른 사람이 읽어주는 책을 들었다. 그에게 독서는 완성된 지식을 받아들이는 일이 아니었다. 하나의 책을 읽으면 다른 책이 떠올랐고, 하나의 철학을 읽으면 그 철학의 반대편이 보였으며, 하나의 문장을 읽으면 다른 시대의 문장과 연결되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항상 다른 책의 흔적이 들어 있다. 실제 책과 가상의 책이 섞이고, 실제 철학과 만들어낸 철학이 함께 등장한다. 그 순간 독자는 작품을 읽는 동시에 무엇이 사실인지 찾기 시작한다. 결국 독자도 보르헤스와 같은 일을 하게 된다. 읽고, 의심하고, 찾고, 연결하고, 다시 해석한다. 보르헤스가 만든 가장 거대한 미로는 어쩌면 그의 소설 속 도서관이 아닐지도 모른다. 한 권의 책에서 다른 책으로 계속 이어지는 독서 그 자체가 그의 미로였을 수 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삶은 극적인 사건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삶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의 가장 중요한 사건 가운데 많은 것은 책을 읽고, 번역하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조용한 활동에서 그의 문학은 만들어졌다. 한 단어를 오래 들여다보면 언어가 이상해지고, 한 철학을 끝까지 따라가면 현실이 이상해지고, 한 권의 책을 다른 시대에서 다시 읽으면 저자와 작품의 관계까지 흔들린다.

보르헤스는 그런 균열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그 균열 속으로 들어가 세계 하나를 만들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읽는 일은 낯선 세계로 여행하는 것보다, 우리가 너무 익숙하게 받아들여온 언어와 시간, 기억과 현실을 다시 바라보는 일에 가깝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주요 작품

보르헤스는 시와 소설, 에세이를 모두 썼으며 장르 사이의 경계를 명확하게 나누지 않는 작품도 많다. 그의 대표적인 단편들은 길이가 짧지만 철학과 언어, 시간과 기억, 현실과 허구의 문제를 밀도 높게 다룬다.

  •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열기(Fervor de Buenos Aires)』 1923년에 발표한 첫 시집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거리와 도시의 기억을 다루며, 보르헤스가 이후 반복해서 다룰 시간과 장소의 문제가 초기부터 나타난다.
  • 『불한당들의 세계사(Historia universal de la infamia)』 1935년에 출간된 산문집이다. 실제 인물과 기록을 변형해 다시 쓰는 방식이 두드러지며, 보르헤스가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흔드는 초기 작업을 볼 수 있다.
  •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1939년에 발표된 단편이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완전히 같은 문장을 다시 쓰려는 작가를 통해 저자와 시대, 해석에 따라 동일한 문장이 어떻게 다른 작품이 되는지를 보여준다.
  •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 1940년에 처음 발표된 단편이다. 백과사전의 수상한 항목에서 시작해 언어와 철학, 학문과 역사, 현실을 구성하는 지식체계까지 확장된다. 보르헤스의 대표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다.
  • 「원형의 폐허」 꿈속에서 한 인간을 만들어내려는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창조자와 피조물, 현실과 꿈의 경계를 뒤집는다.
  • 「바벨의 도서관」 모든 가능한 책을 포함하는 거대한 도서관을 통해 무한한 정보와 인간의 해석 가능성 사이의 문제를 다룬다.
  • 『픽션들(Ficciones)』 1944년에 출간된 대표 단편집이다.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과 『기교들』에 실린 작품들을 묶은 책으로, 오늘날 보르헤스 문학의 핵심으로 평가되는 작품들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
  • 「기억의 천재 푸네스」 모든 것을 지나치게 정확하게 기억하는 인물을 통해 기억과 사고, 언어와 추상화의 관계를 묻는다.
  • 「죽음과 나침반」 탐정소설의 형식을 빌려 사건 뒤에 완벽한 질서가 있다고 믿는 탐정의 사고가 어떻게 함정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 『알레프(El Aleph)』 1949년에 출간된 단편집이다. 한 점 안에서 우주의 모든 장소를 동시에 볼 수 있는 ‘알레프’를 비롯해 무한과 시간, 동일성의 문제를 다룬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 『창조자(El hacedor)』 1960년에 발표된 산문과 시를 함께 담은 작품집이다. 실명이 진행된 이후의 보르헤스가 기억과 문학, 자신의 정체성을 되돌아보는 글들이 포함되어 있다.
  • 『모래의 책(El libro de arena)』 1975년에 발표된 단편집이다. 시작도 끝도 찾을 수 없는 무한한 책을 비롯해 보르헤스가 평생 다뤄온 무한과 책, 현실의 문제를 후기 작품에서도 이어간다.

┃ 북디에서 읽을 수 있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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