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 / 저메이카 킨케이드 / 세상 모든 딸들의 외침

┃ 도서 정보

찢어진 편지와 시든 수선화로 표현한 저메이카 킨케이드의 소설 『루시』
제목루시
저자저메이카 킨케이드
번역가정소영
출판사 / 시리즈문학동네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03
출간일2021.11.05
페이지148p
장르영미문학 · 성장소설 · 포스트식민주의 문학 · 여성문학
국가앤티가 바부다 · 미국
ISBN9788954682756
Original TitleLucy
Original AuthorKincaid, Jamaica
Original Date1990

┃ 들어가며

저메이카 킨케이드의 『루시』는 애니 존과 자매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애니 존이 청소년까지의 상황을 이야기한다면 이 작품은 이제 성인의 문턱을 넘기는 때의 이야기이다. 물론 두 작품 속 주인공의 상황은 조금 다르다. 하지만, 저자의 자전적 이야기에 허구를 조금 섞은 두 버전이기에 설정이 겹치는 부분이 많아 독자는 애니 존의 성인 버전으로 읽을 수도 있다. 사회적, 가정적 환경에 의하여 규정된 개인의 삶에 대한 반항이 어떤 식으로 발현되는지를 그린 이 작품에는 세상 모든 딸들의 외침이 담겨 있다.


┃ 작가 소개

저메이카 킨케이드(Jamaica Kincaid, 1949.05.25~)는 앤티가 바부다 출신의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이다. 본명은 일레인 포터 리처드슨(Elaine Potter Richardson)이며, 1965년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오페어로 일한 뒤 저널리스트와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후 『뉴요커』에서 오랫동안 필진으로 활동하며 문학적 경력을 쌓았다. 그의 작품에는 식민주의와 그 유산, 이주와 소속감, 여성의 정체성, 어머니와 딸의 관계 등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특히 자신의 성장 경험을 바탕으로 개인의 기억과 가족 내부의 갈등을 식민지 사회와 젠더의 문제까지 확장해 보여주는 것이 특징이다. 대표작으로 『강바닥에서』, 『애니 존』, 『루시』, 『작은 장소』, 『내 어머니의 자서전』 등이 있다.


┃ 목차

목차 펼쳐보기

불쌍한 방문객
머라이어

차가운 가슴
루시

해설 | 피식민 소녀의 착종된 성장기
저메이카 킨케이드 연보


┃ 줄거리

주인공인 열아홉 살의 루시는 카리브해의 섬나라에서 낯선 도시로 건너와 부유한 백인 부부의 아이를 돌보는 육아 도우미가 된다. 외적으로는 조용하고 정중하지만, 내면에는 섬을 떠나온 소녀의 분노와 단절이 가득하다. 그녀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애쓰면서도 과거를 끌어안은 채 철저히 자신을 숨긴다. 특히 엄마와의 관계는 그녀의 감정을 지배하며 그녀는 사랑과 억압이 뒤섞인 기억 속에서 기억하지 않기를 선택한다.

그러나 그녀는 엄마에 대한 서운함과 배신감, 식민지 도시에서의 삶이 남긴 응어리를 도시의 일상 속에서 조금씩 외부로 흘려보낸다. 머라이어와 폴, 친구들과의 관계를 통해 감정은 점차 그녀를 향해 되돌아오고, 그녀는 그것을 애써 밀어내려 한다. 하지만 공책과 만년필을 통해 자기 이름을 적는 순간, 루시는 스스로 억눌러온 감정의 진심과 마주한다. 말하지 못했던 사랑, 느끼지 않기 위해 외면했던 감정이 번져 나오는 그 순간, 그녀는 마침내 자기 감정의 핵심을 확인하게 된다.


┃ 작품 해석

세상 모든 딸들의 외침이 담겨 있는 저메이카 킨케이드의 『루시』는 단순하게 엄마와 딸 사이에 발생한 트러블을 그린 작품은 아니다. 오히려 식민지 사회의 상처와 성별에 따른 불평등에서 비롯된 문제들이기에 그 과정은 독자에게 더욱 깊게 다가온다. 이런 부분을 드러낸 몇 가지 상징을 살펴보자면 가장 먼저 수선화에 대한 그녀의 분노이다. 학교에서 강제로 암송하게 한 작품이기도 하며 봄의 꽃이라면서 머라이어가 매우 좋아하는 꽃이기도 하다.


생김새로 보자면 그곳에 앉아 저녁을 먹는 다른 승객들은 모두 머라이어의 친척 같았다. 그리고 그들을 시중드는 사람들은 모두 내 친척 같았다.

― 저메이카 킨케이드, 『루시』, 문학동네, p.30


그러나 이 에피소드를 깊게 들여다보면 수선화는 단순한 취향의 차이가 아니라 감정과 권력의 비대칭을 드러내는 상징이다. 머라이어에게 수선화는 나르키소스처럼 자기 세계의 이상과 문화를 대변하는 꽃이다. 반면 루시에게 수선화는 강요된 암송과 억압된 감정의 흔적이며 이는 사랑을 말했기에 신체를 잃어야 했던 에코에 가깝다. 결국 같은 꽃을 두고도 한 사람은 자기애를, 다른 사람은 소멸을 본다. 이 간극은 단순한 정서 차이를 넘어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감각 차이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치다.

그녀는 폴과의 관계에서도 비슷한 감정을 겪는다. 폴은 그녀를 이해하려 하지 않고 여자로서의 그녀만을 소유하고자 한다. 처음에는 낯선 도시에서 의지할 수 있는 관계로 보였지만 그 역시 루시에게 이름 없는 타자일 뿐이다. 루시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감정과 욕망이 소유되는 구조를 먼저 보기에 사랑 자체를 거부하게 된다. 머라이어가 자신의 문화를 강요하듯, 폴도 자신의 세계를 강요한다. 이 반복되는 감정의 지배 구조는 그녀에게 개인적 불행이 아니라 사회 구조의 문제로 각인된다.

그녀의 이러한 심리적 거부는 자신이 자라온 섬의 사회 구조에서 비롯된다. 그녀가 경험한 차별, 사람의 언어가 아니라 여성에게만 허용된 언어로 받아야 했던 훈련, 감정을 표현하기보다 삼켜야 했던 삶은 단순한 성격 문제가 아니라, 식민지 사회가 만들어낸 삶의 산물이었다. 그리고 가장 슬픈 진실은 이러한 억압이 가장 가까운 존재인 엄마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엄마는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삶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견뎌온 무시와 억압의 방식을 딸에게 강요하며 살아남는 법을 가르쳤다.


자신을 똑 닮은 자식인 나와 관련해서는, 약간이라도 비슷한 상황을 예상하는 인생의 시나리오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난 속으로 엄마를 ‘여자 유다’라고 불렀다.

― 저메이카 킨케이드, 『루시』, 문학동네, p.104


엄마는 딸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식민지 시대의 여성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동생들처럼 교육받길 원했지만, 남자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그 가능성은 애초에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엄마는 딸에게 더 나은 삶의 기회를 제공하지 않았고 자신이 감내해온 억압된 삶의 축소판을 강요했을 뿐이다. 루시는 그 결정에 배신감을 느끼며 엄마를 ‘여자 유다’라고 부른다. 기대가 배신으로 전환된 순간, 사랑은 경멸로 변했고 그녀는 철저히 그런 방식의 삶을 거부한다. 그러나 그녀는 알지 못한 채 무의식적으로 엄마의 방식대로 살아가고 있음을 드러낸다.


엄마의 아름다운 무명 머릿수건으로 싼 선물이었다.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나를 엄청나게 해줄 선물이었다. 딱 하나 문제가 있다면 거무죽죽한 깊은 웅덩이 밑바닥에 있다는 점이었는데, 웅덩이 물을 아무리 퍼내도 또 퍼내도 늘 바닥이 보이기 전에 꿈에서 깼다.

― 저메이카 킨케이드, 『루시』, 문학동네, p.72


그녀는 엄마에 대한 감정을 오랫동안 증오로 덮어왔다. 말하지 못한 것, 허락되지 않은 기대, 되돌려 받지 못한 사랑은 모두 아무리 퍼내도 퍼낼 수 없는 웅덩이 속에 갇혀 있었다. 하지만 공책에 자신의 이름을 적는 순간, 그녀는 꿈속에서 본 웅덩이의 물을 모두 퍼내고 그 속에 갇혀 있던 엄마의 무명 머릿수건으로 싸인 선물을 획득하게 된다. 이 선물을 가지게 된 그녀는 드디어 자신의 억눌린 감정의 실체를 깨닫게 된다. 결국 루시퍼에서 유래된 그녀의 이름은 정체성과 숨겨진 감정 깨달음의 시발점이 되었다.


아파트로 돌아와서 문지방을 넘는 순간 그곳이 내게는 집이 아니라 단지 지금 내가 사는 장소임을 깨달았다.

― 저메이카 킨케이드, 『루시』, 문학동네, p.125


결국 루시는 엄마에게서도, 고향에서도, 새로 도착한 도시에서도 완전히 소속되지 못한다. 자신을 규정해온 세계를 떠났지만 새로운 세계 역시 곧바로 집이 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녀의 독립은 자유를 얻는 순간이라기보다, 어느 곳에도 완전히 기대지 않은 채 스스로의 자리를 만들어가야 하는 시작에 가깝다. 엄마와의 관계를 끊고 자신의 이름을 다시 바라본 뒤에도 루시에게 남은 것은 완성된 정체성이 아니라, 이제부터 스스로 채워야 할 빈자리이다.


┃ 결론

저메이카 킨케이드의 『루시』는 신체는 이미 어른이 되었지만 정신은 아직 그 성장에 적응하지 못한 한 인물이 자신이 받은 차별에 대해 분노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모든 일의 트리거는 가장 사랑했던 엄마가 딸에게 비참한 여성의 삶을 벗어날 기회를 빼앗은 순간이었다. 이 억압은 단순히 교육의 문제를 넘어, 실질적인 언어와 보이지 않는 언어를 오가며 반복된다.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강인한 그녀의 분노를 마주하며, 우리는 그것이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사회 구조가 만들어낸 세상 모든 딸들의 외침이었음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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