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 / 다비드 칼리 / 전쟁의 문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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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iginal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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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iginal Date

글 : 다비드 칼리 / 그림 : 세르주 블로크

안수연

문학동네

2008.07.25

64p

그림책

이탈리아

9788954606059


L’ennemi / The Enemy

Cali, Davide

2007


┃ 들어가며

종전 이후 거의 30년 동안 홀로 제2차 세계대전을 계속 치른 군인이 있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을까. 바로 오노다 히로의 이야기다. 1945년에 전쟁은 끝났지만, 필리핀 루방섬에 남아 있던 그는 종전 소식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1974년까지 숨어 지냈다. 그에게 전쟁은 역사책 속 날짜가 아니라, 아직 끝나지 않은 현재였다. 너무나 비현실적인 이야기지만, 이 사건은 여러 기록과 미디어를 통해 이미 잘 알려져 있다. AI 시대를 사는 현대인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다비드 칼리의 그림책 『적』을 읽으면 그 심리를 조금은 짐작하게 된다. 문학동네에서 출간한 『적』은 전쟁을 반대해야 하는 이유를 거대한 구호가 아니라, 한 사람의 고립과 착각 속에서 보여주는 작품이다.


┃ 국제 앰네스티 소개 Amnesty International

국제 앰네스티는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인권 침해를 고발하고, 피해자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 활동하는 국제 인권운동 단체다. 사형제 폐지, 양심수 석방, 난민과 전쟁 피해자 보호 등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적』은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로 지정된 작품이며, 표지 뒷면에는 Amnesty International의 이름도 함께 찍혀 있다. 두 병사가 서로를 괴물로 믿은 채 전쟁을 이어가는 이 이야기는, 전쟁이 인간을 어떻게 고립시키고 상대를 비인간화하는지 보여준다. 그래서 이 마크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이 그림책을 전쟁과 인권의 문제로 읽게 만드는 작은 표지처럼 다가온다.


┃ 작가 소개 / 글

다비드 칼리는 스위스에서 태어나 현재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살고 있는 작가이다. 짧고 간결한 문장 안에 유머와 풍자를 함께 담아내는 작품을 주로 써 왔다. 『나는 기다립니다…』로 2005년 바오밥상을 받았고, 『피아노 치기는 지겨워』로 2006년 볼로냐 라가치상 예술상 부문을 수상했다. 『적』에서도 그는 거창한 전쟁 서사를 펼치기보다, 두 병사의 단순한 대치를 통해 전쟁이 인간의 인식을 어떻게 바꾸는지 보여준다.


┃ 작가 소개 / 그림

세르주 블로크는 1956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일러스트레이터다. 스트라스부르 국립 장식미술학교에서 공부했으며, 단순한 선 안에 유머와 풍자를 담아내는 그림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유럽 풍자만화협회 회원이며, 2005년에는 미국 일러스트레이터 협회에서 금메달을 받았다. 『나는 기다립니다…』, 『세상을 뒤흔든 31인의 바보들』 등에 그림을 그렸고, 『적』에서는 몇 가닥의 선과 여백만으로 전쟁의 공포와 우스꽝스러움을 동시에 보여준다.


┃ 줄거리

문학동네 다비드 칼리의 어린이 그림 동화책 적은 서로 적국에 속한 두 병사가 각각 참호를 파서 긴 전쟁을 이어오고 있다. 한 병사가 말한다. 자신은 처음 전쟁에 참여할 때 무기와 전쟁 지침서만 받아서 이 난리 통에 뛰어들었다고. 그 지침서에는 상대편 군사들을 사람이 아닌 없애 마땅한 파렴치한 짐승으로 쓰여 있다. 그는 야수이며 여자와 어린이를 아무 이유 없이 무자비하게 죽이며 그들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다고. 그래서 그는 도저히 상대를 놔두고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자국은 그를 잃어버렸는지 지원도, 구출도 없었다. 오로지 혼자서 상대해야만 하는 상황. 두더지처럼 땅굴을 파서 최소한의 음식으로 버티고 있다. 아침에 한번 총을 쏘면 상대도 똑같이 한번 쏜다. 그런 후 그들은 무한히 참호에서 나오지 않고 기다린다. 하지만 외로운 전쟁은 그를 지치게 만든다. 이쪽에서 불을 피우면 저쪽도 불을 피우면서 서로를 경계하며 매일매일을 보낸다. 고독과 두려움과 싸우다가 어느 날 밤하늘의 별을 본다. 그도 저 별을 보며 얼른 전쟁을 끝낼 마음이 들었으면 하면서.

자신이 그만두고 싶어도 자신이 백기를 들면 상대가 자신을 죽일 것만 같아 먼저 그만두자고 말하지도 못한다. 그래서 그가 먼저 그만두자고 말해주길 하염없이 기다린다. 왜냐하면 자신은 인간이기에 그가 평화를 원하면 그를 죽이지 않고 전쟁을 그만둘 것이기에. 비가 엄청나게 오는 날 밤 그는 결심한다. 밤에 몰래 그의 참호로 다가가 그를 죽이고 이 전쟁을 끝내기로. 그래서 밤에 위장을 잔뜩 한 다음 그의 초소로 향한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적 병사의 가족사진과 지침서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어찌 된 일일까?


┃ 작품 해석

― 다비드 칼리, 『적』, 문학동네

다비드 칼리의 『적』은 아이들이 놀이처럼 “전쟁이다”라고 외치는 장면처럼 단순하게 시작한다. 그림 역시 전쟁의 참혹함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피가 흐르지도 않고, 폭격 장면이 크게 펼쳐지지도 않는다. 세르주 블로크는 최소한의 선과 여백만으로 전쟁의 무게를 덜어낸 듯 보이게 만든다. 하지만 바로 그 단순함 때문에 이 책은 더 날카롭다. 전쟁이 거대한 무대와 웅장한 장면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머릿속에 심어진 믿음 하나로도 계속될 수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병사가 적을 죽이고 전쟁을 끝내겠다고 결심한 뒤, 한밤중에 상대의 참호로 향하는 장면이다. 그는 적을 야수라고 믿었다. 여자와 어린이를 아무 이유 없이 죽이는 괴물이며,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라고 배웠다. 하지만 그곳에 남아 있는 것은 괴물의 흔적이 아니라 가족사진이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누군가에게 돌아가야 하는 사람의 흔적이다. 더 결정적인 것은 그 옆에 놓인 지침서다. 자신이 받은 것과 완벽하게 똑같은 지침서가 상대의 참호에도 놓여 있다.

― 다비드 칼리, 『적』, 문학동네

그래서 『적』이 보여주는 전쟁은 총과 칼로만 벌어지는 싸움이 아니다. 왜곡된 역사 인식, 검증되지 않은 신념, 상대를 인간이 아니라 괴물로 만드는 말들도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사람은 자신이 받은 지침서를 의심하지 않을 때 가장 위험해진다. 그 지침서가 국가의 명령일 수도 있고, 사회의 편견일 수도 있고, 누군가가 반복해서 주입한 말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한 사람의 세계를 닫아버린다는 점이다. 닫힌 세계 안에서는 전쟁이 끝나도 끝났다는 사실이 들어오지 못한다.

오노다 히로의 이야기가 이 그림책과 겹쳐지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 전쟁은 1945년에 끝났지만, 그에게는 끝나지 않은 현재로 남아 있었다. 단순히 소식을 듣지 못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믿어온 명령과 세계를 쉽게 내려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적』의 병사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전쟁을 그만두고 싶지만, 자신이 받은 지침서 때문에 먼저 손을 내밀지 못한다. 상대가 괴물이라는 믿음이 무너지기 전까지, 평화는 선택지가 아니라 함정처럼 보인다.

― 다비드 칼리, 『적』, 문학동네


┃ 결론

그렇기에 『적』은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이지만, 오히려 어른에게 더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더는 제2의 오노다 히로가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자신이 받은 지침서부터 의심해야 한다. 내가 적이라고 믿는 그 사람은 정말 괴물인가. 아니면 나와 같은 지침서를 받은 또 다른 인간인가. 이 책은 전쟁을 멈추기 위해 먼저 총을 내려놓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보다 먼저, 내가 들고 있는 문장을 다시 읽어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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