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모』를 읽기 전, 세사르 아이라가 뿌려놓은 빵조각

┃ 들어가며

세사르 아이라 『바라모』 읽기 전 빵조각 찾기 대표 이미지, 투명한 둥근 어항 속 붉은 물고기

세사르 아이라(César Aira)의 『바라모(Varamo)』를 펼치면 한 문장씩은 말이 되는데, 이어 읽으면 좀처럼 하나의 뜻으로 모이지 않는 표현들이 계속 등장한다.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말들이 한 문단 안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가 하면, 아방가르드(avant-garde) 자체에 이미 실험과 전위의 의미가 들어가 있는데도 ‘실험적 아방가르드의 기원이자 정점’이라는 중의적인 표현이 등장한다.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몇 분이면 끝날 국기 하강식은 수 페이지에 걸쳐 계속되고, 현실의 짧은 시간이 서술 속에서 비정상적으로 늘어나면서 독자의 시간 감각마저 흔들어놓는다. ‘세상은 콜론(Colón)이었다. 콜론은 광장이었다’처럼 말장난인지 은유인지 쉽게 판별하기 어려운 표현도 스스럼없이 끼어든다. 문학적으로 말하면 하나의 장면이나 단어가 여러 의미층을 동시에 품는 상징적 과잉결정(symbolic overdetermination)이라고 할 수 있지만, 처음 이 작품을 접한 독자에게는 우선 당황스러운 문장들의 연속처럼 보이기 쉽다.

더구나 이런 장면들은 처음에는 서로 아무 관련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바라모』는 바로 그 무관해 보이는 것들을 하나씩 이어붙여 거대한 은유의 네트워크를 만들어가는 소설이다. 어떤 사건은 다음 사건의 원인이 되고, 어떤 형식은 뒤에서 의미가 되며, 처음에는 우연처럼 보였던 것이 나중에는 하나의 설명처럼 되돌아온다.

그래서 이 작품은 줄거리보다 먼저 몇 개의 빵조각을 기억해두는 편이 좋다. 왜 하필 1923년인지, 왜 수정이 없는지, 왜 시간은 늘어나는지, 왜 콜론이 광장이 되는지, 왜 왼손이 문제가 되는지, 그리고 왜 작품의 탄생을 말하는 소설 한가운데 성모와 예수가 놓이는지. 이 몇 가지를 붙잡고 들어가면 『바라모』가 얼마나 집요하게 자기 안의 단서를 되돌려 쓰는지 조금 더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 왜 바라모의 시에는 덧붙이거나 수정한 부분이 하나도 없을까

『바라모』는 바라모가 어떻게 걸작을 만들게 되었는지를 역추적해가는 소설이자, 그 탄생 과정을 하나의 인과관계로 복원해내는 비평의 형식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이 구조를 먼저 이해하면 이후에 등장하는 사소한 문장과 사건들의 의미가 달라진다. 처음에는 우연처럼 보이는 장면도 걸작의 기원을 설명하는 재료가 되고, 서로 관련 없어 보이던 사건들도 뒤에서는 하나의 맥락으로 연결된다. 특히 작품 초반에 등장하는 ‘그날 밤 처음으로 시를 쓰고, 덧붙이거나 수정한 부분 하나 없이 작품을 완성했다’는 설명은 유난히 눈에 띈다. 이것을 단순히 바라모가 천재적인 예술적 능력으로 단숨에 완벽한 작품을 만들었다는 찬사로 읽기보다, 세사르 아이라가 『바라모』라는 작품을 어떤 방식으로 진행할지를 미리 설명하는 문장으로 볼 수 있다.

아이라의 창작법을 설명할 때 반복해서 등장하는 말이 ‘앞으로의 도주(fuga hacia adelante)’이다. 이미 써놓은 부분으로 돌아가 문제를 고치는 대신, 앞에서 생긴 난관과 우연을 그대로 둔 채 다음 문장과 다음 사건을 만들어 앞으로 나아가는 방식이다. 그렇다면 바라모가 수정 없이 시를 완성한다는 설정은 작품 속 인물의 창작법과 작품 바깥 작가의 창작법이 겹치는 지점이 된다. 『바라모』 역시 앞에서 생긴 문제를 지우거나 정리하지 않는다. 위조지폐를 받은 사건은 다음 행동의 이유가 되고, 그 행동은 또 다른 사건을 만들며, 그렇게 이미 벌어진 일들이 하나씩 뒤의 이야기를 밀어낸다. 아이라는 바라모가 걸작에 도달한 과정을 설명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그 과정을 어떻게 서술할 것인지까지 작품 안에 심어놓은 셈이다.

이 방식으로 보면 『바라모』의 ‘앞으로의 도주’는 단순한 작가론적 배경지식이 아니다. 작품의 내용과 형식이 같은 원리로 움직인다는 단서가 된다. 바라모는 수정하지 않고 시를 쓰고, 아이라는 앞에서 생긴 사건을 버리지 않은 채 다음 사건으로 밀어붙이며, 서술자는 그 연쇄를 다시 걸작의 탄생 원인으로 정리한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무수정은 단순한 천재성의 표시가 아니라, 창작과 서술과 비평이 같은 방향으로 전진하는 방식을 미리 보여주는 장치에 가깝다.


┃ 실험적 아방가르드의 기원이자 정점이란

바라모의 「아기 예수의 노래」는 작품 안에서 실험적 아방가르드의 기원이자 정점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여기에서 먼저 아방가르드가 무엇인지 알아보자. 아방가르드는 원래 군대의 선두를 가리키던 프랑스어 avant-garde에서 시작하며 기존의 형식과 규칙을 깨고 새로운 표현 방식을 실험하려는 전위적 예술을 뜻한다. 그렇다면 ‘아방가르드의 기원이자 정점’이라고만 해도 충분하다. 그런데 『바라모』는 여기에서 한 번 더 ‘실험적’이라는 말을 덧붙여 ‘실험적 아방가르드의 기원이자 정점’이라고 표현한다. 아방가르드라는 말 안에 이미 들어 있는 실험성과 전위성을 다시 강조하는 셈이다. 그러면 아이라는 왜 이렇게 중첩적인 의미로 실험적 아방가르드라는 말을 썼을까?

아이라가 여기에서 굳이 ‘실험적’이라는 말을 한 번 더 덧붙이고, 바라모의 시를 아방가르드의 ‘기원’이라고까지 부른 이유는 이 작품이 기존 문학의 기준으로는 너무 낯설고 엉망이라 어디에도 쉽게 넣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바라모는 이전에 시를 써본 적도 없고 이후 다시 시를 쓰지도 않는다. 그의 작품 역시 기존의 시적 형식이나 계보 안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것으로 제시된다. 이런 텍스트가 그대로 놓이면 미숙하거나 실패한 글, 심지어 시라고 부르기 어려운 결과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실험적’이라고 부르면 형식의 붕괴는 실험이 되고, ‘기원’이라고 부르면 이전에 비슷한 것이 없었다는 사실은 결함이 아니라 독창성의 증거로 바뀐다. 기존의 시와 얼마나 닮지 않았는지가 오히려 새로운 문학의 출발점이라는 근거가 되는 셈이다.

여기에 ‘정점’까지 붙는다. 이전에 없던 것을 처음 만들었다는 이유로 기원이 되고, 그 낯섦과 설명 불가능성이 극단적이라는 이유로 동시에 정점이 된다. 시작과 최고점이 한 작품에 겹치면서, 바라모의 시는 계보도 발전 과정도 없이 곧바로 문학사의 최상단에 놓인다. 아이라는 이 과잉된 평가를 작품의 첫머리에 먼저 제시함으로써, 이후 독자가 보게 될 엉성하고 우연적인 과정이 어떻게 ‘실험’, ‘기원’, ‘정점’이라는 비평의 언어로 바뀔 수 있는지를 미리 깔아놓는다.


┃ 왜 ‘정당화된 원인과 결과의 사슬’이 필요할까

『바라모』의 서술자는 자신이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아주 노골적으로 설명한다. 바라모가 위조지폐를 받은 순간부터 시가 완성되는 순간까지 일어난 사건을 펼쳐 보이고, 하나의 사건 뒤에 다른 사건이 이어지면서 그 사이에 정당화된 원인과 결과의 사슬이 만들어진다고 말한다. 이것은 단순한 서술자의 설명을 넘어 『바라모』를 읽는 방법 자체를 알려주는 문장에 가깝다.

서로 아무 관련이 없어 보이는 A와 Z를 곧바로 붙이면 연결은 억지처럼 보인다. 그러나 A와 B 사이의 이유를 만들고, 다시 B와 C, C와 D를 연결해 한 칸씩 움직이면 상황은 달라진다. A→B→C→D……→Z가 되는 순간 처음과 끝은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하나의 경로 안에 들어온다. 이야기도 이런 식으로 만들어지지만, 해석과 비평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움직인다. 문장 하나를 거대한 결론에 바로 붙이면 지나친 해석처럼 보일 수 있지만, 중간에 반복되는 이미지와 사건, 역사적 배경과 다른 문장을 하나씩 놓으면 그 연결은 점점 자연스러운 맥락을 갖게 된다.

『바라모』는 바로 이 과정을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맨 앞에서 “지금부터 내가 이 사건들을 연결하겠다”고 선언해놓고 시작한다. 그래서 읽는 동안 “이 장면은 도대체 왜 이렇게 길지?”, “이 사람은 왜 갑자기 등장하지?”, “왜 이런 사소한 행동까지 설명하지?” 싶은 부분을 너무 빨리 버리지 않는 편이 좋다. 하나의 사건은 뒤의 사건을 정당화하는 이유가 되고, 그 다음 사건은 또 다른 연결고리를 만들어낸다. 연결이 끊기지 않는다는 것과 그 연결이 반드시 하나의 진실을 증명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바라모』가 만든 원인과 결과의 사슬을 따라가되, 그 사슬 자체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있는지도 함께 보는 것이 중요하다.


┃ 국기 하강식은 왜 몇 페이지 동안 끝나지 않을까

바라모가 광장으로 나왔을 때 국기 하강식이 시작되고 나팔 소리가 들린다. 현실의 시간으로 생각하면 오래 걸릴 사건이 아니다. 그런데 『바라모』는 곧 나팔을 서술에서 지워버리고, 거리의 사람과 자동차, 소리와 빛, 바라모의 생각과 걱정으로 넘어간다. 독자 역시 앞에서 시작된 국기 하강식을 자연스럽게 잊게 된다. 그러다 약 12페이지 뒤, 갑자기 국기 하강식이 시작될 때 울리던 나팔 소리가 멈췄다는 문장이 나온다. 그 순간 독자는 그 많은 사건과 생각이 사실 몇 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안에 들어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다.

이 장치는 『바라모』의 비평 구조를 시간으로 보여준다. 국기 하강식은 현실에서는 몇 분이면 끝날 평범한 사건이지만, 아이라는 그 시작과 끝 사이에 바라모가 보고 듣고 생각한 것들을 계속 끼워 넣어 12페이지가량으로 부풀린다. 그리고 그 시간이 거의 다 지나간 뒤에야 ‘시간의 거품’이라는 말을 꺼낸다. 즉 시간의 거품을 비유로 설명하기 전에, 독자가 먼저 그 거품 속을 직접 통과하게 만든 것이다. 짧은 시간은 그대로인데 그 안에 들어가는 사건과 의미의 양만 과도하게 늘어난다.

이것은 아이라가 『바라모』 전체에서 하고 있는 일과 같다. 바라모가 위조지폐를 받은 순간과 「아기 예수의 노래」를 완성하는 순간은 이미 정해져 있다. 아이라는 그 두 점 사이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을 복원하고, 각각에 원인과 결과를 붙여 걸작의 탄생 과정으로 만든다. 실제로는 하룻밤에 불과한 시간이 비평을 거치면서 한 작품의 기원과 창작 과정, 작가의 감각과 사유를 모두 설명할 만큼 거대해진다. 국기 하강식의 몇 분을 12페이지로 부풀리는 장면은 이 소설이 걸작의 기원을 복원하는 방식 자체를 작은 규모로 미리 보여주는 셈이다.

그래서 ‘시간의 거품’에서 중요한 것은 바라모가 시간을 이상하게 체감했다는 사실이 아니다. 시작과 끝 사이에 얼마나 많은 것을 집어넣느냐에 따라 평범한 몇 분도 거대한 의미를 가진 시간으로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아이라는 비평이 한 작가의 사소한 하루를 얼마나 크게 확장할 수 있는지를 말로 설명하는 대신, 실제 서술의 길이를 늘려 독자에게 먼저 보여준다. 몇 분짜리 국기 하강식이 12페이지가 될 수 있다면, 평범한 공무원의 하룻밤 역시 문학사의 걸작이 탄생한 결정적 시간으로 얼마든지 부풀어 오를 수 있다.


┃ “세상은 콜론이었다. 콜론은 광장이었다”는 단순히 지명 이름일 뿐일까

바라모가 생각에서 빠져나와 주변을 바라보는 순간, 아이라 특유의 장난기가 밴 문장이 등장한다. “세상은 콜론이었다. 콜론은 광장이었다.” 여기에서 콜론은 우선 작품의 배경인 파나마의 도시 콜론(Colón)이다. 그대로 읽으면 공간의 크기가 빠르게 줄어든다. 세계 전체가 콜론이라는 도시가 되고, 다시 그 도시는 바라모가 서 있는 광장 하나가 된다. 그런데 아이라는 이미 앞에서 그 광장 안에 퇴근하는 공무원과 연인, 학생과 노인, 아이와 자동차, 경적과 수많은 목소리, 국기 하강식의 나팔까지 집어넣었다. 콜론의 광장은 작은 공간이지만 그 안에는 이미 하나의 세계가 펼쳐져 있다.

여기에서 ‘콜론’을 문장부호 colon(:)과 겹쳐 읽어보면 문장이 한 겹 더 열린다. 영어의 colon은 앞에 나온 말을 받아 뒤에서 구체적인 설명이나 항목을 펼쳐놓으면서, 동시에 뒤에 나오는 것들을 앞의 말에 묶는 기호이다. 마침표처럼 문장을 끝내지도 않고 쉼표처럼 느슨하게 이어놓지도 않는다. 하나를 열어 여러 것을 보여주고, 그렇게 펼쳐진 여러 것을 다시 하나의 관계 안에 묶는다. 그렇다면 “세상은 콜론이었다”라는 문장은 잠시 세상은 :이었다라고도 읽힌다. 세계라는 거대한 추상어 뒤에 무엇인가 더 나와야 할 것처럼 열리고, 다음 문장의 “콜론은 광장이었다”가 그 내용을 구체적인 장소로 끌어내린다.

이 읽기가 흥미로운 것은 바로 뒤의 문장들과도 움직임이 겹치기 때문이다. 빛은 바라모의 걱정을 누그러뜨리면서 동시에 세계를 단단히 응축하고, 그 작용을 통해 식물과 사람, 동물과 구름, 땅 같은 다양한 형체가 드러난다. 서로 다른 것들이 펼쳐지지만 동시에 하나의 세계 안에 묶인다. 앞의 광장 역시 수많은 사람과 소리와 움직임이 나열되면서 하나의 공간을 만든다. 세계→콜론→광장이라는 공간적 압축과, 하나를 열어 여러 형체를 펼친 뒤 다시 관계 속에 묶는 콜론(:)의 기능을 함께 놓으면 이 짧은 등식은 훨씬 복합적이고 풍부해진다. 이것을 하나의 정답으로 확정할 필요는 없지만, 『바라모』에서 한 단어가 얼마나 많은 관계를 열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문장이다.


┃ 없는 빚을 갚아주면 왜 정말 빚이 생길까

광장에서 바라모는 콜론 사람들이 모두 아는 노인과 마주친다. 노인은 아무에게나 다가가 과거에 자기에게 돈을 빌려갔으니 갚으라고 요구하지만 실제로 돈을 빌려준 적은 없다. 사람들도 그의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귀찮음을 피하려고 동전 하나를 건네며 “빚의 일부를 갚는 것”이라고 말하는 순간 상황이 달라진다. 처음에는 아무 근거도 없던 “빚이 있다”는 주장이 실제 지불이라는 사건을 하나 얻게 되고, 이후에는 그 지불이 오히려 과거에 빚이 있었다는 증거처럼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구조를 『바라모』의 걸작과 비평에 겹쳐보면 장면의 성격이 달라진다. 「아기 예수의 노래」 역시 독자가 작품을 확인하기도 전에 이미 아방가르드의 기원이자 정점이라는 판정을 받아놓고 있다. “이 작품은 걸작이다”라는 전제가 먼저 놓이고, 그 뒤 비평가와 문학사가들이 작품의 의미와 기원, 형식과 맥락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이 설명들은 처음에는 이미 주어진 걸작이라는 판정을 해명하기 위해 만들어지지만, 하나씩 축적될수록 오히려 그 작품이 정말 걸작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근거처럼 작동한다. 노인의 빚도 마찬가지이다. 빚이 있어서 지불이 생긴 것이 아니라, 한 번 생긴 지불이 다시 빚의 존재를 증명한다.

그래서 이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거짓말이 사실처럼 굳어진다는 점이 아니다. 먼저 세워진 전제가 이후의 행동을 끌어내고, 그 행동이 다시 최초의 전제를 강화하는 순환이다. 걸작이라는 판정이 비평을 낳고, 그렇게 쌓인 비평은 다시 걸작이라는 판정을 더 단단하게 만든다. 『바라모』는 이 우스운 가짜 채무를 통해 작품의 가치가 어떻게 설명되고, 반복해서 확인되고, 결국 하나의 확고한 문학적 사실처럼 유지될 수 있는지를 아주 작은 규모로 먼저 보여준다.


┃ 돈을 줬는데 왜 ‘왼손으로 줬다’는 것이 문제가 될까

바라모가 노인에게 실제로 동전을 건네주자 문제는 해결되는 대신 하나 더 생긴다. 노인은 바라모가 왼손으로 돈을 줬다는 이유로 화를 낸다. 돈을 요구했고 돈을 받았으니 지불 자체는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제 중요한 것은 돈을 줬느냐가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줬느냐이다. 작품은 콜론에 남아 있는 가톨릭적 관습을 끌어와 왼손으로 물건을 건네는 것이 모욕적인 행동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를 설명한다. 같은 동전이라도 어느 손으로 전달했느냐에 따라 정당한 지불이 되기도 하고 모욕이 되기도 한다.

앞의 가짜 빚을 걸작과 비평의 관계로 읽었다면, 이 장면은 그 비평에 요구되는 형식까지 한 단계 더 밀어붙인다. 이미 걸작이라는 전제가 세워진 뒤에는 비평을 바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 걸작의 지위에 걸맞은 방식으로 말해야 하고, 기존의 문학사와 비평이 인정해온 형식 안에서 작품을 설명해야 한다. 작품을 해석하면서도 “정말 걸작인가”, “이 의미는 작품 안에 실제로 있는가”, “비평이 먼저 걸작이라는 전제를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묻는 순간, 비평은 내용상 작품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형식적으로는 ‘왼손으로 돈을 건넨’ 것이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걸작에 대한 비평에는 내용뿐 아니라 그 작품을 대하는 허용된 태도와 형식까지 따라붙는다.

그런데 아이라는 이 장면의 원인을 바로 뒤에서 허무하게 풀어버린다. 바라모가 왼손을 쓴 이유는 종교적 관습에 도전하려 했기 때문도, 노인을 모욕하려 했기 때문도 아니다. 오른손에 빨간 젤리를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발생 원인은 사소한데, 결과만 놓고 보면 왼손이라는 형식에 거대한 사회적·종교적 의미가 붙는다. 이 장면은 비평의 형식이 어떻게 의미를 만들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렇게 만들어진 의미가 실제 발생 원인과는 전혀 다를 수도 있음을 함께 드러낸다. 따라서 『바라모』에서 ‘올바른 형식’은 단순한 예절의 문제가 아니라, 걸작을 둘러싼 비평이 어떤 규칙 안에서 허용되고 정당화되는가를 보여주는 장치로 읽을 수 있다.


┃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는 왜 작품의 탄생 장면 한가운데 나타날까

광장을 지나던 바라모의 시선 앞에는 아직 세워지지도 않은 기념비가 들어설 자리가 있고, 그 옆으로 대성당의 열린 문이 보인다. 기념비는 없지만 그 자리는 이미 ‘기념비가 있어야 할 자리’로 정해져 있다. 실체보다 지위가 먼저 마련된 셈이다. 이것은 「아기 예수의 노래」가 독자에게 제시되기도 전에 이미 아방가르드의 기원이자 정점이라는 자리를 부여받은 첫머리와 겹쳐 읽힌다. 작품은 아직 보이지 않는데 작품이 차지할 문학사적 자리는 먼저 존재한다. 없는 기념비를 자리만으로 상상하게 하듯, 걸작이라는 지위 역시 작품의 실체보다 먼저 독자의 시선을 조직할 수 있다.

그다음 성당 안의 배치는 더 노골적이다. 붉은 촛불 속에서 환하게 드러나는 것은 성모 마리아이고, 그리스도는 그녀의 뒤쪽 어둠 속에 놓여 있다. 「아기 예수의 노래」라는 제목을 함께 놓으면 성모는 창작자, 그리스도는 작품으로 겹쳐 읽힌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작가가 작품을 낳는다는 대응이 아니다. 서술은 성모가 그리스도를 낳았다고 말하기보다, 그리스도를 “그녀에게 육체적 고통을 주지 않고 quasi per tubum, 마치 관을 통과하듯 태어난 신”이라고 설명한다. 문장의 중심이 성모에서 그리스도로 옮겨가면서, 창작자가 작품을 만들어내는 관계보다 작품이 창작자를 통과해 스스로 태어나는 모양이 만들어진다.

이 구조는 바라모의 창작 과정과 곧바로 겹친다. 바라모에게는 시적 수련도 없고, 이전 작품도 없고, 창작 계획도 없으며, 수정도 없다. 그런데 걸작은 탄생한다. 이런 탄생을 기존의 창작 과정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작품은 거의 기적처럼 창작자를 통과해 나타난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작가는 작품을 만드는 주체이기보다 걸작이 세상에 나오는 통로가 되고, 설명 불가능한 창작 과정은 오히려 기적적인 탄생으로 바뀐다.

그런데 바로 다음 문장에서 이 관계는 다시 뒤집힌다. 사람들은 작품에 해당하는 그리스도보다 성모에게 다가가 위안과 자극과 영감, 심지어 “뭐든” 구한다. 걸작이 작가를 통과해 기적처럼 탄생한 것으로 설명되었는데, 정작 후대가 숭배하고 영감을 얻으려는 대상은 다시 작가 쪽이다. 작품의 탄생에서 창작자는 통로로 밀려났다가, 작품이 걸작의 지위를 얻은 뒤에는 다시 신성한 존재로 복귀한다. 작품보다 걸작을 낳은 작가의 이미지가 더 앞에서 빛나는 구조가 되는 셈이다.

여기에서 “위안을, 자극을, 영감을, 뭐든”이라는 말이 풍자를 더 세게 만든다. 사람들이 성모에게 정확히 무엇을 얻으려 하는지는 점점 중요하지 않아진다. 위안이든 자극이든 영감이든 상관없고, 마지막에는 아예 “뭐든”으로 무너진다. 이미 위대한 존재라고 인정된 대상에게 가서 무엇인가를 받아야 한다는 관계만 남는다. 위대한 작가와 걸작을 대하는 후대의 태도도 비슷하다. 실제 작품에서 무엇을 얻는가보다, 위대한 작가에게서 반드시 무언가를 얻어야 한다는 기대가 먼저 작동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은 앞에서 쌓인 신성함을 한꺼번에 무너뜨린다.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존재의 도움 없이는 삶이 불가능하다고 믿지만, 서술자는 그런 존재가 이미지와 환상, 미신 바깥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기념비는 자리는 있지만 실물이 없고, 성모와 그리스도는 형상으로는 보이지만 그 형상 바깥의 초자연적 실재는 부정된다. 걸작과 작가의 관계로 옮기면 풍자는 더 선명해진다. 비평과 문학사가 만들어낸 ‘천재 작가’와 ‘위대한 작품’의 이미지는 실제로 사람들의 읽기와 평가를 움직이지만, 그 이미지가 강하게 작동한다는 사실이 작품의 실제 가치까지 자동으로 보증하지는 않는다. 앞의 위조지폐가 액면가와 진위를 분리했다면, 이 장면은 이미지와 실재를 다시 분리한다.

그래서 이 장면은 성모=작가, 예수=작품이라는 단순한 대응으로 끝나지 않는다. 작품은 작가를 통과해 기적처럼 태어나고, 태어난 뒤에는 다시 작가의 신화를 만들어낸다. 사람들은 작품보다 작가에게서 의미와 영감을 구하고, 그 작가의 이미지는 다시 작품의 위대함을 보증하는 것처럼 기능한다. 아이라는 이 순환을 성스러운 모자 관계 안에 넣어놓고, 마지막에 그 신성함 자체가 이미지와 환상과 믿음 위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 나가며

『바라모』의 첫 25페이지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만 적으면 그다지 복잡하지 않다. 한 말단 공무원이 월급을 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위조지폐 때문에 고민하고, 광장을 지나며 이런저런 사람과 사건을 만난다. 아직 「아기 예수의 노래」는 쓰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아이라는 이 짧은 귀갓길 안에 훗날 하나의 작품이 ‘걸작’으로 만들어지고 설명되는 데 필요한 장치들을 거의 모두 배치해놓는다. 우연한 사건에는 원인과 결과가 붙고, 몇 분짜리 시간은 거대한 의미를 담을 만큼 확장되며, 존재하지 않는 빚은 반복되는 지불을 통해 실제 채무처럼 굳어진다. 걸작을 설명하는 비평에는 올바른 형식까지 요구되고, 작품이 태어나기도 전에 그것이 차지할 문학사적 자리가 먼저 마련된다. 바라모의 하루는 아직 창작의 시간이 아니라, 훗날 걸작의 탄생사로 읽힐 수 있도록 하나씩 재료가 쌓이는 시간에 가깝다.

그래서 『바라모』는 단순히 한 평범한 사람이 우연히 위대한 시를 쓰게 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 소설에서 더 중요한 것은 이미 ‘걸작’이라는 결론이 주어진 뒤 비평과 문학사가 어떤 일을 하는가이다. 서로 아무 관계도 없어 보이는 사건을 연결하고, 우연에 필연성을 부여하며, 형식에 의미를 읽어내고, 작가의 사소한 행동을 창작의 징후로 바꾸고,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마저 위대함의 증거로 만들어낸다. 그렇게 하나의 작품 주위에 원인과 맥락과 작가의 신화가 쌓이면서, 처음에 주어졌던 걸작이라는 판정은 점점 더 확고한 사실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아이라는 바로 그 과정에서 비평이 작품을 설명하는 기능과 이미 내려진 평가를 끊임없이 정당화하고 유지하는 기능 사이의 경계를 건드린다.

그러므로 이후 『바라모』를 읽을 때는 “이 사건은 무엇을 상징하는가”만 찾기보다, 왜 하필 이 사건이 걸작의 탄생을 설명하는 재료로 선택되었는지를 함께 봐야 한다. 어떤 우연이 뒤늦게 원인이 되는지, 어떤 사소한 형식이 창작의 의미로 확대되는지, 실제 발생 과정과 비평이 만들어낸 설명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생기는지, 그리고 작품의 가치가 작품 자체에서 확인되는 것인지 그 주위에 축적된 평가와 해석을 통해 점점 더 단단해지는 것인지 살펴보는 것이다. 앞에서 본 가짜 빚처럼 먼저 세워진 전제가 이후의 행위를 끌어내고, 그 행위가 다시 최초의 전제를 증명하는 구조가 문학에서도 반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읽기 시작하면 『바라모』의 장난은 꽤 잔인해진다. 독자는 처음부터 「아기 예수의 노래」가 아방가르드의 기원이자 정점이라는 말을 믿고 출발한다. 그리고 작품이 그 명성을 받을 만한 이유를 찾기 위해 바라모의 행동과 사물, 우연한 사건 하나하나에서 의미를 발견하기 시작한다. 바로 그것이 『바라모』가 풍자하는 비평의 작동 방식이기도 하다. 『바라모』는 걸작이 어떻게 탄생했는가를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우리가 알고 있는 ‘걸작’이라는 것이 어떻게 설명되고, 정당화되고, 세대를 거쳐 유지되는지를 풍자한다. 이후의 독해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결국 하나다. 우리가 지금 발견하고 있는 의미가 걸작을 설명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이미 걸작이라고 들었기 때문에 끊임없이 그 의미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인지.


┃ 함께 읽기

북디코드 | Book Decode에서 더 알아보기

지금 구독하여 계속 읽고 전체 아카이브에 액세스하세요.

계속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