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킬레우스의 분노는 어떻게 전쟁이 되는가

┃ 들어가며

분노한 아킬레우스가 투구와 방패 곁에 서 있는 일리아스 1권 해석 일러스트

『일리아스(The Iliad)』는 트로이 전쟁(Trojan War)을 다룬 가장 오래된 서사시 가운데 하나지만, 막상 책을 펼치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트로이 전쟁 이야기와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시작한다. 전쟁의 발단인 파리스(Paris)의 심판이나 헬레네(Helen)의 납치부터 차례대로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 이미 10년 가까이 이어진 시점에서 아킬레우스(Achilles)와 아가멤논(Agamemnon)의 갈등을 먼저 보여 준다.

등장인물도 많고 신과 인간의 관계도 복잡하다. 인물마다 여러 수식어가 반복되고, 이미 다른 신화에서 이어진 사건들이 별다른 설명 없이 등장하기도 한다. 줄거리만 따라가면 지나치기 쉬운 문장이나 장면도 적지 않다. 그래서 『일리아스』는 전체 이야기를 한 번에 요약하기보다 각 권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차례로 따라가며 읽어보려고 한다.

각 권에서는 먼저 줄거리를 정리하고, 그 안에서 새롭게 등장하거나 관계를 알아둘 필요가 있는 인물들을 살펴본다. 이어서 작품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구절과 장면을 따로 들여다보고, 반복되는 표현이나 인물들의 대화 방식처럼 읽다가 눈에 걸리는 부분도 함께 확인한다. 이후 다른 신화나 후대의 문학으로 이어지는 지점이 있다면 그 연결도 살펴볼 예정이다.

트로이 전쟁이 10년째에 접어든 마지막 해, 전쟁이 막바지로 향하는 시점에서 시작된다. 그리스군 진영에 역병이 퍼지고, 그 원인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가 충돌한다. 처음에는 포로로 잡아온 여인을 돌려보낼 것인가의 문제였지만, 두 사람의 대화는 보상과 명예, 권력의 문제로 옮겨가며 점점 더 큰 갈등으로 번진다.

그리고 이 갈등은 두 사람 사이에서 끝나지 않는다.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테티스(Thetis)를 거쳐 제우스(Zeus)에게 닿고, 결국 그리스군 전체의 운명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한 영웅의 분노가 어떻게 수많은 사람의 죽음과 전쟁의 방향으로 이어지는지, 『일리아스』 1권에서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어떻게 전쟁이 되는가를 살펴보자.


┃ 줄거리

『일리아스(The Iliad)』 1권은 트로이 전쟁(Trojan War)이 막바지에 접어든 시점, 아카이오이(Achaeans) 진영에 역병이 퍼지면서 시작된다. 아폴론(Apollo)의 사제 크리세스(Chryses)는 아가멤논(Agamemnon)에게 붙잡혀 있는 딸 크리세이스(Chryseis)를 돌려달라며 몸값을 들고 찾아오지만, 아가멤논은 그의 요청을 모욕적으로 거절한다. 크리세스는 아폴론에게 복수를 청하고, 이에 아폴론은 아카이오이 진영에 역병을 내려 병사들을 죽게 한다.

역병이 계속되자 아킬레우스(Achilles)는 회의를 열고 그 원인을 알아보자고 제안한다. 예언자 칼카스(Calchas)는 아가멤논이 크리세스를 모욕하고 그의 딸을 돌려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아폴론이 분노했다고 밝힌다. 역병을 멈추기 위해서는 크리세이스를 아무런 대가 없이 아버지에게 돌려보내고 아폴론에게 제물을 바쳐야 한다.

아가멤논은 크리세이스를 돌려보내는 데 동의하지만 자신의 전리품만 잃게 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새로운 보상을 요구한다. 아킬레우스는 이미 전리품의 분배가 끝났으니 지금 당장 다시 나눌 수 없고, 트로이(Troy)를 함락한 뒤 충분히 보상하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가멤논은 아킬레우스나 아이아스(Ajax), 오디세우스(Odysseus)가 받은 전리품 가운데 하나를 자신이 가져갈 수도 있다고 맞선다.

두 사람의 대화는 곧 단순한 전리품의 문제를 넘어 명예와 권력을 둘러싼 충돌로 바뀐다. 아킬레우스는 자신에게 트로이인들(Trojans)과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니며,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Menelaus)의 명예를 위해 먼 곳까지 와서 싸우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자신의 몫을 빼앗겠다면 더 이상 전쟁에 힘을 보탤 이유가 없다며 고향 프티아(Phthia)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한다. 아가멤논은 이를 만류하기는커녕 가고 싶다면 도망가라고 응수하며, 오히려 아킬레우스의 전리품인 브리세이스(Briseis)를 직접 가져가겠다고 말한다.

분노한 아킬레우스는 칼을 뽑아 아가멤논을 죽일 것인지 고민하지만, 헤라(Hera)가 보낸 아테나(Athena)가 나타나 그를 제지한다. 아킬레우스는 칼을 거두는 대신 아가멤논에게 거친 말을 퍼붓고, 언젠가 아카이오이인들이 자신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원로 네스토르(Nestor)가 두 사람을 중재하려 하지만 갈등은 풀리지 않는다.

아가멤논은 결국 크리세이스를 아버지에게 돌려보내고 아폴론에게 제물을 바치게 한다. 동시에 부하들을 보내 아킬레우스의 막사에서 브리세이스를 데려오게 한다. 아킬레우스는 명령을 수행하러 온 전령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 브리세이스를 내어주지만, 자신의 명예가 짓밟혔다고 느끼며 바닷가에 홀로 앉아 어머니 테티스(Thetis)를 부른다.

테티스가 나타나자 아킬레우스는 자신이 짧은 생을 살 운명임에도 마땅한 명예를 얻지 못하고 오히려 아가멤논에게 모욕당했다고 호소한다. 그리고 제우스(Zeus)에게 부탁해 당분간 트로이군이 우세하도록 만들어 달라고 청한다. 아카이오이인들이 패배를 겪어야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테티스는 아들의 부탁을 받아들여 올림포스(Olympus)로 올라가 제우스를 찾아간다. 제우스는 자신이 트로이군을 돕는 것을 헤라가 못마땅해할 것이라며 망설이지만 결국 테티스의 청을 들어주기로 한다. 이를 알아챈 헤라(Hera)는 제우스와 언쟁을 벌이고, 헤파이스토스(Hephaestus)가 나서 분위기를 풀면서 신들의 연회가 이어진다.

아가멤논에게 칼을 뽑으려는 아킬레우스를 뒤에서 제지하는 아테나를 그린 일리아스 1권 삽화
아가멤논의 천막에서 아테나에게 제지당하는 아킬레우스
(Achilles Restrained by Athena in Agamemnon’s Tent, from Iliad, Book I),
요한 토비아스 세르겔(Johan Tobias Sergel), 1765–1766
출처 :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CC0 Public Domain

┃ 인물 계보

아킬레우스 : 제우스에서 이어지는 아이아코스 가문

켄타우로스 케이론의 등에 올라 교육을 받는 어린 아킬레우스를 그린 루벤스의 작품
케이론에게 교육받는 아킬레우스 (Achilles Instructed by Chiron)
페테르 파울 루벤스 (Peter Paul Rubens), 1630–1635년경
출처: Wikimedia Commons

아킬레우스의 계보는 제우스(Zeus)에서 시작된다. 제우스는 강의 신 아소포스(Asopus)의 딸인 아이기나(Aegina)와의 사이에서 아이아코스(Aeacus)를 낳았다. 아이아코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특히 경건하고 정의로운 왕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신들에게도 신임을 받았다고 전해지며, 이러한 성격은 사후의 이야기로도 이어진다. 그는 죽은 뒤 크레타의 왕 미노스(Minos), 그의 형제 라다만튀스(Rhadamanthys)와 함께 저승에서 죽은 자들을 심판하는 재판관 가운데 하나가 된다.

아이아코스는 케이론(Chiron)의 딸로 전해지는 엔데이스(Endeis)와의 사이에서 펠레우스(Peleus)와 텔라몬(Telamon)을 두었다. 그런데 아이아코스에게는 바다의 님프 프사마테(Psamathe)에게서 태어난 또 다른 아들 포코스(Phocus)가 있었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포코스를 질투한 펠레우스와 텔라몬은 그를 죽였고, 아이아코스는 두 아들을 아이기나에서 추방한다. 전승에 따라 살해 과정에는 차이가 있지만, 텔라몬이 원반을 던져 포코스를 죽이고 펠레우스가 함께 시신을 숨겼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다.

그중 펠레우스는 바다의 여신 테티스(Thetis)와 결혼한다. 테티스의 결혼에는 중요한 예언이 얽혀 있다. 제우스와 포세이돈(Poseidon)도 한때 테티스를 원했지만, 테티스가 낳을 아들은 아버지보다 강해질 것이라는 예언 때문에 결국 그녀를 인간인 펠레우스와 결혼시킨다. 이 예언을 알고 있던 인물로 프로메테우스(Prometheus)가 등장하는 전승도 있다. 다만 프로메테우스가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형벌을 받은 직접적인 이유가 테티스의 비밀 때문인 것은 아니다. 그의 형벌은 인간에게 불을 주고 제우스의 뜻에 맞섰기 때문이며, 테티스에 관한 예언은 제우스와 프로메테우스 사이에서 그가 쥐고 있던 중요한 비밀 가운데 하나다.

펠레우스와 테티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아킬레우스(Achilles)다. 후대 전승에서는 테티스가 아들을 불사신으로 만들기 위해 어린 아킬레우스를 저승의 강 스틱스(Styx)에 담갔다고 전한다. 이때 발뒤꿈치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 부분만 물에 닿지 않았고, 훗날 ‘아킬레스건’으로 알려지는 유일한 약점이 되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는 나오지 않는 후대의 전승이다.

아킬레우스에게는 또 하나의 운명이 예고되어 있었다. 트로이 전쟁에 참가하면 짧은 생을 살지만 영원한 명성을 얻고, 전쟁에 나가지 않으면 오래 살지만 이름은 잊힌다는 운명이다. 테티스는 아들을 전쟁에서 떼어놓기 위해 그를 스키로스섬(Skyros)의 리코메데스(Lycomedes) 왕궁에 숨겼고, 아킬레우스는 왕의 딸들 사이에서 여자 옷을 입고 생활한다. 그러나 오디세우스(Odysseus)가 상인으로 변장해 왕궁을 찾아가 보석과 장신구 사이에 무기를 섞어 놓자, 아킬레우스는 본능적으로 무기에 손을 뻗어 정체가 드러난다. 이후 그는 트로이 원정에 참가하게 된다.

아이아코스의 또 다른 아들 텔라몬은 살라미스(Salamis)의 왕이 되었고, 알카토오스(Alcathous)의 딸 페리보이아(Periboea)와의 사이에서 『일리아스』에 자주 등장하는 대아이아스(Ajax the Great)를 낳았다. 따라서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와 텔라몬의 아들 대아이아스는 같은 아이아코스를 할아버지로 둔 사촌 관계다. 텔라몬은 이후 헤라클레스(Heracles)와 함께 트로이를 공격했을 때 헤시오네(Hesione)를 얻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테우크로스(Teucer)를 낳는데, 이 계보는 『일리아스』 2권의 함선 목록에서 다시 이어진다.

아가멤논 : 탄탈로스에서 이어지는 아트레우스 가문의 왕

아가멤논(Agamemnon)은 미케네의 왕이자 트로이 전쟁에 참가한 아카이오이 연합군의 총사령관이다. 『일리아스』 1권에서는 아킬레우스와 충돌하는 인물로 처음 등장하지만, 그의 배경을 이해하려면 몇 세대 전 탄탈로스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아가멤논의 가계는 흔히 제우스 × 플루토 → 탄탈로스 → 펠롭스 → 아트레우스 → 아가멤논·메넬라오스로 이어진다. 탄탈로스의 부모에 대해서는 여러 전승이 있지만, 제우스를 아버지로 보는 계보가 널리 알려져 있다. 탄탈로스(Tantalus)는 신들과 가까운 관계를 누리던 왕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그는 신들을 시험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 펠롭스를 죽여 음식으로 내놓았고, 이를 알아챈 신들의 분노를 산다. 신들은 펠롭스를 다시 살려내지만, 탄탈로스는 저승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된다. 물과 과일이 바로 눈앞에 있으면서도 결코 먹거나 마실 수 없는 그의 형벌은 오늘날 영어 tantalize, 즉 눈앞에 원하는 것을 보여주면서 얻지 못하게 해 ‘애타게 하다’, ‘감질나게 하다’라는 뜻의 단어로 이어졌다.

되살아난 펠롭스(Pelops)는 이후 엘리스 지방 피사의 공주 히포다메이아(Hippodameia)와 결혼하기 위해 그녀의 아버지 오이노마오스(Oenomaus)와 전차 경주를 벌인다. 오이노마오스는 피사의 왕으로, 흔히 전쟁의 신 아레스의 아들로 전해진다. 그는 딸에게 구혼하는 남자들에게 자신과 전차 경주를 벌이게 하고, 패배한 구혼자들을 죽이고 있었다. 펠롭스는 오이노마오스의 전차를 몰던 미르틸로스(Myrtilus)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인다. 미르틸로스는 헤르메스의 아들로 전해지며, 전승에 따라 전차의 축이나 고정 장치를 손대 오이노마오스가 경주 도중 죽게 만든다. 그러나 승리한 펠롭스는 이후 미르틸로스를 바다에 던져 죽인다. 죽어가던 미르틸로스가 펠롭스와 그의 후손을 저주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탄탈로스에서 시작된 가문의 비극은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펠롭스에게서는 여러 자식이 태어나는데 그 가운데 중요한 인물이 아트레우스(Atreus)와 티에스테스(Thyestes)다. 두 형제는 미케네의 왕위를 두고 끊임없이 다투었고, 이 갈등은 아트레우스 가문의 가장 끔찍한 사건으로 이어진다. 티에스테스는 아트레우스의 아내 아에로페(Aerope)와 관계를 맺고 왕권의 상징이던 황금양을 손에 넣어 왕위를 차지하려 한다. 이후 왕권을 되찾은 아트레우스는 복수로 티에스테스의 아들들을 죽여 요리한 뒤 그 고기를 아버지인 티에스테스에게 먹인다. 식사가 끝난 뒤에야 아트레우스는 아이들의 남은 시신 일부를 보여주며 자신이 무엇을 먹였는지 밝힌다. 이 사건은 이후 아트레우스 가문에 반복되는 살인과 복수의 상징적인 사건이 된다.

두 형제 사이의 복수는 다음 세대까지 이어진다. 티에스테스에게서는 훗날 아이기스토스(Aegisthus)가 태어난다. 아이기스토스는 아트레우스를 죽이고 아버지 티에스테스의 복수에 가담하며, 훗날에는 다시 아트레우스의 아들 아가멤논의 죽음에도 관여한다. 따라서 아트레우스와 티에스테스 사이에서 시작된 형제의 복수는 그들의 아들 세대에서도 반복된다. 아트레우스의 두 아들이 바로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Menelaus)이다. 두 사람은 흔히 아트레이다이(Atreidai), 즉 ‘아트레우스의 아들들’이라고 불린다. 메넬라오스는 스파르타의 왕이 되어 헬레네(Helen)와 결혼하고,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Paris)가 헬레네를 트로이로 데려가면서 트로이 전쟁의 직접적인 계기가 만들어진다. 형 아가멤논은 여러 그리스 왕과 영웅들을 이끄는 연합군의 총사령관으로 전쟁에 참가한다.

아가멤논은 클리타임네스트라(Clytemnestra)와 결혼해 이피게네이아(Iphigenia), 엘렉트라(Electra), 오레스테스(Orestes) 등의 자식을 둔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스파르타의 왕 틴다레오스와 레다의 딸이며 헬레네의 자매이다. 따라서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 형제는 각각 클리타임네스트라와 헬레네 자매와 결혼한 셈이다. 그러나 트로이로 출항하기 전 그리스 함대가 아울리스(Aulis)에서 발이 묶이면서 또 하나의 비극이 시작된다. 전승에 따라 세부 내용은 다르지만, 아르테미스의 분노를 풀기 위해 아가멤논이 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쳐야 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전해진다. 이 사건은 아가멤논과 클리타임네스트라의 관계를 결정적으로 무너뜨린다.

트로이 전쟁이 끝난 뒤 고향으로 돌아온 아가멤논은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와 아이기스토스에게 살해된다. 아이기스토스의 아버지 티에스테스가 형 아트레우스의 아내 아에로페와 관계를 맺었던 것처럼, 아이기스토스 역시 아트레우스의 아들 아가멤논의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와 관계를 맺는다. 두 세대에서 비슷한 배신의 구조가 반복되는 셈이다. 그리고 오레스테스가 엘렉트라의 도움을 받아 다시 아버지의 죽음에 복수하면서, 탄탈로스에서 시작된 살인과 복수의 연쇄는 또다시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이 이야기는 아이스킬로스(Aeschylus)의 비극 삼부작 『오레스테이아(Oresteia)』에서 본격적으로 다뤄진다.

따라서 『일리아스』 1권의 아가멤논은 단순히 성격이 거칠고 욕심 많은 총사령관으로만 볼 수 없다. 그는 왕위를 둘러싼 배신과 살인, 복수가 반복된 아트레우스 가문의 후계자이며, 자신의 몫과 명예가 왕의 권위와 긴밀하게 연결되는 세계 속에 서 있다. 크리세이스(Chryseis)를 돌려보내는 대신 반드시 다른 전리품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일과, 결국 아킬레우스의 브리세이스를 빼앗은 행동 역시 이러한 영웅 세계의 권력과 명예의 문제 속에서 읽을 필요가 있다.

아가멤논을 공격하려 칼을 든 아킬레우스의 머리카락을 붙잡아 제지하는 미네르바
아가멤논을 죽이려는 아킬레우스를 제지하는 미네르바 (Minerva Restraining Achilles from Killing Agamemnon)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 (Giovanni Battista Tiepolo), 1757
출처: MeisterDrucke / Bridgeman Images

칼카스 : 아폴론의 뜻을 읽는 아카이오이의 예언자

제단 앞에서 이피게네이아의 희생을 준비하는 예언자 칼카스와 이피게네이아를 그린 장면
이피게네이아의 희생 (The Sacrifice of Iphigenia)
아벨 드 퓌졸 (Abel de Pujol), 1822년경
출처: Wikimedia Commons

칼카스(Calchas)는 트로이 전쟁에 참가한 아카이오이인들(Achaeans) 의 예언자로, 『일리아스』에서는 테스토르(Thestor)의 아들로 소개된다. 테스토르 역시 예언자로 전해지는 인물로, 칼카스는 예언자의 가계에 속한 인물로 이해할 수 있다. 호메로스는 그를 새의 움직임을 통해 신의 뜻을 읽는 뛰어난 예언자로 묘사하며, 과거와 현재,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예언 능력은 아폴론(Apollo)에게서 받은 것으로 전해지며, 칼카스는 자신의 예언술을 통해 아카이오이 함대가 트로이까지 항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칼카스는 트로이 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여러 중요한 순간에 등장한다. 그리스군이 아울리스(Aulis)에 모였을 때 제단 근처에서 뱀이 나타나 어미 참새와 새끼 여덟 마리를 삼킨 뒤 돌로 변하는 징조가 나타났는데, 칼카스는 이를 아카이오이군이 아홉 해 동안 전쟁을 치른 뒤 열 번째 해에 트로이를 함락하게 된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일리아스』 2권에서 오디세우스가 이 사건을 다시 언급하기 때문에, 칼카스의 예언은 전쟁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를 알려주는 중요한 징조로 남는다.

후대 전승에서는 아울리스에서 바람이 불지 않아 함대가 출항하지 못했을 때도 칼카스가 등장한다. 그는 아르테미스(Artemis)의 분노를 풀기 위해 아가멤논의 딸 이피게네이아(Iphigenia)를 희생해야 한다고 예언한 인물로 전해진다. 다만 이 이야기는 『일리아스』 1권에서 직접 다뤄지지 않으며, 이후의 서사시와 비극 전승을 통해 더욱 구체적인 형태로 전해졌다.

『일리아스』 1권에서 칼카스는 아카이오이 진영에 퍼진 역병의 원인을 밝히는 역할을 한다. 아킬레우스가 회의를 열어 신의 분노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알아보자고 하자 칼카스가 나서지만, 곧바로 예언을 말하지는 않는다. 자신이 밝힐 진실 때문에 권력을 가진 사람이 분노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아킬레우스가 자신을 보호하겠다고 약속하자, 칼카스는 아가멤논이 아폴론의 사제 크리세스를 모욕하고 그의 딸 크리세이스를 돌려보내지 않은 것이 역병의 원인이라고 밝힌다.

이 장면에서 칼카스는 단순히 미래를 맞히는 예언자가 아니다. 그는 신의 뜻을 인간의 세계에 전달하는 중개자이면서 동시에, 그 진실이 인간 사회의 권력과 충돌할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인물이다. 아폴론이 내린 역병의 원인은 칼카스의 입을 통해 드러나지만, 그 순간부터 문제는 신의 분노를 해결하는 데서 아가멤논의 명예와 권위를 둘러싼 갈등으로 옮겨간다. 따라서 『일리아스』 1권에서 칼카스의 예언은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의 충돌을 시작하게 만드는 첫 번째 계기가 된다.

트로이 전쟁 이후의 전승에서 칼카스의 이야기는 또 다른 예언자 몹소스(Mopsus)와 연결된다. 칼카스는 자신보다 뛰어난 예언자를 만나면 죽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받았으며, 전쟁이 끝난 뒤 몹소스와 예언 능력을 겨룬 끝에 패배하고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세부 내용은 전승마다 다르지만, 트로이 전쟁의 시작과 진행을 예언으로 이끌었던 칼카스가 결국 더 뛰어난 예언자와의 만남으로 자신의 운명을 맞는다는 점에서 그의 생애 역시 예언과 함께 시작되고 끝난다.

크리세스 : 아폴론의 사제이자 크리세이스의 아버지

크리세스(Chryses)는 트로이 인근의 도시 크리세(Chryse)에서 아폴론(Apollo)을 섬기는 사제로, 아가멤논에게 전리품으로 배정된 크리세이스(Chryseis)의 아버지이다. 『일리아스』 1권에서 그는 딸을 되찾기 위해 많은 몸값을 준비해 아카이오이인들(Achaeans)의 진영을 찾아온다. 손에는 아폴론의 성스러운 표지를 들고 있었으며,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를 비롯한 아카이오이인들에게 트로이를 함락하고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기원하면서 딸을 돌려달라고 청한다.

다른 아카이오이인들은 사제를 존중하고 몸값을 받는 것이 좋겠다고 동의하지만, 아가멤논은 크리세스의 요청을 거절한다. 그는 크리세이스를 돌려보낼 생각이 없다고 말하며 노인을 위협해 진영에서 쫓아낸다. 크리세스는 아무 말 없이 물러나 바닷가에서 자신이 섬기는 아폴론에게 기도한다. 아폴론은 그의 기도를 듣고 아카이오이 진영에 화살을 쏘아 역병을 일으킨다. 『일리아스』의 첫 번째 집단적 재앙은 이렇게 한 사제에게 가해진 모욕에서 시작된다.

크리세스가 섬기는 아폴론은 『일리아스』에서 트로이 편에 가까운 신으로 등장하지만, 이 장면에서 그의 행동은 단순히 트로이군을 돕기 위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사제가 모욕당하고 아폴론의 신성한 권위가 침해되었기 때문에 응답한 것에 가깝다. 따라서 아카이오이 진영에 퍼진 역병은 인간끼리의 갈등보다 먼저 인간이 신성한 질서를 침범한 결과로 시작된다.

이후 칼카스(Calchas)가 역병의 원인을 밝히면서 아가멤논은 결국 크리세이스를 아버지에게 돌려보내기로 한다. 오디세우스(Odysseus)가 이끄는 사절단이 크리세이스를 크리세로 데려가자 크리세스는 딸을 돌려받고, 다시 아폴론에게 기도해 아카이오이인들에게 내린 재앙을 거두어 달라고 청한다. 아폴론이 그 기도를 받아들이면서 역병은 끝난다.

『일리아스』 1권에서 크리세스의 등장은 짧지만 역할은 크다. 그의 청원을 아가멤논이 어떻게 대하는가가 아폴론의 분노를 불러오고, 그 역병의 원인을 밝히는 과정에서 다시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의 충돌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크리세스는 이야기의 중심에서 오래 머무는 인물은 아니지만, 『일리아스』 전체를 움직이기 시작하는 최초의 사건을 만들어내는 인물 가운데 하나이다.

아가멤논의 천막 앞에서 딸 크리세이스를 돌려달라고 간청하는 아폴론의 사제 크리세스
아가멤논의 천막 앞에서 크리세이스의 반환을 간청하는 크리세스 (Chryses Vainly Soliciting the Return of Chryseis before the Tent of Agamemnon)
야코포 알레산드로 칼비 (Jacopo Alessandro Calvi), 1815년 이전
출처: Wikimedia Commons

네스토르

필로스의 노왕 네스토르가 찾아온 텔레마코스를 맞이해 포옹하는 장면을 그린 고전 판화
포옹하는 텔레마코스와 네스토르 (Telemachus en Nestor in omhelzing), 야코프 폴케마 (Jacob Folkema), 루이 파브리티위스 뒤부르의 디자인을 바탕으로 (after Louis Fabritius Dubourg), 1732년
출처: Wikimedia Commons

네스토르(Nestor)는 필로스(Pylos)의 왕으로, 『일리아스』에서 아카이오이군의 최고령 원로이자 조언자로 등장한다. 그는 넬레우스(Neleus)와 클로리스(Chloris)의 아들이며, 넬레우스는 포세이돈(Poseidon)과 티로(Tyro) 사이에서 태어난 인물로 전해진다. 따라서 네스토르의 가계는 포세이돈 → 넬레우스 → 네스토르로 이어진다. 넬레우스에게는 많은 아들이 있었지만 헤라클레스(Heracles)가 필로스를 공격했을 때 대부분 죽고, 네스토르만 살아남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폴로도로스는 당시 네스토르가 게레니아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목숨을 건졌다고 전한다.

네스토르가 『일리아스』에서 유난히 나이 많은 인물로 그려지는 데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다. 호메로스는 1권에서 그를 이미 두 세대가 지나가는 것을 지켜본 뒤 세 번째 세대를 다스리는 왕으로 묘사한다. 그래서 네스토르는 아가멤논이나 아킬레우스보다 단순히 나이가 많은 정도가 아니라, 그들이 태어나기 전 세대의 영웅들과 직접 싸우고 함께했던 인물이다. 그는 페이리토오스(Peirithous), 드리아스(Dryas), 카이네우스(Caeneus), 엑사디오스(Exadius), 폴리페모스(Polyphemus), 테세우스(Theseus) 같은 옛 영웅들을 직접 알고 있었다고 말하며, 그들과 함께 켄타우로스들과 싸웠던 과거를 회상한다.

젊은 시절의 네스토르 역시 단순한 조언자가 아니라 전사였다. 『일리아스』 11권에서 그는 엘리스(Elis)와 필로스 사이의 전쟁에 참가했던 자신의 젊은 시절을 길게 회상하며, 직접 적장을 죽이고 많은 가축과 말을 빼앗아 온 전투 경험을 이야기한다. 현재의 『일리아스』에서는 주로 말을 통해 군을 이끄는 노인으로 보이지만, 그의 조언에 무게가 실리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 자신이 이전 세대의 전쟁을 직접 겪은 영웅이기 때문이다.

『일리아스』 1권에서 네스토르는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의 싸움이 극단으로 치닫자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다. 그는 두 사람 모두 아카이오이군에서 중요한 존재이며, 서로의 지위를 인정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특히 자신이 과거에는 지금의 두 사람보다도 강한 영웅들과 함께했지만 그들조차 자신의 조언을 무시하지 않았다고 말하며 두 사람을 설득하려 한다. 그러나 이미 명예와 권력을 둘러싼 갈등이 깊어진 뒤라 그의 중재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네스토르는 트로이 전쟁 이후에도 살아남아 필로스로 돌아간다. 『오디세이아』에서는 오디세우스(Odysseus)의 행방을 찾는 텔레마코스(Telemachus)가 가장 먼저 찾아가는 인물 가운데 하나가 네스토르다. 이는 그가 단순한 노병이 아니라 트로이 전쟁 이전의 영웅 시대와 전쟁 이후의 세대를 이어주는 기억의 보관자처럼 기능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네스토르의 권위는 『일리아스』 2권에서도 다시 드러난다. 제우스는 아킬레우스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아카이오이군을 궁지에 몰아넣으려 하고, 아가멤논에게 거짓된 꿈을 보낸다. 이때 꿈은 여러 영웅 가운데 네스토르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 아가멤논에게 지금이 트로이를 공격할 때라고 말한다. 아가멤논이 그 말을 의심하지 않도록 가장 신뢰받는 조언자의 모습을 빌린 것이다. 따라서 네스토르가 가진 권위는 그가 회의에서 말을 많이 하는 원로라는 데 그치지 않는다. 신이 인간을 속이기 위해 그의 모습을 선택할 정도로, 아가멤논에게 가장 믿을 만한 조언자로 받아들여지는 인물이기도 하다.

오디세우스 : 힘보다 지략으로 전쟁을 움직이는 이타케의 왕

오디세우스(Odysseus)는 이타케(Ithaca)의 왕으로, 라에르테스(Laertes)와 안티클레이아(Anticleia)의 아들이다. 어머니 안티클레이아는 뛰어난 도둑이자 꾀 많은 인물로 이름난 아우톨리코스(Autolycus)의 딸이며, 아우톨리코스는 헤르메스(Hermes)의 아들로 전해진다. 따라서 오디세우스의 지략과 기만의 재능은 외가를 통해 헤르메스와 이어지는 계보 속에서도 읽을 수 있다. 『오디세이아』에서는 어린 오디세우스가 외할아버지 아우톨리코스를 찾아갔다가 멧돼지 사냥 중 허벅지에 상처를 입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훗날 그 흉터는 오랜 방랑 끝에 이타케로 돌아온 그의 정체를 알아보는 중요한 표지가 된다.

오디세우스는 페넬로페(Penelope)와 결혼해 텔레마코스(Telemachus)를 두었다. 후대 전승에서는 트로이 전쟁에 참가하지 않기 위해 미친 사람처럼 행동했다가 팔라메데스(Palamedes)에게 속임수가 발각되어 결국 출정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밭을 갈며 광기를 가장하는 오디세우스 앞에 어린 텔레마코스를 놓자 아들을 피하기 위해 쟁기를 멈추었고, 이 때문에 제정신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이야기는 『일리아스』에서 직접 다루어지는 내용은 아니며 후대 전승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트로이 전쟁에서 오디세우스는 아킬레우스처럼 압도적인 무력을 가진 전사도, 아가멤논처럼 전체 연합군을 지휘하는 왕도 아니다. 대신 그는 말과 판단, 협상과 계략을 통해 전쟁을 움직이는 인물로 등장한다. 『일리아스』 1권에서도 아폴론의 분노를 풀기 위해 크리세이스(Chryseis)를 아버지 크리세스(Chryses)에게 돌려보내는 사절단을 지휘한다. 그는 크리세이스를 인도하고 희생 제의를 준비하며, 아폴론에게 바치는 의식을 마친 뒤 다시 아카이오이 진영으로 돌아온다.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의 갈등이 감정과 명예의 충돌을 보여준다면, 오디세우스는 그 사이에서 실제로 필요한 일을 수행하며 공동체를 움직이는 인물에 가깝다.

이러한 역할은 『일리아스』 전체에서도 계속된다. 오디세우스는 회의에서 뛰어난 연설가로 나서 병사들을 설득하고, 전투에서는 직접 무기를 들고 싸우며, 아킬레우스를 전장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한 사절단에도 참여한다. 전쟁 막바지에는 디오메데스(Diomedes)와 함께 야간 정찰과 기습에 나서는 등 지략과 행동력을 동시에 보여준다. 우리가 흔히 오디세우스를 ‘꾀 많은 영웅’으로 기억하지만, 『일리아스』의 그는 단순한 책략가가 아니라 전사이자 협상가이며, 상황에 따라 여러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인물이다.

트로이 전쟁의 마지막을 상징하는 목마(Trojan Horse) 역시 오디세우스와 깊이 연결된다. 목마를 이용해 트로이 성 안으로 들어간 뒤 도시를 함락한다는 계략은 『일리아스』 본편에서는 다루어지지 않지만, 『오디세이아』를 비롯한 여러 고대 전승에서 오디세우스는 이 작전의 중심 인물로 기억된다. 따라서 『일리아스』에서 이미 드러나는 그의 지략은 전쟁이 끝나는 방식으로까지 이어지는 셈이다.

그러나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는 트로이가 함락된 뒤에도 끝나지 않는다. 고향 이타케로 돌아가는 길에서 그는 키클롭스 폴리페모스(Polyphemus), 아이올로스(Aeolus)의 바람, 키르케(Circe), 세이렌(Sirens), 스킬라(Scylla)와 카리브디스(Charybdis), 칼립소(Calypso) 등 수많은 존재와 사건을 만나며 오랜 방랑을 겪는다. 결국 동료들을 모두 잃은 뒤 홀로 이타케로 돌아가 페넬로페와 자신의 왕국을 되찾게 되는데, 이 귀환의 여정은 『오디세이아』에서 본격적으로 다룰 예정이다.

트로이 전쟁 출정을 피하려 미친 척하며 쟁기질하는 오디세우스와 어린 텔레마코스를 묘사한 태피스트리
미친 척하는 오디세우스 (Odysseus Fakes Insanity)
작자 미상 (Unknown Artist), 17세기 초
출처: Wikimedia Commons

┃ 핵심 구절 해독

『일리아스』는 첫 문장부터 작품을 읽는 방향을 제시한다. 트로이 전쟁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설명하지도 않고, 파리스나 헬레네를 먼저 등장시키지도 않는다. 호메로스가 가장 먼저 노래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아킬레우스의 분노이다. 이어지는 몇 행에서는 그 분노가 수많은 아카이오이인에게 고통을 주고 영웅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고 말하며, 그 모든 과정 속에서 제우스의 뜻이 이루어졌다고 선언한다. 불과 몇 행 안에 분노, 죽음, 신의 뜻이 함께 놓이는 셈이다. 『일리아스』 1권을 읽을 때 먼저 살펴볼 구절도 여기에서 시작한다.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일리아스』의 첫 단어는 아킬레우스의 이름이 아니라 분노이다. 그리스어 원문의 mēnis는 일상적인 짜증이나 순간적인 화보다 훨씬 강한 분노를 가리킨다. 작품은 처음부터 트로이 전쟁 전체가 아니라 한 영웅의 분노를 이야기의 중심에 놓는다. 이 시작은 『일리아스』가 무엇을 이야기하지 않는지를 생각하면 더욱 분명해진다. 트로이 전쟁의 원인이 된 파리스의 심판도, 헬레네가 트로이로 가게 된 과정도 서두에서 설명되지 않는다. 전쟁은 이미 오랫동안 계속되고 있고, 호메로스는 그 한가운데에서 아킬레우스가 분노하게 되는 순간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따라서 『일리아스』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아킬레우스가 화를 냈다는 사실이 아니다. 한 사람의 분노가 어떻게 공동체 전체의 사건으로 확대되는가가 문제이다. 아킬레우스가 전투에서 물러나자 그의 부재는 아카이오이군 전체의 피해로 이어지고, 그 피해는 다시 아킬레우스가 전쟁으로 돌아오는 과정과 연결된다. 첫 문장의 ‘분노’는 1권의 사건 하나를 가리키는 동시에 작품 전체를 움직이는 동력이 된다. 이 때문에 『일리아스』를 단순한 ‘트로이 전쟁 이야기’라고 부르면 작품의 초점이 조금 흐려질 수 있다. 트로이 전쟁은 이미 벌어지고 있는 거대한 배경이고, 호메로스가 그 안에서 선택한 이야기는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시작되고 변화하며 마침내 다른 형태로 끝나는 과정에 가깝다.

“수많은 영웅들의 혼을 하데스로 보내고, 그들의 몸을 개와 새의 먹이가 되게 한”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말한 직후 호메로스는 그 결과를 곧바로 보여준다. 아카이오이인들은 고통을 겪고, 많은 영웅들의 혼은 하데스(Hades)로 내려가며, 남겨진 육체는 개와 새의 먹이가 된다. 여기에서 눈에 띄는 것은 ‘영웅’이라는 이름과 죽은 육체의 모습이 한 문장 안에 함께 놓인다는 점이다. 영웅들은 살아 있을 때 명예와 명성을 두고 경쟁하지만 죽은 뒤의 육체는 더 이상 특별하지 않다. 제대로 장례를 치르지 못하면 다른 인간의 몸과 마찬가지로 짐승에게 훼손될 수 있다. 이 대비는 『일리아스』에서 죽은 자의 시신을 둘러싼 장면들이 반복해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이유와도 연결된다. 전장에서 적을 죽이는 것으로 모든 일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의 몸을 누가 차지하고 어떻게 처리하는지가 다시 명예의 문제가 된다. 영웅에게 죽음은 생명의 끝인 동시에 자신의 이름과 육체가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를 둘러싼 또 다른 싸움이 된다. 따라서 서두에 등장하는 개와 새의 이미지는 단순히 전쟁이 참혹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으로만 보기 어렵다. 『일리아스』가 찬란한 영웅들의 전쟁을 노래하면서 동시에 그 영웅들이 결국 죽어가는 필멸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함께 보여주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제우스의 뜻은 이루어졌다”

앞의 구절보다 더욱 눈에 걸리는 것은 그다음에 이어지는 ‘제우스의 뜻’이라는 표현이다. 지금까지 설명된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킬레우스의 분노이다. 그런데 호메로스는 그 결과를 이야기하면서 돌연 제우스(Zeus)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서로 다른 두 층위의 원인이 동시에 존재한다. 인간의 세계에서는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의 갈등이 사건을 움직인다. 아가멤논이 브리세이스를 빼앗고, 모욕당한 아킬레우스가 전투에서 물러나면서 아카이오이군의 피해가 시작된다. 그러나 신들의 세계에서 보면 그 과정은 제우스의 뜻이 실현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 두 층위가 겹치면서 『일리아스』의 인간들은 단순한 꼭두각시가 되지 않는다. 아가멤논은 자신의 판단으로 행동하고 아킬레우스 역시 자신의 분노에 따라 선택한다. 그 선택의 책임은 여전히 인간에게 있다. 동시에 그들의 행동은 인간이 모두 알 수 없는 더 큰 신적 질서 안에 놓인다. 특히 1권 후반에서 아킬레우스가 어머니 테티스(Thetis)를 통해 제우스에게 아카이오이군을 패배하게 해 달라고 요청하면서 이 표현은 더욱 의미심장해진다. 제우스는 그 요청을 받아들이고, 이후 전쟁의 흐름은 아킬레우스가 없는 아카이오이군에게 불리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다만 서두의 ‘제우스의 뜻’을 곧바로 트로이 전쟁 전체에 대한 하나의 명확한 계획으로 단정할 필요는 없다. 다른 신화 전승에서는 트로이 전쟁을 인간과 영웅의 수를 줄이려는 제우스의 계획과 연결하는 이야기도 전해지지만, 『일리아스』의 이 짧은 표현만으로 그 모든 전승을 확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한 문장은 중요한 질문을 남긴다.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전쟁을 움직이는 것인가, 아니면 그 분노조차 더 큰 신의 뜻을 실현하는 통로가 되는 것인가. 이 질문은 1권에서 끝나지 않고 『일리아스』 전체를 따라가며 계속 확인해야 할 문제로 남는다.

“인간들의 왕 아가멤논과 신과 같은 아킬레우스”

호메로스는 두 사람의 갈등을 시작하면서 아가멤논(Agamemnon)과 아킬레우스(Achilles)를 서로 다른 수식어와 함께 부른다. 번역에 따라 표현에는 차이가 있지만, 아가멤논에게는 ‘인간들의 왕’, 아킬레우스에게는 ‘신과 같은’ 또는 ‘고귀한’이라는 성격의 수식이 붙는다. 이 차이는 두 사람이 가진 힘의 종류를 잘 보여준다. 아가멤논의 힘은 지위에서 나온다. 그는 아카이오이 연합군 전체를 이끄는 총사령관이며 여러 왕과 영웅 위에서 명령을 내린다. 반면 아킬레우스의 힘은 혈통과 개인의 능력에서 나온다. 그는 여신 테티스의 아들이며 아카이오이군에서 가장 뛰어난 전사 가운데 하나이다. 따라서 두 사람의 싸움은 단순한 성격 충돌이 아니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최고의 위치에 있는 두 사람이 누구의 명예와 권위가 우선하는가를 두고 충돌하는 장면이다. 이 차이는 브리세이스를 둘러싼 논쟁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아가멤논에게 전리품은 자신이 연합군의 왕으로서 받아야 할 몫이자 지위를 확인하는 표시이다. 아킬레우스에게도 자신의 전리품은 전장에서 싸워 획득한 명예의 표시이다. 따라서 아가멤논이 아킬레우스의 몫을 빼앗겠다고 선언하는 순간 문제는 한 여성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을 넘어선다. 아킬레우스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목숨을 걸고 싸워 얻은 명예를 총사령관이라는 이유만으로 아가멤논이 빼앗을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된다. 반대로 아가멤논에게 아킬레우스의 공개적인 반항을 그대로 허용하는 것은 자신의 지휘권이 무시되는 일이 된다. 그래서 두 사람은 같은 문제를 두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서로 다른 것을 지키려고 한다. 아가멤논은 왕의 권위를, 아킬레우스는 영웅의 명예를 지키려 한다. 『일리아스』 1권의 갈등이 쉽게 해결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느 한쪽의 성격만 고치면 끝나는 싸움이 아니라 영웅 사회를 지탱하는 서로 다른 가치가 정면으로 부딪치고 있기 때문이다.

『일리아스』의 첫머리는 이렇게 몇 개의 표현만으로 작품 전체의 중요한 문제를 미리 꺼내놓는다.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수많은 사람의 죽음으로 확대되고, 인간의 선택 뒤에서는 제우스의 뜻이 움직이며, 전쟁을 함께 수행해야 하는 두 지도자는 서로 다른 종류의 권위와 명예를 주장한다. 1권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바로 이 세 문제가 처음으로 충돌하는 지점이다.


┃ 장면 해독 : 누가 누구에게 복종해야 하는가 —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만들어지는 장면

『일리아스』 1권에서 아킬레우스(Achilles)와 아가멤논(Agamemnon)의 충돌은 흔히 브리세이스(Briseis)를 둘러싼 다툼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두 사람의 대화를 처음부터 따라가 보면 분노는 한 여인을 빼앗는 순간 갑자기 발생하지 않는다. 역병의 원인을 밝히려는 회의에서 시작된 논쟁은 전리품의 분배, 왕의 권한, 영웅의 명예, 복종의 범위를 차례로 건드리며 점점 깊어진다. 마지막에 아킬레우스가 어머니 테티스(Thetis)를 통해 제우스(Zeus)에게 개입을 요청하면서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은 아카이오이(Achaeans) 전체의 운명을 좌우하는 전쟁의 문제로 확대된다. 1권은 아킬레우스가 분노했다는 사실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분노가 어떤 말과 행동을 거쳐 만들어지고 마침내 전쟁의 방향을 바꾸는 힘이 되는지를 한 단계씩 보여준다. 그렇다면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어떻게 전쟁이 되는가. 그 과정은 바로 이 회의 장면에서 시작된다.

그 시작에는 예언자 칼카스(Calchas)의 두려움이 있다. 칼카스는 아폴론(Apollo)이 역병을 내린 원인을 알고 있으면서도 곧바로 말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이 진실을 밝힐 경우 아르고스인들을 지배하는 왕의 분노를 사게 될 것을 염려하며 먼저 아킬레우스에게 보호를 요청한다. 아킬레우스가 자신이 지켜주겠다고 약속한 뒤에야 칼카스는 아가멤논이 사제 크리세스(Chryses)를 모욕하고 그의 딸 크리세이스(Chryseis)를 돌려보내지 않은 것이 아폴론의 분노를 불러왔다고 밝힌다. 그리고 그의 우려는 곧 현실이 된다. 아가멤논은 예언의 내용을 제대로 반박하기보다 칼카스를 불길한 말만 하는 예언자라고 공격한다. 진실을 말하는 자가 왕의 분노를 먼저 걱정해야 한다는 사실이 이후의 갈등을 미리 드러내는 셈이다.

아가멤논은 결국 크리세이스를 돌려보내는 데 동의하지만 한 가지 조건을 붙인다. 자신만 명예의 선물 없이 남아서는 안 되므로 그 손실을 보상할 다른 몫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아킬레우스는 이미 공동체에 의해 나누어진 전리품을 다시 거두어들이는 것은 옳지 않으며, 훗날 트로이아(Troy)가 함락되면 더 많은 것으로 보상할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의미의 공정을 주장한다. 아킬레우스에게 이미 이루어진 분배는 공동체가 승인한 약속이며, 한 번 주어진 몫을 다시 빼앗아서는 안 된다. 반면 아가멤논에게는 모든 영웅이 자신의 몫을 가지고 있는데 왕인 자신만 빈손이 되는 것이 부당하다. 결국 그는 새로운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아킬레우스나 아이아스(Ajax), 오디세우스(Odysseus)의 몫 가운데 하나를 직접 가져가겠다고 선언한다. 이 순간 논쟁은 ‘누가 얼마나 많은 전리품을 갖는가’에서 ‘왕이 이미 다른 영웅에게 주어진 몫을 다시 빼앗을 권리가 있는가’라는 문제로 이동한다.

그 뒤 아가멤논은 크리세이스를 돌려보낼 배의 지휘자로 아이아스, 이도메네우스(Idomeneus), 오디세우스 등을 거론한 뒤 아킬레우스를 가리켜 ‘모든 인간들 가운데 가장 무서운 그대’라고 부른다. 아킬레우스가 최강의 전사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표현이지만, 바로 앞에서 아가멤논 자신이 여러 영웅을 거느린 왕의 위치에서 명령하고 있다는 점을 함께 보면 묘한 위계가 만들어진다. 아무리 두려운 전사라도 그는 여전히 왕이 지휘할 수 있는 ‘인간들’ 가운데 하나로 놓이는 것이다. 이에 아킬레우스는 논쟁의 전제를 더욱 근본적인 곳에서 뒤집는다. 자신은 트로이아인들에게 개인적인 피해를 입은 적이 없으며, 그들이 자신의 가축을 훔치거나 프티아(Phthia)의 땅을 침범한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자신이 이곳까지 온 것은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Menelaus)의 명예를 위해서였으며, 그럼에도 전리품을 나눌 때 자신은 아가멤논과 동등한 몫을 받아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프티아로 돌아가겠다는 선언은 단순한 도주가 아니라 자신이 자발적으로 제공하던 군사적 힘을 거두겠다는 참전 관계의 철회에 가깝다.

그러나 아가멤논은 바로 그 철회를 ‘도망’이라는 말로 바꾸어버린다. 떠나고 싶다면 떠나라고 말하며, 자신에게는 명예를 높여줄 다른 이들이 있고 무엇보다 조언자 제우스가 있다고 맞선다. 이어 제우스가 기른 여러 왕들 가운데 아킬레우스가 자신에게 가장 밉다고까지 말한다. 아킬레우스가 ‘나는 그대의 백성이어서 이 전쟁에 온 것이 아니다’라고 참전의 조건을 설명하자 아가멤논은 이를 ‘그렇다면 도망가라’는 불복종의 문제로 바꾸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말 뒤에 호메로스(Homer)가 아킬레우스에게 먼저 부여하는 감정은 뜻밖에도 분노가 아니라 슬픔이다. 아킬레우스는 즉시 칼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아가멤논을 죽일 것인지 분노를 억누를 것인지 갈등한다. 그의 살의 아래에는 자신의 기여와 명예가 공개적으로 부정되었다는 상처가 먼저 놓여 있다.

바로 그 순간 아테나(Athena)가 나타나 칼을 쓰지 말고 말로만 아가멤논을 꾸짖으라고 명한다. 흥미로운 것은 아킬레우스가 이 명령에는 곧바로 복종한다는 점이다. 그는 복종 자체를 거부하는 인물이 아니다. 아가멤논이 자신의 명예와 몫을 침해하면서 요구하는 복종에는 저항하지만 신의 권위에는 칼을 거두고 따른다. 더욱이 아테나는 아킬레우스에게 분노하지 말라고 하지 않는다. 물리적 폭력을 막되 말로 분노를 표현하는 것은 허용한다. 아킬레우스 역시 정확히 그 경계를 지킨다. 칼은 칼집에 넣지만 이후 아가멤논을 술주정뱅이, 개의 눈과 사슴의 심장을 가진 자, 전투와 매복에 나서지 않는 자, 백성을 잡아먹는 왕이라고 몰아붙인다. 이는 단순한 욕설의 나열이 아니다. 아가멤논이 지금까지 내세워온 전사로서의 명예와 왕으로서의 정당성을 차례로 공격하는 말들이다.

특히 아킬레우스는 언젠가 아카이오이인들이 자신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게 될 것이며, 그때가 되어도 아가멤논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선언한 뒤 자리에 앉는다. 칼을 들었던 아킬레우스는 신의 명령에 복종하여 물리적 충돌을 끝냈지만, 이번에는 아가멤논의 분노가 더욱 커진다. 네스토르(Nestor)가 두 사람 사이에 개입하여 아가멤논에게는 아킬레우스의 몫을 빼앗지 말라고 하고 아킬레우스에게는 왕과 맞서지 말라고 중재하지만 갈등은 수습되지 않는다. 아가멤논은 오히려 아킬레우스가 자신을 욕하고 명령하는 것을 어떻게 허용할 수 있느냐고 반발한다. 여기에서 그의 분노가 향하는 지점이 드러난다. 문제는 단지 전리품이 아니다. 다른 영웅이 왕의 행동을 평가하고 공개적으로 그 권위를 공격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아킬레우스 역시 마지막에 자신의 경계를 분명히 한다. 그는 아가멤논의 명령을 더는 따르지 않겠다고 선언하지만 브리세이스를 두고 무력으로 싸우지는 않겠다고 한다. 아카이오이인들이 자신에게 준 브리세이스를 아가멤논이 가져가는 것은 내버려두되, 자신의 함선이나 다른 소유물까지 손댄다면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겠다고 경고한다. 따라서 브리세이스의 강탈은 두 사람의 갈등을 처음 만들어낸 사건이라기보다 이미 무너진 관계를 눈에 보이는 형태로 확정하는 사건에 가깝다. 아킬레우스는 브리세이스를 빼앗긴 뒤 갑자기 전쟁에서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앞서 아가멤논이 자신의 명예와 참전의 조건을 부정한다고 판단하고 이미 철수를 선언했다.

이렇게 보면 회의의 시작과 끝은 기묘하게 대비된다. 처음 회의의 목적은 아카이오이군에 퍼진 역병의 원인을 밝히는 것이었다. 원인은 밝혀지고 크리세이스를 돌려보낼 방법도 마련된다. 그러나 역병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아카이오이군은 가장 강력한 전사인 아킬레우스를 잃는다. 공동체를 살리기 위해 칼카스가 진실을 말하도록 보호했던 인물이, 그 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왕과 충돌한 끝에 공동체의 전투에서 이탈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회의장을 떠난 그는 바닷가에서 어머니 테티스를 불러 자신의 명예가 모욕당했음을 호소하고, 제우스에게 부탁하여 아카이오이인들이 패배하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자신을 필요 없는 존재라고 선언한 아가멤논에게, 자신이 없는 전쟁이 어떤 모습인지 보여주려는 것이다. 이때부터 개인적인 모욕은 인간들 사이의 다툼을 벗어나 신들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어떻게 전쟁이 되는가라는 질문에 1권은 분명한 경로를 제시한다. 개인의 명예 훼손이 슬픔과 분노를 낳고, 그 분노가 테티스의 청원을 거쳐 제우스의 결정으로 이어지면서 아카이오이 전체의 운명을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 결론

『일리아스』 1권은 트로이 전쟁의 시작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미 10년째 이어지고 있는 전쟁의 한복판에서 작품은 아킬레우스(Achilles)의 분노를 첫 문장에 내세운다. 아폴론(Apollo)이 내린 역병, 크리세스(Chryses)와 크리세이스(Chryseis), 칼카스(Calchas)의 예언은 모두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Agamemnon)의 충돌을 불러오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두 사람의 갈등을 단순히 브리세이스(Briseis)를 둘러싼 전리품 다툼으로 읽으면 1권이 보여주는 문제의 상당 부분을 놓치게 된다. 이들의 대화 속에서 충돌하는 것은 한 여인의 소유권만이 아니라 이미 분배된 몫을 다시 빼앗을 수 있는가, 왕의 권한은 어디까지 미치는가, 독립된 영웅은 누구에게 복종해야 하는가,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개인의 명예는 무엇으로 인정되는가라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호메로스(Homer)는 이러한 갈등을 추상적인 설명이 아니라 인물들의 말과 행동을 통해 단계적으로 드러낸다. 진실을 말하기 전에 왕의 분노부터 두려워하는 칼카스, 자신의 손실을 다른 영웅의 몫으로 보상받으려는 아가멤논, 이미 이루어진 분배의 원칙을 지키려는 아킬레우스의 주장은 서로 다른 권력과 명예의 기준을 보여준다. 아킬레우스가 자신은 트로이아(Troy)와 개인적인 원한이 없어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Menelaus)의 명예를 위해 전쟁에 참여했다고 밝히는 순간 갈등은 더욱 근본적인 문제로 내려간다. 그는 아가멤논의 백성이기 때문에 전쟁터에 온 것이 아니며, 자신이 제공한 힘에 합당한 명예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그 관계에서 물러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아가멤논이 그의 철수를 ‘도망’으로 규정하면서 두 사람의 논쟁은 전리품의 분배를 넘어 누가 상대의 위치와 행동을 규정할 권리를 갖는가라는 싸움으로 변한다.

특히 첫머리에서 선언된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실제 장면 안에서 단순한 격정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아가멤논의 모욕 뒤 호메로스가 먼저 보여주는 것은 아킬레우스에게 닥친 슬픔이며, 그 슬픔은 살의로 이어진다. 그러나 아테나(Athena)가 나타나 칼을 거두라고 명하자 그는 신의 명령에는 즉시 복종한다. 아킬레우스는 모든 권위에 저항하는 인물이 아니라 자신이 정당하다고 인정하는 권위와 그렇지 않은 권위를 구분한다. 칼을 거둔 뒤 그는 말로 아가멤논의 전사적 명예와 왕으로서의 정당성을 공격하고, 마침내 아가멤논의 명령을 더는 따르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브리세이스를 빼앗기는 사건은 이러한 결별을 처음 만들어내는 원인이 아니라 이미 무너진 관계를 눈앞에 드러내는 결정적인 표지가 된다.

그렇다면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어떻게 전쟁이 되는가. 한 영웅의 명예가 훼손되고, 그 상처가 슬픔과 분노를 낳으며, 인간들 사이에서 해결되지 못한 갈등은 마침내 신들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아킬레우스는 어머니 테티스(Thetis)에게 자신의 명예를 회복해달라고 호소하고, 테티스는 제우스(Zeus)에게 아카이오이인들이 패배하도록 도와달라고 청한다. 아가멤논이 ‘너 없이도 된다’고 선언한 순간 개인적인 자존심의 충돌처럼 보였던 사건은 아킬레우스가 없는 전쟁이 무엇인지를 아카이오이 전체가 경험해야 하는 문제로 확대된다. 결국 『일리아스』 1권은 전쟁터의 승패가 창과 방패만으로 결정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한 사람의 명예를 둘러싼 균열이 공동체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신들의 결정까지 움직이는 순간,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더 이상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전쟁 그 자체의 힘이 된다.


팔짱을 낀 아킬레우스를 통해 일리아스 첫 장의 분노와 갈등을 표현한 일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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