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짐승』 작가가 뿌려놓은 빵조각 찾기
┃ 들어가며

읽기 전 탐색은 작품의 문을 열기 전에 작가가 먼저 흘려놓은 빵조각을 찾아보는 글이다. 작품 초반 50페이지 이내에 등장하는 시대적 배경과 인물의 행동, 반복되는 감각과 물건을 따라가며 읽는 데 필요한 기본 배경지식과 해석의 실마리를 정리한다. 낯선 이름을 외우기 위한 설명이 아니라, 작가가 왜 그것을 첫머리에 놓았는지 알아볼 수 있도록 작품으로 들어가는 길을 미리 밝히는 글이다. 『핀치콘티니가의 정원』의 읽기 전 탐색처럼, 작품 전체의 결말을 먼저 끌어오지는 않되 초반부만으로 이미 읽을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읽어본다.
에밀 졸라(Émile Zola)의 『인간 짐승(La Bête humaine)』은 1869년 2월 파리 생라자르역(Gare Saint-Lazare)을 내려다보는 방에서 시작한다. 첫 장의 중심인물은 르아브르역 부역장 루보(Roubaud)와 그의 아내 세베린(Séverine)이다. 그런데 졸라는 두 사람의 이야기에 곧바로 들어가지 않는다. 먼저 선로와 신호, 증기기관차를 보여주고, 그 위에 기적과 증기음, 객차의 충돌음, 아래층의 피아노와 노랫소리를 겹친다. 그 다음에는 루보가 공화파로 의심받은 사건과 그랑모랭(Grandmorin)의 정치적 영향력을 길게 들려주고, 아무 관련 없어 보이는 새 칼과 오래된 뱀 반지를 식탁 위에 올려놓는다. 첫 장의 사건은 갑자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그 전에 이미 수많은 작은 정보가 배치되어 있다.
이 초반부에서 특히 눈여겨볼 것은 통제되는 거대한 힘과 통제되지 않는 인간, 보이지 않는 것을 먼저 감지하는 소리, 그리고 과거의 인물이 현재의 삶 안에 얼마나 깊숙이 들어와 있는가이다. 『인간 짐승』이라는 제목에서 ‘짐승’을 특별한 악인이나 괴물에게서 찾기 시작하면 오히려 작품의 첫머리를 놓칠 수 있다. 졸라는 시작부터 평범하게 살아가는 인간과 문명화된 철도 시스템을 나란히 놓고, 어느 쪽에서 통제가 무너지는지를 보여주기 시작한다.
┃ 거대한 기관차는 왜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할까
『인간 짐승』의 첫 페이지에서 가장 먼저 펼쳐지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철도 시스템이다. 루보가 창밖을 내려다보면 수많은 선로가 부채꼴로 갈라지고, 전철수의 신호소가 있으며, 붉은 신호가 선로를 통제한다. 거대한 급행 기관차도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선로를 달라고 기적을 울리고, 명령이 떨어지면 짧은 기적으로 응답한 다음에야 움직인다. 다른 기관차 역시 붉은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렸다가 선로가 열리자 출발한다. 졸라는 증기기관차를 살아 있는 것처럼 묘사하지만, 그 거대한 힘은 선로와 신호, 명령이라는 규칙 안에서만 움직인다.
이 장면은 『인간 짐승』이라는 제목을 생각하면 흥미로워진다. 기관차는 인간보다 훨씬 강한 힘을 가진 기계이지만 그 힘 때문에 위험한 것이 아니다. 힘이 선로를 벗어나지 않고, 신호에 반응하며, 정해진 체계 안에서 통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작품에서 문제가 되는 ‘짐승성’도 단순히 강한 욕망이나 충동이 존재한다는 사실에만 있지는 않을 수 있다. 힘이 있다는 것이 짐승인 것이 아니라, 그 힘이 더 이상 제어되지 않을 때 짐승이 되는 것은 아닐까.
흥미롭게도 바로 뒤에 등장하는 루보 역시 처음에는 규칙을 지키는 사람이다. 부지사가 사냥개를 일등칸에 태우려고 하자 루보는 철도 규정을 지키게 하려 하고, 운송국장도 규정을 적용한 그의 행동 자체는 옳았다고 인정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언쟁이 격해지자 루보는 상대에게 “당신네가 영원히 주인은 아닐 것이다”라는 취지의 말을 내뱉고, 그 한마디 때문에 공화파로 의심받으며 직장을 잃을 위기에 놓인다. 루보는 규칙을 지키다가 화를 제어하지 못해 규칙의 문제를 정치적 공격으로 바꾸어버린다. 작품 첫머리의 기관차는 거대한 힘을 가지고도 신호 앞에서 멈추는데, 인간은 작은 분노 하나를 제어하지 못해 자신의 삶을 위험에 빠뜨린다.
이 대비는 첫 장을 읽을 때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졸라는 철도를 근대화의 배경으로만 가져온 것이 아니다. 『인간 짐승』의 세계에서는 통제와 힘이 처음부터 함께 등장한다. 선로와 신호를 가진 기계의 힘과 자신의 내부에 그런 선로를 가지고 있지 못한 인간의 힘이 나란히 놓인다.
┃ 『인간 짐승』에서는 사건보다 소리가 먼저 움직인다
『루공가의 치부』를 읽을 때는 넓은 풍경과 군중, 거리와 공간을 눈으로 따라가야 하는 장면이 많았다. 그런데 『인간 짐승』의 첫 장은 느낌이 전혀 다르다. 생라자르역의 풍경이 펼쳐지지만 졸라는 계속 독자의 귀를 움직인다. 아직 기관차가 보이지 않는데 기적부터 들리고, 명령하는 목소리와 응답하는 기적이 이어지며, 증기가 터져 나오고 객차의 완충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아래층에서는 젊은 자매들이 웃고 노래하며 새장 속 새들까지 소리를 보탠다.
그래서 『인간 짐승』의 초반은 독서 속도가 빠른 작품이라기보다 지각의 템포가 빠른 작품에 가깝다. 아직 무엇이 일어났는지 판단하기도 전에 소리가 먼저 들어와 독자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끌어간다. 멀리서 기관차의 기적이 들리면 시선이 철도로 이동하고, 아래층의 피아노가 갑자기 크게 울리면 지금까지 듣던 대화가 끊어진다. 사건의 정보가 독자의 감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소리가 먼저 긴장과 움직임을 만들어놓은 뒤 사건이 따라오는 경우가 많다.
이때 철도 위에 반복해서 내려앉는 증기와 연무도 함께 볼 필요가 있다. 첫 페이지부터 맞은편 건물의 윤곽은 흐려지고, 흰 증기와 검은 연기가 선로를 덮는다. 기관차는 보이지 않는데 기적은 들리고, 연기가 벌어지는 순간에야 뒤쪽의 열차가 모습을 드러낸다. 즉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세계는 계속 가려졌다 열리지만, 소리는 가려지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불확실해질 수 있어도 들리는 것은 이미 독자에게 도착해 있다.
이 구조를 따라가면 첫 장에서 눈과 귀가 서로 다른 역할을 하기 시작한다. 눈은 파악할 수 있는 질서를 확인하고, 귀는 아직 보이지 않는 힘의 접근을 먼저 감지한다. 연무는 단순히 철도역의 사실적인 풍경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각적 확실성을 떨어뜨리고, 그만큼 소리의 존재를 키운다. 『인간 짐승』에서 심리가 흔들릴수록 인물이 보는 세계가 좁아지고 들리는 세계가 커지는 순간이 있는지 살펴보면 초반부터 졸라가 감각을 얼마나 의도적으로 움직이고 있는지 보이기 시작한다.
┃ 싸움이 벌어지는데 왜 아래층에서는 계속 노래할까
이 소리의 사용이 가장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은 루보와 세베린의 관계가 무너지기 시작한 뒤이다. 루보가 세베린을 폭행하고 과거를 캐묻는 동안 아래층에서는 다우베르뉴 자매들이 피아노를 치며 노래하고 웃는다. 피아노 소리가 오히려 위층에서 벌어지는 싸움의 소리를 덮어버린다. 루보의 폭력이 잠시 멈춘 뒤에도 음악과 젊은 웃음소리는 그대로 계속된다.
여기서 아래층의 음악을 단순히 행복한 소리라고 읽으면 조금 부족하다. 이 소리가 만드는 것은 오히려 정상성이다. 같은 건물 아래층에서는 평범한 사람들이 노래하고 웃으며 일상을 보내고 있다. 바로 한 층 위에서 폭력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알지 못한다. 폭력이 시작되었다고 건물 전체가 어두워지거나 세상이 멈추지 않는다. 바깥에서는 기관차가 예정된 시간에 움직이고, 아래층에서는 피아노가 연주된다.
그래서 이 장면에서 문명과 짐승성은 서로 맞서 싸우는 두 세계가 아니다. 동시에 존재한다. 한쪽에서 인간이 폭력적으로 무너지는 순간에도 다른 한쪽의 정상적인 생활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 정상성이 그대로 유지되기 때문에 위층의 폭력은 더 기괴해진다. 졸라는 짐승성을 사회 밖의 야생이나 어둠 속으로 밀어내지 않는다. 철도와 아파트, 피아노와 웃음이 있는 문명 한가운데에 그대로 놓는다.
첫 장에서 소리가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소리는 공간의 벽을 넘어온다. 루보와 세베린의 방은 닫힌 공간이지만 아래층의 노래는 계속 침입한다. 반대로 그들의 폭력은 피아노 소리에 가려져 아래층으로 내려가지 않는다. 두 세계는 바로 붙어 있으면서도 서로를 알지 못한다. 『인간 짐승』이 인간 안의 폭력을 특별한 괴물에게 맡기지 않는 작품이라면, 이 첫 장면부터 이미 정상적인 세계와 폭력적인 세계 사이의 거리는 생각보다 훨씬 짧다.
┃ 루보는 왜 공화파라는 말 하나 때문에 직장을 잃을 뻔했을까
루보가 세베린에게 들려주는 부지사 사건은 처음에는 본 이야기와 상관없는 직장 에피소드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짧은 이야기를 빼면 이후 그랑모랭이 루보에게 어떤 존재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사건의 현재는 1869년이다. 프랑스는 나폴레옹 3세의 제2제정 말기에 있었고, 공화파와 야당의 세력이 커지면서 정부가 총선과 정치적 반대에 민감하던 시기였다. 루보는 철도 규정을 지켰지만 언쟁 중 지배세력이 영원히 권력을 잡지는 못할 것이라는 말을 내뱉었고, 이 때문에 공화파로 의심받는다. 작품에서도 1869년 의회와 다가오는 총선에 대한 정부의 불안이 직접 언급된다.
더 중요한 것은 루보가 어떻게 위기를 벗어나는가이다. 그를 구한 것은 자신의 근무평가나 규정을 지킨 정당성이 아니다. 그랑모랭의 추천이다. 루보 자신도 세베린이 자신의 아내가 아니었고 그랑모랭이 그녀를 아껴 자신을 위해 힘써주지 않았다면 지방의 작은 역으로 쫓겨났을 것이라고 인정한다. 심지어 그가 서명한 사과문도 그랑모랭이 조언하고 작성한 것이다.
이 장면에서 루보는 이상한 위치에 놓인다. 그는 성실한 직원이고 규정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며 자신이 맡은 일을 제대로 해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 자신의 자리를 지켜주는 것은 능력이나 규칙이 아니라 아내를 통해 연결된 유력자의 권력이다. 그랑모랭의 도움은 감사해야 할 일이면서 동시에 루보의 자립성이 완전하지 않다는 증거가 된다.
그래서 이 정치 이야기는 단순한 시대 설명이 아니다. 곧 이어질 부부의 갈등을 위해 졸라가 먼저 깔아놓은 조건이다. 루보의 현재 사회적 위치에는 이미 그랑모랭이 들어와 있다. 이것을 알고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야 그의 분노가 단순한 질투 이상의 것이 되는 이유가 보인다. 제2제정과 공화파의 정치적 배경은 앞서 정리한 『루공-마카르 총서』 역사적 배경과 함께 읽으면 더 쉽게 연결된다.
┃ 그랑모랭은 세베린의 과거에만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랑모랭은 세베린의 어린 시절부터 존재한 사람이다. 세베린의 아버지가 죽은 뒤 그녀를 자신의 딸과 함께 지내게 했고, 법조계에서 오랜 경력을 쌓아 루앙의 고위 법관까지 지냈으며 수백만 프랑의 재산과 지방정치의 지위도 가지고 있다. 루보가 자신의 직장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랑모랭의 이름을 꺼낼 수 있을 만큼 그는 부부의 현재 생활에도 가까운 존재이다. 심지어 이들이 머무는 방의 주인인 빅투아르 역시 그랑모랭의 도움으로 철도회사 안에서 자리를 얻은 사람이다. 첫 장의 인간관계를 따라가다 보면 그랑모랭의 후원이 한 사람에게만 미치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생활 곳곳으로 퍼져 있다는 사실이 보인다.
세베린이 그랑모랭의 초대를 거절하는 장면도 여기에서 의미가 생긴다. 루보는 오히려 세베린에게 두앵빌에 다녀오라고 권한다. 자신들의 처지에서는 그랑모랭 집안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세베린은 결혼한 뒤 이미 두 번이나 그곳에 일주일씩 머물렀으면서 이번에는 이유를 제대로 말하지 않은 채 세 번째 방문을 거부한다. 루보에게 그랑모랭은 아직 자신들을 도와주는 후원자이기 때문에 아내가 그의 호의를 거절하는 것이 오히려 이해되지 않는다.
이 지점까지 읽으면 그랑모랭은 단순히 세베린의 과거 속 남자가 아니다. 루보의 직업과 부부의 사회적 관계, 세베린의 어린 시절과 결혼 이후의 생활까지 여러 방향에서 연결되는 인물이다. 따라서 이후 그의 이름이 다시 등장할 때는 세베린의 과거만이 아니라 이 부부의 현재를 떠받치고 있는 권력관계까지 함께 볼 필요가 있다.
┃ 루보는 왜 아내의 과거를 알고 이렇게까지 무너질까
루보의 폭력을 정당화할 수는 없지만, 그가 왜 이렇게까지 무너지는지를 이해하려면 그의 기본적인 성향부터 볼 필요가 있다. 루보는 플라상 출신 마부의 아들로 태어나 특무상사로 군복무를 마치고, 이후 철도회사에 들어가 여러 직책을 거쳐 르아브르역 부역장까지 올라온 인물이다. 군대와 철도라는 두 조직은 모두 규칙과 위계, 시간과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세계이다. 실제로 첫 장의 루보도 부지사가 규정을 어기자 자신의 지위보다 높은 사람을 상대로 끝까지 규정을 적용하려 할 만큼 질서와 원칙에 강하게 반응한다.
이런 성향을 생각하면 세베린의 고백 이후 루보가 겪는 충격도 조금 다르게 보인다. 그는 자신이 세베린과 만나 가정을 만들었고 성실하게 일해 자신의 자리를 얻었다고 믿어왔다. 그런데 진실을 알게 될수록 그 질서가 하나씩 무너진다. 세베린과의 결혼은 단순한 사랑의 결과가 아니었고, 그랑모랭에게서 벗어나기 위한 탈출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직업적 안정과 승진에도 그랑모랭의 힘이 들어가 있었고, 정치적 실수로 자리를 잃을 위기에서도 결국 그랑모랭의 후원으로 살아남았다. 자기가 스스로 쌓아왔다고 믿었던 삶의 질서가 사실은 다른 사람의 힘에 기대고 있었다는 사실이 한꺼번에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루보의 분노는 질투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오히려 질서와 통제 속에서 살아온 사람이 자기 삶에 대한 통제권을 잃었다고 느끼는 순간에 가깝다. 세베린의 과거만 빼앗긴 것이 아니라 결혼과 직업, 사회적 위치까지 자신의 것이 맞는지 다시 의심하게 된다. 그가 반복해서 “어떻게 해야 하나”에 가까운 말을 되풀이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늘 규칙과 명령 속에서 움직여온 사람이지만, 정작 자신의 삶을 뒤흔든 사건 앞에서는 따라갈 선로도 명령도 없다.
이때 그의 살의 역시 단순한 복수보다 복잡해진다. 그랑모랭을 제거한다고 이미 일어난 과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루보에게는 그 사람을 없애는 행위가 무너진 자기 삶의 경계를 다시 세우려는 시도처럼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첫 장의 기관차와 루보는 묘한 대비를 이룬다. 기관차는 거대한 힘을 가지고도 신호와 선로 안에서 움직이지만, 루보는 자신이 의지해온 질서가 무너지는 순간 내부의 힘을 제어하지 못한다. 통제에 익숙했던 사람일수록 통제권을 잃었다고 느낄 때 더 극단적으로 반응할 수 있다는 점이 루보의 첫 장을 읽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 작은 뱀 반지는 왜 모든 것을 무너뜨릴까
세베린의 비밀이 드러나는 직접적인 계기는 거창한 편지나 목격자의 증언이 아니다. 루보가 너무 오래 보아 이제는 눈여겨보지도 않았던 작은 금반지이다. 세베린의 왼손에는 결혼반지와 함께 루비가 박힌 머리를 가진 금빛 뱀 반지가 끼워져 있다. 루보는 결혼생활 내내 그 반지가 그 자리에 있는 것을 보아왔다. 그런데 세베린이 무심코 그랑모랭에게 열여섯 살 생일 선물로 받았다고 말한다. 루보는 지금까지 그것이 세베린의 어머니에게서 받은 반지라고 알고 있었다. 아주 작은 거짓말 하나가 지금까지 감춰져 있던 관계 전체를 열어버린다.
이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과거가 멀리 숨겨져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랑모랭의 흔적은 세베린의 손에 계속 붙어 있었다. 루보는 매일 그것을 보고도 무엇인지 몰랐다. 따라서 비밀의 발견은 새로운 물건을 찾아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늘 보고 있던 물건의 의미가 갑자기 바뀌면서 시작된다. 이것은 『인간 짐승』 첫 장에 반복되는 ‘보았지만 알지 못했던 것’의 문제와도 연결된다. 시야는 열려 있었지만 의미는 가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하필 이 반지가 뱀 모양이라는 점도 흘려보내기 어렵다. 19세기 유럽 장신구에서 뱀은 위험이나 유혹뿐 아니라 사랑과 영원성, 지속되는 결속을 나타내는 모티프로도 사용되었다. 졸라가 이 반지에 하나의 상징을 고정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세베린이 끝내고 싶었던 과거의 관계를 드러내는 물건이 몸을 감는 뱀의 형태이며 결혼 이후에도 계속 그녀의 손에 남아 있었다는 배치는 묘하다.
더 중요한 장면은 뒤에 나온다. 루보는 세베린의 손에 여전히 남아 있던 뱀 반지를 빼앗아 바닥에 던지고 발로 짓밟는다. 그가 파괴하는 것은 단순히 값비싼 장신구가 아니다. 자신보다 먼저 세베린의 삶에 들어와 있었고 결혼 뒤에도 사라지지 않았던 관계의 흔적이다. 그러나 반지를 부순다고 이미 일어난 과거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 장면은 루보의 분노가 가진 모순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는 눈앞의 물건은 파괴할 수 있지만, 그 물건이 증명한 과거는 파괴할 수 없다.
┃ 세베린이 선물한 칼은 왜 순식간에 다른 물건이 될까
뱀 반지가 과거에서 현재로 남아 있는 물건이라면, 새 칼은 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세베린은 파리에서 루보에게 새 칼을 사준다. 루보가 잃어버린 칼을 대신하는 선물이고, 두 사람은 장난을 치며 칼 때문에 우정이 끊기지 않도록 동전을 주고받는다. 곧이어 둘은 그 칼로 파테와 치즈를 자르며 즐겁게 식사한다. 처음 등장했을 때 칼은 부부의 친밀함과 평범한 생활 속에 놓인 물건이다.
그런데 같은 방에서 두 사람의 관계가 무너지자 칼의 의미가 달라진다. 세베린이 바닥에 쓰러진 순간 탁자 위에 펼쳐진 칼날이 눈에 들어오고, 그녀는 루보가 그것을 집어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칼은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진 것은 그것을 둘러싼 인간의 상태이다. 조금 전까지 음식을 자르던 도구가 같은 자리에서 죽음의 가능성을 가진 물건으로 바뀐다.
이 변화가 흥미로운 이유는 칼 자체에는 아무 변화도 없기 때문이다. 같은 칼이 조금 전까지는 부부의 친밀함과 일상을 보여주는 물건이었다가, 관계가 무너지는 순간 위협의 가능성을 품는다. 졸라는 물건에 처음부터 하나의 의미를 붙여놓기보다 인간의 상태가 변하면서 같은 물건의 의미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보여준다. 뱀 반지가 과거의 의미를 뒤늦게 드러내는 물건이라면, 새 칼은 현재의 변화에 따라 의미가 바뀌는 물건인 셈이다.
┃ 눈으로 보이는 질서와 인간 안의 질서는 같은가
첫 장을 다시 처음부터 보면 창밖과 방 안에는 서로 다른 질서가 놓여 있다. 창밖의 기관차는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선로와 신호에 따라 멈추고 움직인다. 반면 방 안의 인간은 그렇게 명확한 선로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규칙을 중시하던 루보조차 분노와 충격 앞에서 자기 행동을 제어하지 못한다. 철도에서는 힘의 방향이 눈에 보이지만 인간 내부의 힘은 겉으로 드러나기 전까지 알기 어렵다.
여기에 소리와 연무, 반지와 칼이 모두 연결된다. 보이는 세계는 정상적으로 움직이는데 그 안에서는 오래 숨겨져 있던 관계와 감정, 폭력의 가능성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다. 그래서 『인간 짐승』의 첫 장이 던지는 질문은 단순히 누가 ‘짐승’인가가 아니다. 눈앞의 질서 아래에 어떤 힘이 숨어 있으며, 그것을 인간은 어디까지 통제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을 들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면 된다.
┃ 『인간 짐승』은 루공-마카르 가문의 어디에 있을까
『인간 짐승』은 루공-마카르 총서의 열일곱 번째 작품이다. 첫 장에서는 루보와 세베린의 이야기가 중심에 놓이지만, 작품의 중심인물 자크 랑티에는 마카르 가문의 혈통을 잇는 인물이다. 따라서 첫 장에서 보았던 충동과 통제의 문제는 한 부부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졸라가 루공-마카르 총서 전체에서 추적해온 유전과 환경의 문제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자크 랑티에는 제르베즈 마카르와 오귀스트 랑티에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클로드와 에티엔의 형제이다. 『목로주점』에서 시작된 제르베즈의 계보가 『작품』의 클로드, 『제르미날』의 에티엔을 거쳐 『인간 짐승』의 자크로 다시 이어지는 셈이다. 같은 가계에서 태어난 인물들이 서로 다른 환경에서 어떤 욕망과 충동을 드러내는지 비교해보면, 『인간 짐승』이 총서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도 조금 더 선명해진다.

┃ 나가며
『인간 짐승』의 첫 50페이지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이미 보여준다. 선로 위의 기관차에는 힘이 있지만 신호와 규칙이 있고, 규칙을 지키는 철도 직원 루보는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해 스스로 위험을 만든다. 역을 뒤덮는 연무는 시야를 흐리지만 소리는 계속 들어오고, 루보와 세베린의 세계가 무너지는 동안에도 아래층에서는 피아노와 노래가 이어진다. 철도라는 문명의 질서와 인간 안의 폭력은 서로 다른 세계에 있지 않다. 같은 공간에서 동시에 움직인다.
그랑모랭 역시 과거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는 세베린의 어린 시절과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루보의 직업적 안정과 부부의 사회적 위치에도 영향을 미친다. 세베린이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결혼조차 완전한 탈출이 되지 못한다. 루보가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무너지는 것은 아내에 대한 믿음 하나가 아니라 자신이 독립적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했던 삶의 구조이다. 그래서 그의 분노와 폭력은 질투만으로 설명하기 어렵고, 자신의 것이었다고 믿었던 영역을 되찾으려는 욕망까지 함께 읽어야 한다.
그리고 그 모든 균열은 거대한 사건이 아니라 작은 물건에서 열린다. 늘 손가락에 있던 뱀 반지는 끝난 줄 알았던 과거가 현재에 남아 있음을 드러내고, 조금 전까지 음식을 자르던 새 칼은 인간의 상태가 달라지는 순간 전혀 다른 가능성을 가진 물건으로 바뀐다. 『인간 짐승』의 첫 장은 그렇게 독자에게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짐승은 처음부터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평범한 인간이 자신의 힘을 더 이상 제어하지 못하는 순간 나타나는 것일까.
아직 첫 50페이지이다. 그런데 졸라는 이미 선로와 신호, 소리와 연무, 권력과 결혼, 반지와 칼을 한 방 안에 모아놓았다. 뒤로 갈수록 새로운 것이 갑자기 생겨난다기보다,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들의 의미가 하나씩 달라질 가능성이 크다. 이것들이 바로 『인간 짐승』의 첫머리에서 작가가 뿌려놓은 빵조각이다. 무엇이 새롭게 나타나는지만큼 이미 보고도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이 어떻게 다시 돌아오는지를 따라가다 보면, 졸라가 첫 장에 숨겨놓은 길도 조금씩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