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 / 보르헤스 / 완벽한 질서가 매혹적이던 시대
┃ 들어가며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의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Tlön, Uqbar, Orbis Tertius)」가 처음 발표된 것은 1940년 5월이었다. 작품은 아르헨티나의 문예지 『수르(Sur)』에 실렸고, 보르헤스가 몇 년 뒤 『픽션들』에 묶게 될 작품들 가운데서도 유난히 기묘한 출발을 가진다. 백과사전의 한 항목을 따라가다가 존재하지 않는 나라를 만나고, 그 나라가 다시 하나의 세계로 확장되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쓰인 1940년을 생각하면, 그 기묘한 세계는 당시 현실과 전혀 동떨어져 있지 않았다.
유럽에서는 이미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어 있었다. 독일은 1939년 폴란드를 침공했고, 1940년 봄에는 서유럽으로 빠르게 진격했다. 몇 년 전부터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즘이, 독일에서는 나치즘이 국가 전체를 조직하고 있었으며, 소련에서는 스탈린 체제가 사회를 거대한 정치적·경제적 계획 아래 재편하고 있었다. 서로 내용도 목적도 다른 체제들이었지만, 하나의 공통점은 있었다. 세계가 왜 혼란스러운지 설명하고, 누가 적인지 가려내며, 앞으로 어떤 질서를 만들어야 하는지 하나의 커다란 이야기 안에 넣으려 했다는 점이다.
아르헨티나 역시 평온하지 않았다. 보르헤스가 서른한 살이던 1930년 군사쿠데타가 일어났고, 이후 1943년까지 이어진 시기는 부정선거와 정치적 부패, 국가 감시와 탄압 때문에 ‘악명 높은 10년’이라는 이름으로 남았다. 1930년대 후반이 되면 극우 민족주의와 반파시즘이 거리에서 충돌했고, 유럽의 전쟁은 대서양 건너 아르헨티나 사회까지 갈라놓았다.
그러므로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는 일은 작품 속 가상 세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해설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질문은 현실 쪽으로 향해야 한다. 왜 이 시대의 사람들은 강한 질서와 완전한 설명에 그토록 끌렸을까. 왜 세계가 혼란스러울수록 하나의 원리로 모든 것을 정리해주는 체계가 매혹적으로 보였을까. 그리고 보르헤스는 왜 그 매혹을 그렇게 오래 의심했을까.
┃ 1930년, 보르헤스의 나라에서 먼저 균열이 생겼다
1929년 세계경제가 흔들리기 시작했을 때 아르헨티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대통령은 급진시민연합의 이폴리토 이리고옌(Hipólito Yrigoyen)이었다. 그는 1916년 처음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1928년 다시 집권했지만 두 번째 임기 초부터 경제위기와 정치적 반발에 부딪혔다. 우파 보수세력과 새롭게 성장하던 민족주의자들은 의회정치를 무능하고 타락한 것으로 비난했고, 결국 1930년 9월 호세 펠릭스 우리부루(José Félix Uriburu) 장군이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이리고옌을 몰아냈다.
쿠데타로 들어선 우리부루 정권은 시민의 권리를 제한하고 정치적 반대파를 탄압했다. 좌파 활동가들은 체포와 고문, 추방을 당했고 일부는 처형되었다. 우리부루 정권 자체는 오래가지 않았지만, 문제는 군부가 대통령을 끌어내릴 수 있다는 선례가 만들어졌다는 데 있었다. 이후 아르헨티나는 수십 년 동안 군사개입과 민주정치의 중단을 반복하게 된다.
1932년에는 아구스틴 페드로 후스토(Agustín Pedro Justo)가 대통령이 되었고 형식상 민간정부가 돌아왔지만, 정치가 정상화된 것은 아니었다. 1930년부터 1943년까지 이어진 보수정부 시기에는 선거부정과 부패가 광범위하게 나타났고, 국가의 감시와 탄압도 계속되었다. 당시 부에노스아이레스 경찰의 정치부서는 몇 년 사이 수천 명의 활동가를 체포했고 고문도 일상적으로 사용했다는 연구가 남아 있다. 겉으로는 선거도 있었고 의회도 존재했지만, 그 제도가 실제 시민의 의사를 얼마나 반영하는지는 다른 문제였다.
이 시대를 단순히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의 정치적 원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보르헤스가 살아가던 현실에서 이미 한 가지 중요한 경험이 축적되고 있었다. 질서가 존재한다는 것과 그 질서가 진실하거나 정당하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라는 경험이다. 제도는 멀쩡하게 남아 있어도 그 안의 규칙이 조작될 수 있고, 민주주의라는 이름이 있어도 국가가 시민을 감시하고 억압할 수 있었다.
┃ ‘악명 높은 10년’, 사람들은 정치 자체를 믿지 못하게 되었다
1930년대 아르헨티나는 경제적으로도 크게 변하고 있었다. 세계대공황으로 농축산물 수출에 의존하던 경제가 타격을 입었고, 국제무역이 위축되면서 수입대체 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농촌에서 도시로 사람이 이동했고, 공장 노동자와 도시 노동계층이 점차 늘어났다. 한편 기존 보수정권은 부정선거와 권력층의 이해관계에 얽혀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문제는 정치에 대한 불신이 커질수록 사람들이 민주주의 자체보다 ‘강한 질서’를 대안으로 받아들이기 쉬워졌다는 점이다. 의회가 갈등만 반복하고 경제위기를 해결하지 못한다고 느끼면, 복잡한 토론보다 빠른 결정을 약속하는 정치가 더 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다. 선거와 정당, 의회의 절차는 느리고 답답하지만 군대와 강한 지도자는 한 방향을 제시한다.
이런 분위기는 아르헨티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대공황 뒤 유럽에서도 자유주의적 의회정치에 대한 회의가 커졌고, 파시즘과 나치즘은 바로 그 틈에서 자신들을 ‘무질서를 끝낼 힘’으로 내세웠다. 경제와 정치가 흔들릴수록 질서는 하나의 정책이 아니라 감정적인 욕망이 되었다.
보르헤스가 훗날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 후기에서 인간이 대칭과 질서의 외관에 매혹된다고 쓴 문장은 이런 시대와 겹쳐 읽을 수 있다. 다만 이것을 나치즘이나 특정 정권 하나에 대한 암호로 좁히면 작품이 작아진다. 중요한 것은 왜 인간이 불완전한 현실보다 잘 정리된 체계를 더 믿고 싶어 하는가라는 훨씬 넓은 문제였다.
┃ 아르헨티나의 거리에도 파시즘과 반파시즘이 있었다
1930년대 아르헨티나의 우익 민족주의 운동 가운데 일부는 유럽 파시즘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아들였다. 우리부루를 지지하며 만들어진 단체 가운데는 파시즘식 제복과 경례를 채택한 조직도 있었고, 일부 민족주의 지식인들은 자유민주주의 대신 독재정치를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역사학에서는 이 시기의 아르헨티나 민족주의 운동 일부를 파시즘적 흐름으로 분류한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그 반대편도 성장했다. 스페인 내전과 독일 나치즘의 팽창,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은 아르헨티나의 자유주의자와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유대계 지식인 등을 반파시즘 운동으로 끌어들였다. 1930년대 말에는 유럽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이념갈등이 그대로 아르헨티나 거리와 신문, 지식인 사회에 들어왔다. 당시 연구는 이 시기 아르헨티나 사회가 ‘민주주의 대 나치·파시즘’이라는 구도로 갈라졌다고 설명한다.
보르헤스도 여기서 비켜나 있지 않았다. 그는 1930년대부터 반유대주의와 혈통주의를 조롱했고, 1934년에는 자신을 유대인 혈통으로 공격한 글에 맞서 「나, 유대인」을 발표했다. 당시 아르헨티나에서는 국립도서관장을 맡을 정도의 보수 지식인 가운데서도 노골적인 반유대주의적 글이 나오고 있었다. 보르헤스가 민족의 순수성이나 혈통으로 인간을 나누는 사고를 비웃은 것은 단지 문학적인 장난이 아니었다. 실제 사회에서 벌어지던 논쟁에 대한 대응이었다.
이 경험은 그의 문학적 세계와도 묘하게 어울린다. 보르헤스의 글에는 하나의 순수한 전통이 잘 없다. 영어와 스페인어, 독일 철학과 이슬람 사상, 유대교와 북유럽 신화가 같은 작품 안에서 아무렇지 않게 만난다. 민족과 문화에 명확한 경계를 긋고 하나의 중심을 세우려는 시대에, 보르헤스는 오히려 경계가 섞이는 거대한 도서관을 만들었다.
┃ 세상 전체를 하나의 설명으로 묶으려는 시대
1930년대와 1940년대를 특징짓는 것은 독재정권의 등장만이 아니었다. 정치와 경제, 역사와 사회를 하나의 거대한 이론으로 설명하려는 욕망도 강했다.
파시즘은 국가와 민족을 중심에 놓았고, 나치즘은 인종을 역사와 사회의 핵심 원리로 삼았다. 소련의 공식 이념 역시 계급과 역사 발전의 법칙을 통해 사회 전체를 설명하려 했다. 이와는 성격이 다르지만, 자유주의와 시장경제를 옹호하는 사상 역시 개인의 자유와 시장을 사회질서를 이해하는 중요한 원리로 보았다. 서로 정치적 성격과 폭력의 정도가 전혀 다른 체계들이었지만, 인간이 세계를 몇 개의 핵심 원리로 설명하려 했다는 점에서는 비교해볼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느 체계가 옳았는지를 한꺼번에 같은 선상에서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 정책과 폭력의 정도, 정치적 책임은 각각 전혀 달랐다. 다만 당대 사람들이 ‘세계 전체를 하나의 원리로 읽을 수 있다’는 사고방식에 익숙해져 있었다는 점은 중요하다.
그래서 「틀뢴」의 철학자들이 세계의 모든 현상을 하나의 원리 아래 넣으려 하는 장면은 유난히 당대적이다. 보르헤스는 어떤 철학이 틀렸다고 하나씩 반박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의 원리를 끝까지 밀어붙였을 때 얼마나 아름답고 이상한 세계가 만들어지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바로 그 아름다움 때문에 사람이 체계를 의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문제를 남긴다.
┃ 백과사전과 도서관, 세계는 분류할 수 있다는 믿음
그 시대의 또 다른 특징은 엄청난 양의 지식을 분류하고 체계화하려는 욕망이었다. 19세기 이후 백과사전과 박물관, 도서관, 통계, 학문 분과는 세계의 사물과 지식을 이름 붙이고 정리하는 거대한 장치가 되었다.
보르헤스에게 이 문제는 추상적이지 않았다. 그는 실제 도서관에서 일했고 책을 분류하고 목록을 만드는 일을 했다. 어린 시절부터 백과사전을 좋아했으며, 1929년 문학상 상금으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제11판 중고 세트를 구입하기도 했다. 그의 자전적 회고를 보면 백과사전은 단지 작품을 위해 빌려온 장식이 아니라 실제 독서생활의 일부였다.
백과사전은 세계가 정리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장 눈에 보이게 보여주는 책이다. 세상을 항목으로 나누고 알파벳 순서로 배열하면, 무질서한 현실이 갑자기 손안에 들어오는 것처럼 보인다. 나라에는 이름이 있고, 사람에게는 생몰연도가 있으며, 철학과 과학에는 각각 항목이 있다.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만 알면 다시 찾아낼 수 있다.
그러나 그 질서는 인간이 만든 것이다. 어떤 항목을 만들지, 무엇을 하나의 범주로 묶을지, 무엇을 중요한 정보로 남길지는 누군가 선택한다. 그래서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이 백과사전의 사소한 차이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은 20세기 지식 문화와도 잘 맞는다. 세계를 설명하는 체계가 현실을 기록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현실로 인식할지까지 결정할 수 있다는 문제이다.
┃ 과학은 강해졌지만 ‘완전한 세계 설명’은 더 어려워졌다
20세기 초의 과학은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역설적으로 인간이 세계를 완전히 이해했다고 느끼기는 더 어려워졌다. 19세기의 고전물리학은 자연이 일정한 법칙에 따라 움직이며 충분한 정보를 알면 미래도 계산할 수 있다는 강한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20세기 초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 등장하면서 시간과 공간, 물질과 측정에 대한 기존의 직관이 흔들렸다.
수학과 논리학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수학 전체를 완벽한 공리 체계 위에 세우려는 시도가 이어졌지만, 체계가 어디까지 스스로의 완전성을 보장할 수 있는가는 다시 문제가 되었다. 철학에서는 언어가 현실을 그대로 비추는 투명한 창인지, 아니면 인간이 세계를 나누고 이해하기 위해 만든 틀인지가 점점 중요한 질문이 되었다.
보르헤스는 전문 과학자나 수학자는 아니었지만, 무한과 시간, 동일성, 인과관계처럼 당시 과학과 철학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지던 문제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다. 이와 함께 언어와 사물의 관계 역시 그의 작품에서 반복해서 탐구된다. 당시의 지적 세계는 한편으로 인간 지식에 대한 자신감이 극도로 높아진 시대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지식의 기초가 생각보다 불안정하다는 사실이 드러나던 시대였다.
틀뢴처럼 완벽하게 설계된 세계가 매혹적으로 보이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실제 세계는 점점 더 많이 알려질수록 오히려 복잡해졌지만, 인간이 처음부터 만든 세계라면 모든 것을 서로 맞물리게 만들 수 있다.
┃ 1943년, 군부가 다시 움직이고 페론이 등장했다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 발표로부터 세 해 뒤인 1943년, 아르헨티나에서는 다시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이 쿠데타는 1930년 이후 이어지던 보수정권을 무너뜨렸지만 민주주의를 회복한 사건은 아니었다. 새 군사정부에는 권위주의적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은 장교들이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아르헨티나의 제2차 세계대전 중립정책도 계속되었다.
이 군사정권 안에서 빠르게 떠오른 인물이 후안 도밍고 페론(Juan Domingo Perón)이었다. 페론은 노동행정을 담당하면서 기존 정부가 충분히 다루지 않았던 노동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노동자의 임금과 휴가, 사회보장, 노동조합의 권리를 확대하는 정책을 추진했고, 그 결과 도시 노동계층에서 강한 지지를 얻었다. 산업화로 노동자 수가 늘어나 있던 상황에서 그의 정책은 상당한 정치적 효과를 냈다.
이 때문에 페론주의를 단순히 유럽 파시즘의 복제품이라고 설명하면 역사적 현실을 놓치게 된다. 페론은 권위주의적 민족주의가 강했던 군사정부 안에서 부상했지만, 이후 노동계층을 핵심 정치 기반으로 확대하면서 기존 우익 민족주의 세력과 완전히 같은 정치 노선을 걷지는 않았다. 1946년 선거에서도 노동·사회문제를 포함한 새로운 정치질서를 요구하는 유권자의 지지가 중요하게 작용했다.
바로 여기서 보르헤스와 페론주의의 시선이 갈라진다.
┃ 보르헤스가 본 페론과 노동자들이 본 페론은 달랐다
페론을 지지한 노동자들에게 그는 기존 보수정치가 제대로 다루지 않던 요구를 들어준 정치인이었다. 노동조건 개선과 사회보장, 임금과 휴가 같은 문제는 추상적인 이념이 아니라 생활의 변화였다. 1946년 페론은 군사정권의 임명으로 대통령이 된 것이 아니라 선거에서 승리해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므로 그의 대중적 지지를 단순히 선동에 속은 군중으로 설명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보르헤스에게 페론은 전혀 다르게 보였다. 그는 페론의 정치에서 자신이 1930년대부터 싫어했던 권위주의적 민족주의와 대중동원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특히 국가가 하나의 정치적 언어를 요구하고 반대파를 압박한다고 보았으며, 그런 방식에 강한 거부감을 가졌다. 1945년 보르헤스는 다른 작가·예술가들과 함께 당시 군사정부의 친나치적 경향과 민주주의 훼손을 비판하는 선언에 서명했다.
보르헤스와 페론주의의 갈등을 제대로 보려면 어느 한쪽의 시선만 따르면 안 된다. 페론주의에는 노동자를 정치의 중심으로 끌어올린 측면이 있었고, 동시에 권력 집중과 반대파·언론·지식인에 대한 압박을 둘러싼 문제가 있었다. 보르헤스는 후자의 면을 극도로 민감하게 보았고, 결국 그 충돌은 그의 직업과 가족에게까지 이어졌다.
┃ 닭과 토끼, 권력은 한 작가의 자리를 바꿨다
1946년 페론이 대통령에 취임한 뒤 보르헤스에게 유명한 일이 일어난다. 당시 그는 미겔 카네 시립도서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보르헤스는 훗날 자신의 자전적 회고에서 어느 날 도서관 직원 자리에서 시장의 가금류와 토끼를 검사하는 직무로 ‘승진’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썼다. 그는 시청에 가서 왜 자신이 그런 자리에 선택되었는지 물었고, 담당자가 그가 전쟁 중 연합국 편을 들었던 사실을 언급했다고 회고했다. 다음 날 그는 사직서를 냈다.
이 일화는 보르헤스 자신의 회고에 크게 의존하기 때문에 세부를 그대로 국가 공식 기록처럼 다뤄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가 이 사건을 어떻게 기억했는지는 분명하다. 자신이 정치적 입장 때문에 모욕적인 방식으로 자리에서 밀려났다고 이해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건은 보르헤스에게 새로운 삶을 열어주기도 했다. 직장을 잃은 뒤 그는 영문학을 가르치고 대중강연을 시작했다. 본래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을 두려워했지만, 강연자로 활동하면서 작가로서의 명성도 넓어졌다. 권력이 그를 도서관 밖으로 밀어낸 일이 결과적으로는 그의 활동 범위를 넓힌 셈이다.
그러나 갈등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 어머니는 가택연금, 여동생은 감옥으로 갔다
보르헤스의 가족도 페론 정권에 반대했다. 그의 어머니 레오노르와 여동생 노라는 반페론 활동에 참여했고, 보르헤스의 훗날 회고에 따르면 어머니는 가택연금을 당했으며 여동생과 조카 한 명은 한 달 동안 감옥에 갇혔다. 보르헤스 자신에게도 형사가 붙어 감시했다고 한다. 그가 강연을 할 때 경찰이 찾아온 일도 있었다. 보르헤스는 한 문학단체에서 페르시아 수피즘을 강연하던 자리에서 경찰관이 자신의 말을 열심히 받아 적는 모습을 회고했다. 내용은 정치 선동과 거리가 멀었지만, 중요한 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이전에 누가 말하는지를 국가가 보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이 경험 뒤 보르헤스의 반페론 감정은 더욱 격렬해졌다. 그의 회고에는 페론과 정권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감이 드러난다. 따라서 보르헤스가 남긴 페론 시대의 증언은 중요한 1차 자료이지만 동시에 강한 정치적 반감이 담긴 개인의 기억이라는 점도 함께 봐야 한다. 바로 이 차이가 중요하다. 역사적 배경 글에서 보르헤스의 경험을 다룬다는 것은 그의 평가를 그대로 역사적 최종판정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가 왜 권력과 집단적 질서에 그렇게 민감해졌는가를 이해하는 자료로 읽는 편이 정확하다.
┃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는 페론을 보고 쓴 작품이 아니다
여기에서 시간 순서를 다시 잡아야 한다.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는 1940년에 이미 발표되었다. 페론이 군사정부 안에서 부상한 것은 1943년 이후이고 대통령이 된 것은 1946년이다. 따라서 페론 정권을 겪은 보르헤스가 그 경험을 바탕으로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를 썼다고 말하면 순서가 거꾸로 된다.
오히려 흥미로운 것은 그 반대이다. 보르헤스는 페론 이전부터 이미 민족주의와 파시즘, 반유대주의, 하나의 이념이 인간 전체를 설명하려는 방식에 불신을 품고 있었다.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에서 그 문제를 문학적으로 다룬 뒤, 몇 년 후 자기 나라의 정치에서 국가가 개인의 직업과 말, 가족의 행동까지 건드리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이 점 때문에 페론 시대는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의 ‘원인’이 아니라, 보르헤스가 이미 가지고 있던 문제의식을 더 선명하게 보여주는 후속 역사에 가깝다.
┃ 그런데 ‘1947년 후기’는 정말 1947년에 쓴 것이 아니었다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에는 ‘1947년 후기’라는 부분이 붙어 있다. 이 때문에 작품이 1947년에 다시 쓰이면서 전후 정치상황이 추가된 것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그 날짜 자체가 보르헤스의 장치였다. 작품은 1940년 『수르』에 처음 실릴 때부터 미래의 날짜인 ‘1947년 후기’를 포함하고 있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틀뢴이 현실을 잠식한 것처럼 기록한 것이다.
이 사실은 역사적으로 상당히 재미있다. 보르헤스는 전쟁이 어떻게 끝날지도 모르는 1940년에 이미 1947년의 화자를 만들어놓았다. 독자는 실제 미래의 역사를 읽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1940년 사람이 상상한 미래이다.
따라서 작품 후기의 세계를 전후 현실에 대한 사후평가라고만 읽으면 안 된다. 오히려 전쟁 한복판에서 보르헤스가 앞으로 몇 년 동안 세계가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가상으로 밀어붙인 것이다. 그리고 현실의 1940년대 역시 그의 상상 못지않게 크게 변했다. 전쟁은 끝났고 파시즘과 나치즘은 패배했으며, 아르헨티나에서는 페론주의라는 새로운 대중정치가 등장했다. 세계의 질서는 실제로 다시 짜이고 있었다.
┃ 왜 그 시대에는 ‘완벽한 세계’가 그렇게 매력적이었을까
1930년부터 1940년대 중반까지의 역사를 한꺼번에 놓으면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가 등장한 시대의 공기가 조금 보인다. 경제는 무너졌고 민주주의는 흔들렸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쿠데타와 부정선거가 이어졌고, 유럽에서는 파시즘과 나치즘이 성장했다. 정치 이념은 역사의 방향을 설명했고, 국가는 국민을 분류하고 조직했다. 과학은 세계를 놀랍도록 많이 설명했지만 동시에 세계가 이전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백과사전과 도서관은 지식을 끝없이 분류했지만, 어떤 분류도 세계 자체와 완전히 같을 수는 없었다.
이런 현실은 피곤하다. 예외가 많고 모순이 많으며, 무엇이 맞는지 한 번에 알 수 없다. 그때 완벽한 체계는 달콤해진다. 무엇이 어디에 속하는지 알려주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하며, 앞으로 무엇이 올지까지 알려주는 체계라면 현실보다 훨씬 이해하기 쉽다. 보르헤스가 두려워했던 것은 인간이 질서를 만든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었다. 인간은 질서 없이 살 수 없다. 언어도 분류이고, 도서관도 분류이며, 역사도 남은 자료를 배열해 만든 체계다.
문제는 인간이 자기가 만든 체계를 현실 그 자체라고 믿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 나가며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가 나온 1940년의 세계는 이상할 정도로 많은 질서가 서로 충돌하던 시대였다. 파시즘과 나치즘, 공산주의와 자유주의가 서로 다른 미래를 약속했고, 아르헨티나 안에서도 군부와 보수세력, 민족주의자와 반파시스트, 노동운동과 새로운 대중정치가 한 나라의 방향을 두고 싸우고 있었다.
보르헤스는 그 한가운데에서 특정한 정치 프로그램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프로그램을 만드는 인간의 습관 자체를 의심했다. 인간은 세계가 복잡할수록 그것을 하나의 이야기로 묶고 싶어 하고, 그 이야기가 정교할수록 안심한다. 그러나 역사는 그때마다 체계 밖에 남는 사람과 사건을 만들어냈다.
1930년 군부는 무너진 정치에 질서를 주겠다고 등장했고, 그 뒤에는 부정선거와 탄압이 이어졌다. 유럽의 전체주의 체제들은 민족과 역사에 완전한 질서를 부여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전쟁과 학살로 이어졌다. 몇 년 뒤 페론주의는 기존 보수질서에서 소외되었던 노동자를 정치의 중심으로 끌어올렸지만, 동시에 보르헤스 같은 반대자에게는 국가권력이 개인을 압박하는 체제로 보였다. 어느 한 체계도 현실 전체를 하나의 말로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런 시대에 보르헤스가 만들어낸 틀뢴은 현실과 정반대의 세계처럼 보인다. 처음부터 인간이 만들었으므로 모든 것이 설명될 수 있고, 언어와 철학과 학문이 하나의 질서 속에 놓인다. 그래서 매혹적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위험하다. 현실은 인간의 머릿속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므로 인간의 논리에 완전히 맞아떨어질 이유가 없다. 반대로 인간이 만든 세계는 인간이 원하는 만큼 정교하게 만들 수 있다. 사람은 어느 순간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 만든 체계를 넘어, 현실이 그 체계에 맞춰지기를 바라기 시작한다.
1940년의 보르헤스는 이미 그 유혹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몇 년 뒤 그는 자기 나라에서 국가가 한 사람의 자리를 바꾸고, 가족을 감시하고, 어떤 목소리를 허용할지 결정하는 광경까지 직접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의 역사적 배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쟁의 연도가 아니다. 혼란스러운 세계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쉽게 완전한 질서를 원하게 되는가, 그리고 그 질서가 현실보다 더 중요해지는 순간 무엇이 벌어지는가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