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모 / 우리가 읽은 것은 정말 작품일까
┃ 들어가며

세사르 아이라(César Aira)의 『바라모(Varamo)』는 한 번도 시를 써본 적 없는 말단 서기가 어느 날 밤 단 한 편의 시를 쓰고, 그 작품이 훗날 아방가르드의 ‘기원이자 정점’으로 평가받는 과정을 따라간다.
그런데 작품을 읽다 보면 걸작의 탄생보다 더 이상한 것이 눈에 들어온다. 바라모가 작품을 만들어내는 방식, 그 작품의 기원을 복원하는 비평, 그리고 이미 걸작이라고 알려진 작품을 읽는 독자의 태도가 서로 닮아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정말 작품을 창조하는 걸까. 무엇이 좋은 작품을 만들까. 우리는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고, 비평과 해설은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이번에는 『바라모』가 작품과 비평, 독서와 해석 사이에 던져놓은 질문들을 따라가 보려 한다.
┃ 작가는 정말 작품을 창조할까
- 바라모는 자신의 하루에서 얻은 기록과 사건, 말과 이미지를 이용해 「아기 예수의 노래」를 만든다. 이미 존재하던 재료를 선택하고 배열해 만든 작품도 ‘창조’라고 부를 수 있을까?
- 작가가 실제 경험이나 기억, 다른 작품에서 얻은 형식과 언어를 가져와 글을 쓴다면 창작에서 완전히 새로운 것은 무엇일까?
- 같은 재료를 사용하더라도 선택하고 배치하는 방식이 달라지면 전혀 다른 작품이 된다면, 창작의 핵심은 재료를 만드는 데 있을까 관계를 만드는 데 있을까?
- 작가가 처음부터 작품 전체를 알지 못한 채 쓰면서 의미를 발견해 나간다면, 작품을 만든 사람과 작품의 의미를 발견한 사람은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 창작이 무언가를 무에서 만들어내는 일이 아니라 흩어진 것을 선택하고 연결하는 일이라면, 작가와 편집자·해석자·독자의 경계는 어디에서 갈릴까?
┃ 무엇이 작품을 걸작으로 만들까
- 「아기 예수의 노래」가 아방가르드의 ‘기원이자 정점’이라는 평가를 받으려면 작품 안에서 무엇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할까?
- 좋은 이야기, 정교한 구조, 새로운 형식, 풍부한 은유, 문학적 장치 가운데 어떤 요소가 빠지면 좋은 작품이 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 여러 문학적 장치를 정교하게 갖춘 작품과 특별한 장치 없이 강한 경험을 남기는 작품을 같은 기준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 작품을 읽을 때 발견되는 의미가 많을수록 더 좋은 작품이라면, 독자가 얼마든지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는 텍스트는 어디까지 좋은 작품이 될 수 있을까?
- 걸작을 판정하는 기준 자체가 시대와 비평, 독자의 취향에 따라 달라진다면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어떤 작품을 오래 남길 가치가 있다고 판단할까?
┃ 우리는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 『바라모』의 장면들은 처음 읽을 때와 작품의 전체 구조를 알고 다시 읽을 때 전혀 다른 의미를 얻는다. 처음 읽었을 때 보지 못했던 의미는 원래 작품 안에 있었던 걸까?
- 이해되지 않는 문장을 만났을 때 앞뒤 맥락을 더 찾아야 하는지, 상징이나 구조를 의심해야 하는지, 그냥 실패한 문장이라고 판단해야 하는지는 무엇으로 결정할 수 있을까?
- 작품을 깊이 읽는 것과 작품에 없는 의미까지 끌어내는 것은 어디에서 갈라질까?
- 이미 알고 있는 이론이나 작가 정보가 작품을 더 잘 보게 해주는 동시에 다른 가능성을 가릴 수도 있다면, 독자는 자신의 해석틀을 어떻게 점검할 수 있을까?
- 작품을 이해한다는 것은 작가가 넣어둔 의미를 찾아내는 일일까, 텍스트가 허용하는 여러 가능성 가운데 자신의 읽기를 만들어내는 일일까?
┃ 비평은 무엇을 해야 할까
- 『바라모』의 비평가는 완성된 작품에서 출발해 그 작품이 탄생하기까지의 하루를 복원한다. 비평은 작품에 이미 있는 구조를 드러내는 데서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
- 작품에서 반복과 대비, 구조를 발견한 뒤 그것을 하나의 해석으로 연결할 때 어떤 근거가 있어야 그 연결을 설득력 있는 비평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 하나의 해석이 작품의 많은 부분을 설명해준다는 사실은 그 해석이 옳다는 근거가 될까, 아니면 너무 많은 것을 같은 방식으로 읽고 있다는 신호가 될 수도 있을까?
- 비평이 독자가 혼자 보지 못했던 것을 보여준다면 좋은 비평의 역할은 정답을 제시하는 데 있을까, 새로운 읽기의 가능성을 여는 데 있을까?
- 작품을 더 풍부하게 만드는 비평과 작품보다 더 그럴듯한 의미를 만들어 작품을 대신해 버리는 비평은 무엇으로 구별할 수 있을까?
┃ 비평과 해설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 「아기 예수의 노래」가 이미 걸작이라는 정보를 알고 읽는 것과 아무 정보 없이 읽는 것은 같은 작품을 읽는 경험이라고 할 수 있을까?
- 이해하지 못했던 작품을 해설을 읽은 뒤 이해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작품을 이해한 걸까 해설자의 해석을 이해한 걸까?
- 작품보다 해설이 훨씬 설득력 있고 아름답게 느껴진다면 그 의미를 작품의 성취로 보아야 할까, 해설자의 성취로 보아야 할까?
- 난해한 작품을 이해하지 못했을 때 독자의 부족함과 작품의 실패를 구분하려면 어떤 기준이 필요할까?
- 비평가와 문학사의 평가가 오랫동안 축적된 작품을 읽을 때, 우리는 그 명성을 모두 걷어낸 상태에서 작품 자체를 다시 판단할 수 있을까?
┃ 해석은 작품을 설명할까, 작품을 만들까
- 『바라모』에서는 작품이 먼저 있고 비평이 뒤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비평의 방식이 다시 그 작품을 ‘아방가르드’로 정의한다. 작품의 정체성은 어느 시점에 완성되는 걸까?
- 익명의 편지에서 여러 가능성 가운데 하나를 선택한 뒤 그것이 유일한 줄거리처럼 굳어지듯, 작품의 해석도 하나가 널리 받아들여지면 다른 가능성을 밀어낼 수 있을까?
- 하나의 작품이 특정한 방식으로 오랫동안 해석되면 이후의 독자는 작품을 읽는 동시에 그동안 축적된 해석까지 함께 읽게 되는 것은 아닐까?
- 작품을 둘러싼 비평과 연구가 계속 쌓이면서 작품의 의미가 확장된다면, 어느 순간부터 그 작품은 작가가 쓴 텍스트보다 훨씬 큰 것이 되는 걸까?
- 우리가 작품이라고 부르는 것은 종이에 적힌 텍스트일까, 아니면 그 텍스트와 함께 축적된 독서와 비평, 명성과 해석까지 포함한 것일까?
┃ 우리는 무엇을 읽고 있는 걸까
- 바라모가 실제로 어떻게 「아기 예수의 노래」를 썼는지 확인할 수 없는데도 서술자는 그의 생각과 하루를 하나의 필연적인 과정처럼 복원한다. 독자는 그 복원을 어디까지 사실처럼 받아들이게 될까?
- 결과가 이미 걸작으로 정해져 있을 때 그 이전의 사건들이 모두 걸작 탄생의 징후처럼 보인다면, 우리는 작품의 기원을 발견한 걸까 걸작에 어울리는 기원을 만들어낸 걸까?
- 해석이 작품에 의미를 더하고 그 의미가 다시 작품의 가치를 증명한다면, 작품의 가치와 해석은 어느 쪽이 먼저라고 말할 수 있을까?
- 작품을 읽으며 발견했다고 생각한 의미가 사실은 제목과 명성, 해설과 기대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라면 우리는 그 사실을 스스로 알아차릴 수 있을까?
- 독자가 작품을 해석하는 동안 자신도 작품이 만들어 놓은 구조 안에서 행동하고 있다면, 작품의 바깥에서 작품을 평가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 생각의 바깥
- 인간은 어떤 대상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걸까, 의미를 부여한 뒤 그것을 발견했다고 느끼는 걸까?
- 해석이 붙기 전 대상을 볼 수 없다면, 우리는 그 해석만으로 대상을 정의할 수 있는가?
- 어떤 대상에 대한 해석이 오래 축적되어 대상과 분리하기 어려워졌다면, 우리는 더 이상 대상과 해석을 따로 판단할 수 없는 것은 아닐까?
- 『바라모』를 세사르 아이라가 아니라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작가가 썼더라도, 우리는 지금처럼 이 작품을 해석하고 의미를 찾아냈을까?
┃ 마치며
『바라모』는 걸작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처럼 시작하지만, 끝까지 따라가면 오히려 걸작을 둘러싼 우리의 태도를 되묻게 한다. 작가는 흩어진 재료를 연결해 작품을 만들고, 비평가는 그 작품에서 의미와 기원을 복원하며, 독자는 이미 붙어 있는 명성과 해석을 통과해 작품을 읽는다. 그 과정에서 작품은 처음 쓰인 순간의 텍스트에 머물지 않고 계속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읽고 평가하는 것은 어디까지 작품 자체이고, 어디부터 작품을 둘러싼 해석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