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선 카탈로그 — 1,186척의 배 뒤에 숨은 그리스 신화 ① : 크레테
┃ 들어가며

『일리아스(Iliad)』 2권의 함선 카탈로그(Ship Catalogue)는 그리스 각지에서 트로이(Troy)로 모여든 군대와 지휘관, 도시와 함선의 수를 차례로 열거하는 긴 명단이다. 처음 읽으면 수많은 지명과 낯선 이름이 쉼 없이 이어지는 부분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이름들을 하나씩 거슬러 올라가 보면 함선 카탈로그는 단순한 병력 목록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
배 한 척 뒤에는 한 지역이 있고, 그 지역 뒤에는 왕가가 있으며, 그 왕가를 따라 몇 세대만 올라가도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신화들이 계속 나타난다. 프로메테우스(Prometheus)와 판도라(Pandora), 대홍수를 살아남은 데우칼리온(Deucalion)과 퓌라(Pyrrha), 미노스(Minos)와 미노타우로스(Minotaur), 테세우스(Theseus), 아르고호 원정(Argonautic Expedition), 헤라클레스(Heracles)와 수많은 영웅들의 이야기가 서로 독립된 신화가 아니라 여러 혈통과 혼인, 이동과 왕권을 통해 다시 하나의 전쟁으로 모여든다. 실제로 이 글의 출발점인 이아페토스(Iapetos)의 혈통만 따라가도 대홍수 이후 헬렌(Hellen)에게서 그리스인의 계보가 시작되고, 그의 아들들을 통해 여러 집단과 왕가가 갈라져 나온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일리아스』의 함선 목록을 처음부터 한 줄씩 해설하지 않는다. 먼저 그 배들이 어디에서 왔으며, 그 배를 이끄는 사람들은 누구의 후손이고, 그들의 왕가는 이전의 어떤 신화와 연결되어 있는지를 거꾸로 추적해 보려고 한다. 그러다 보면 따로 알고 있던 수많은 그리스 신화 사이에 빠져 있던 접속사가 하나씩 복원된다.
그 첫 번째 출발점은 인간의 계보를 멀리 티탄(Titan)의 시대까지 끌어올리는 이아페토스(Iapetos)의 가문이다. 여기에서 프로메테우스(Prometheus)와 에피메테우스(Epimetheus), 데우칼리온(Deucalion)과 퓌라(Pyrrha), 대홍수와 헬렌(Hellen)을 지나 도로스(Dorus)·크수토스(Xuthus)·아이올로스(Aeolus)의 세 갈래가 열리고, 그 가지들은 다시 그리스 각지의 왕가와 영웅들에게로 뻗어나간다. 그리고 그 긴 길의 한쪽 끝에서 마침내 이도메네우스(Idomeneus)와 메리오네스(Meriones)가 이끄는 크레테(Crete)의 80척이 바다에 모습을 드러낸다.
1,186척의 배를 하나씩 세기 전에, 먼저 그 배들이 어디에서 왔는지부터 따라가 보자.
┃ 이아페토스의 가문에서 시작된 인간의 계보

함선 카탈로그에 등장하는 그리스인들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예상보다 훨씬 먼 곳에 도착한다. 보이오티아라는 지역도, 그곳에서 트로이 전쟁에 참가한 영웅들도 아직 등장하지 않은 티탄의 시대이다. 그 출발점 가운데 하나가 우라노스와 가이아의 아들 이아페토스(Iapetos)이다. 이아페토스는 크로노스, 오케아노스, 코이오스 등과 같은 세대의 티탄이다. 이 가운데 오케아노스는 테튀스와 결합하여 수많은 강의 신과 오케아니스들을 낳았고, 이아페토스는 그 오케아니스 가운데 한 명과 결합한다.
헤시오도스의 전승에서는 그 여성이 클뤼메네(Klymene)이며, 다른 전승에서는 아시아(Asia)라고 전해진다. 이름은 다르지만 두 여성 모두 오케아노스의 딸이라는 점은 같다. 결국 이아페토스는 자신의 형제인 오케아노스의 딸과 결합한 셈이다. 그들에게서 태어난 아들이 아틀라스, 메노이티오스, 프로메테우스, 에피메테우스이다. 이 네 형제는 단순히 한 족보에 함께 적혀 있는 인물들이 아니다. 이상할 정도로 네 명 모두가 제우스가 세운 새로운 질서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충돌한다.
첫째 아틀라스(Atlas)는 티탄 세대의 패배 이후 하늘을 떠받치는 형벌을 받는다. 흔히 ‘지구를 들고 있는 아틀라스’라고 기억하지만 고대 신화에서 그가 떠받치는 것은 지구라기보다 하늘이다. 그는 세계의 서쪽 끝에서 하늘과 땅이 다시 맞닿지 못하도록 그 무게를 짊어진다. 그런데 아틀라스의 이야기는 이 형벌에서 끝나지 않는다. 수세대 뒤 헤라클레스가 헤스페리데스의 황금사과를 구하는 과업을 수행하면서 아틀라스를 찾아온다. 황금사과를 직접 얻기 어려웠던 헤라클레스는 아틀라스에게 사과를 가져오게 하고 그동안 자신이 대신 하늘을 떠받친다. 돌아온 아틀라스가 다시 그 짐을 맡기 싫어하자 헤라클레스는 잠시 어깨를 편하게 고쳐 메겠다며 아틀라스를 속여 하늘을 다시 넘긴 뒤 사과를 가지고 떠난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또 하나의 연결이 생긴다. 헤라클레스가 아틀라스를 찾아가기 전, 그는 카우카소스에 묶여 있던 프로메테우스를 만나 그를 해방한다. 프로메테우스는 헤라클레스에게 황금사과를 직접 따러 가지 말고 아틀라스를 이용하라고 조언한다. 즉 이아페토스의 두 아들인 아틀라스와 프로메테우스의 이야기가 수세대 뒤 헤라클레스의 과업에서 다시 만나는 것이다. 따로 배웠을 때는 ‘프로메테우스의 형벌’, ‘아틀라스의 형벌’, ‘헤라클레스의 황금사과’였던 세 신화가 사실 하나의 연결망 안에 놓여 있다. 둘째 메노이티오스(Menoitios)는 네 형제 가운데 가장 짧은 이야기를 가진다. 그러나 그 짧음 때문에 오히려 그의 역할이 분명하다. 그는 지나친 힘과 오만 때문에 제우스의 벼락을 맞아 에레보스 혹은 타르타로스로 떨어진다. 전승에 따라 티타노마키아에서 제우스에게 맞섰다가 제거된 존재로도 나타난다. 아틀라스가 패배의 짐을 영원히 짊어지고, 프로메테우스가 지혜로 제우스와 맞선다면, 메노이티오스는 힘으로 새로운 신들의 질서에 저항하다 제거되는 티탄적 힘을 보여준다.
셋째 프로메테우스(Prometheus)에 이르면 이야기는 인간 세계로 넘어온다. 그는 인간과 신 사이의 제물 분배에서 제우스를 속이고, 인간에게서 불을 빼앗은 제우스에게 맞서 다시 불을 훔쳐 인간에게 돌려준다. 그 결과 인간은 문명의 수단을 얻지만 프로메테우스는 카우카소스에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뜯기는 형벌을 받는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가 가진 것은 불만이 아니다. 그는 미래를 아는 자이기도 하다. 여기서 훗날 『일리아스』의 핵심으로 돌아오는 테티스(Thetis)의 신화가 연결된다. 테티스는 제우스와 포세이돈이 모두 원했던 여신이지만, 그녀가 아버지보다 위대한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예언이 알려지면서 두 신은 물러난다. 테티스는 결국 인간 펠레우스와 결혼하고, 그들 사이에서 아킬레우스가 태어난다. 이 예언을 누가 전달했는지는 전승에 따라 다르다. 어떤 전승에서는 테미스가 경고하며, 다른 계통에서는 프로메테우스가 그 비밀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중요한 것은 프로메테우스 신화가 인간에게 불을 준 사건에서 닫히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의 미래에 대한 지식은 테티스의 결혼 → 펠레우스 → 아킬레우스 → 트로이 전쟁으로 이어진다. 보이오티아인의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며 만난 프로메테우스에게서 이미 『일리아스』의 가장 중요한 영웅 가운데 한 명이 다시 등장하는 것이다.
넷째 에피메테우스(Epimetheus)의 이야기는 프로메테우스와 떼어놓을 수 없다.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에게서 불을 훔친 뒤, 제우스는 인간에게 또 다른 선물을 준비한다. 신들이 아름다움과 재능을 하나씩 더해 만든 최초의 여성 판도라(Pandora)이다. 프로메테우스는 동생에게 제우스가 주는 것은 무엇이든 받지 말라고 경고하지만, 에피메테우스는 판도라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판도라를 통해 인간의 삶에는 질병과 고통, 노동과 죽음의 문제가 들어온다. 따라서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의 이야기는 서로 반대편에 놓인 독립적인 신화가 아니다.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을 위해 제우스에게 도전했기 때문에 판도라가 만들어졌고, 판도라가 에피메테우스에게 보내지면서 그 싸움의 결과가 인간 세계에 들어온다. 판도라는 프로메테우스 이야기의 다음 사건이자, 에피메테우스 이야기의 시작점이다.
┃ 프로메테우스와 판도라의 혈통이 다시 만나다

그리고 이 두 형제의 이야기는 다음 세대에서 뜻밖의 방식으로 다시 합쳐진다. 프로메테우스에게는 데우칼리온(Deucalion)이라는 아들이 있었고, 에피메테우스와 판도라에게서는 퓌라(Pyrrha)가 태어났다.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가 형제였으므로 데우칼리온과 퓌라는 서로 사촌에 해당한다.
이 둘이 결혼한다. 족보만 놓고 보면 단순한 혼인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연결하면 이 결합은 조금 다르게 보인다. 한쪽에는 인간에게 불과 문명을 가져다준 프로메테우스의 혈통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그 일에 대한 제우스의 보복으로 인간에게 보내진 판도라의 혈통이 있다. 앞 세대에서 프로메테우스와 제우스의 충돌로 갈라졌던 두 이야기가 데우칼리온과 퓌라에게서 다시 하나의 혈통으로 합쳐지는 것이다.
제우스는 인간 세대를 멸하기 위해 거대한 홍수를 일으킨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는 아들 데우칼리온에게 미리 위험을 알려주고 살아남을 방법을 가르쳐준다. 데우칼리온은 퓌라와 함께 배에 올라 홍수를 피한다. 두 사람은 아홉 날 밤낮을 물 위에서 떠돌다가 살아남고, 물이 빠진 뒤 다시 인간이 생겨나기를 기원한다. 그들에게 내려온 지시는 자신의 어머니의 뼈를 등 뒤로 던지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어머니’는 모든 존재의 어머니인 가이아, 즉 땅이며 그 뼈는 돌을 뜻한다. 데우칼리온이 던진 돌에서는 남자들이, 퓌라가 던진 돌에서는 여자들이 생겨난다. 대홍수로 끊어진 인간 세계가 다시 이어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생겨난 사람들이 곧 헬렌인 것은 아니다. 돌에서 생겨난 사람들은 대홍수 이후 재생된 인간들이다. 데우칼리온과 퓌라에게는 그와 별도로 자신의 자녀들이 있었고,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이 헬렌(Hellen)이다.
┃대홍수의 생존자에게서 ‘그리스인’이 시작되다

헬렌은 그리스 민족 전체의 신화적 시조이다. 그의 이름에서 그리스인을 뜻하는 헬레네스(Hellenes)가 나온다. 즉 데우칼리온과 퓌라의 이야기는 단순한 그리스판 노아의 홍수로 끝나지 않는다. 대홍수 이후 다시 시작된 인간 세계에서 ‘그리스인’이라는 집단의 계보가 헬렌에게서 출발한다. 여기까지의 흐름을 한 번에 놓아보면 처음에는 따로 알고 있던 신화들이 하나의 긴 이야기로 이어진다.
우라노스와 가이아에게서 티탄 이아페토스가 태어나고, 이아페토스의 네 아들은 제우스의 새로운 질서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충돌한다. 아틀라스의 형벌은 훗날 헤라클레스의 황금사과 과업과 연결되고, 그 헤라클레스는 먼저 프로메테우스를 해방한다.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 준 대가는 판도라의 탄생으로 이어지고, 판도라는 에피메테우스와 결합한다. 그리고 프로메테우스의 아들 데우칼리온과 에피메테우스와 판도라의 딸 퓌라가 다시 결혼한다. 이 두 사람이 대홍수를 살아남아 인간 세계를 재건하고, 그들의 아들 헬렌에게서 다시 그리스인의 계보가 시작된다.
이아페토스 → 프로메테우스·에피메테우스 → 데우칼리온·퓌라 → 대홍수 → 헬렌. 족보만 보면 다섯 개의 이름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사이의 접속사를 복원하면 티탄과 제우스의 전쟁, 인간에게 주어진 불과 고통, 헤라클레스와 아킬레우스, 대홍수와 인간의 재생까지 한 줄 위에 놓인다.
이제 이 긴 계보는 대홍수 이후의 그리스 세계로 넘어간다. 데우칼리온과 퓌라에게서 태어난 헬렌(Hellen)은 님프 오르세이스(Orseis)와 결합한다. 오르세이스는 별도의 긴 신화를 가진 인물은 아니며, 주로 헬렌의 배우자이자 세 아들의 어머니로 전해진다. 이 둘에게서 도로스(Dorus), 크수토스(Xuthus), 아이올로스(Aeolus)가 태어난다. 여기서부터 하나였던 헬렌의 혈통은 여러 갈래로 나뉘며, 훗날 그리스 각 지역과 집단을 설명하는 큰 계보가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헬렌이라는 이름은 단순히 한 개인의 이름에 머물지 않는다. 전승에서는 그의 이름을 따라 사람들이 헬레네스(Hellenes)라 불리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의 ‘그리스인’으로 묶어 부르는 사람들을 신화는 먼저 헬렌이라는 공동의 조상 아래 놓은 뒤, 그의 아들들을 통해 다시 여러 집단으로 분화시킨다. 대홍수 뒤 다시 시작된 인간 세계가 이제 하나의 가족에서 여러 지역과 종족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첫째 도로스에게서는 도리아인의 계보가 시작된다. 도로스는 중부 그리스의 도리스와 연결되며, 그의 이름에서 도리아인(Dorians)이라는 집단명이 생겨난다. 훗날 도리아인은 펠로폰네소스까지 크게 확산되지만, 신화적 계보에서 도로스가 처음 연결되는 곳은 그보다 북쪽인 중부 그리스이다. 따라서 도로스의 혈통은 이후 함선 목록의 여러 지역을 살펴볼 때 다시 등장할 하나의 큰 갈래가 된다.
둘째 크수토스의 혈통은 다시 둘로 갈라진다. 크수토스는 아테나이 왕 에레크테우스의 딸 크레우사(Creusa)와 결합하고, 그 사이에서 아카이오스(Achaeus)와 이온(Ion)이 태어난다. 아카이오스의 이름에서는 아카이아인이, 이온의 이름에서는 이오니아인이 비롯된다. 헬렌에게서 시작된 하나의 혈통이 크수토스에게서 다시 두 갈래로 분리되어 펠로폰네소스의 아카이아와 아티카 및 이오니아 세계로 이어지는 것이다. 훗날 『일리아스』에서 그리스군 전체를 가리키는 이름 가운데 하나로 반복되는 ‘아카이오이’ 역시 이런 오래된 족보적 기억과 겹쳐 있다.
셋째 아이올로스는 테살리아와 연결된다. 그의 이름을 따라 그 지역 사람들이 아이올리아인(Aeolians)이라 불리게 되었고, 이 혈통은 이후 수많은 왕가와 신화로 갈라진다. 특히 아이올로스의 후손들은 테살리아에만 머물지 않는다. 여러 세대를 거치며 중부 그리스와 펠로폰네소스, 섬과 해안 지역으로 가지가 뻗어나가고, 그 과정에서 『일리아스』의 함선 목록에 등장하는 여러 집단과 왕가가 차례로 나타난다.
따라서 헬렌의 세 아들은 단순히 도리아인, 아카이아인, 이오니아인, 아이올리아인의 이름을 설명하기 위한 시조들이 아니다. 이 세 갈래는 이후 그리스 신화 전체를 따라갈 수 있는 가장 굵은 세 개의 계통이 된다. 함선 목록에서 보이오티아인, 아테나이인, 아르고스인, 미케네인, 필로스인, 테살리아의 여러 집단이 차례로 등장할 때마다 우리는 그들이 어디에서 갑자기 나타난 새로운 사람들이 아니라, 이보다 훨씬 앞에서 갈라져 나온 오래된 혈통의 한 가지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므로 함선 목록으로 바로 들어가기 전에 이 세 갈래를 조금 더 따라갈 필요가 있다. 도로스의 혈통은 어느 지점에서 함선 목록의 집단들과 만나는가. 크수토스에게서 갈라진 아카이오스와 이온의 계보는 아르고스와 미케네, 아테나이 같은 지역으로 어떻게 이어지는가. 그리고 아이올로스의 거대한 후손들은 어떻게 테살리아에서 갈라져 보이오티아와 여러 왕가를 만들어내는가. 각 혈통을 호메로스가 실제로 부르는 지역과 집단의 이름이 나타나는 지점까지 내려놓은 뒤에야 함선 목록을 제대로 시작할 수 있다.
┃ 첫째 도로스, 도리아인에서 크레테 왕가로

헬렌의 첫째 아들 도로스(Dorus)는 자신의 이름을 따라 도리아인이라는 집단을 남겼다. 아폴로도로스는 도로스가 펠로폰네소스 맞은편의 땅을 차지하고 그곳 사람들을 도리아인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도리아인은 이후 여러 지역으로 이동하며 자신들의 영역을 만들지만, 『일리아스』 2권의 함선 목록에서는 도리아인이라는 이름의 독립된 참전 집단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혈통의 이야기가 여기에서 끊기는 것은 아니다. 도로스에게서 시작된 계보는 트로이 전쟁의 바깥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디오도로스의 전승에서는 도로스의 아들 가운데 아이기미오스(Aegimius)가 도리아인의 왕이 된다. 아이기미오스에게는 뒤마스(Dymas)와 팜퓔로스(Pamphylus)라는 두 아들이 있었고, 훗날 헤라클레스의 아들 휠로스(Hyllus)가 이 집안에 들어온다. 이때부터 도로스에게서 시작된 도리아인의 혈통과 헤라클레스의 혈통이 연결된다. 뒤마스와 팜퓔로스, 휠로스의 이름은 훗날 도리아인의 세 부족인 뒤마네스, 팜퓔로이, 휠레이스의 기원을 설명하는 이름으로 남는다. 그리고 이 결합은 훨씬 뒤 헤라클레스의 후손들이 도리아인과 함께 펠로폰네소스로 돌아가는 ‘헤라클레이다이의 귀환’으로 이어진다.
도로스의 혈통은 또 다른 방향으로 크레테까지 뻗는다. 도로스의 아들 텍타모스는 아이올리아인과 펠라스고이 일부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크레테로 들어가 그곳의 왕이 되었다. 그가 왜 고향을 떠나 크레테로 향했는지는 전승에 자세히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디오도로스는 크레테에 여러 집단이 차례로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전하면서 텍타모스의 이동을 그 가운데 하나로 놓는다. 도로스에게서 시작된 혈통이 이때 처음 바다를 건너 크레테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크레테의 왕이 된 텍타모스는 크레테우스의 딸과 결혼해 아들 아스테리오스를 낳았다. 그리고 텍타모스가 다스리던 시기에 또 하나의 유명한 신화가 크레테로 들어온다. 제우스가 페니키아의 공주 에우로페를 황소 등에 태워 섬으로 데려온 것이다. 제우스와 에우로페 사이에서는 미노스와 라다만튀스, 사르페돈이 태어났다.
텍타모스가 죽은 뒤에는 그의 아들 아스테리오스가 크레테의 왕이 된다. 아스테리오스는 에우로페와 결혼했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에우로페가 제우스에게서 낳은 세 아들을 자신의 후계자로 받아들인다. 도로스에게서 시작된 크레테의 왕가가 여기에서 제우스와 에우로페의 혈통을 받아들이고, 이 결합으로 도로스에게서 시작된 크레테 왕가는 다음 세대의 미노스 왕가로 이어진다.
아스테리오스가 에우로페와 결혼하면서 도로스에게서 이어진 크레테 왕가는 제우스와 에우로페의 혈통을 받아들인다. 에우로페의 세 아들 가운데 이후 크레테의 왕권을 차지하는 사람은 미노스(Minos)이다. 그리고 미노스와 파시파에의 집안에서는 미노타우로스와 아리아드네, 파이드라의 이야기와 함께, 훗날 트로이 전쟁에 참가하는 이도메네우스와 메리오네스로 이어지는 또 다른 가지가 함께 갈라져 나온다.
미노스는 아스테리오스가 죽은 뒤 크레테의 왕권을 차지하려 한다. 그러나 그의 왕위 계승에는 경쟁자가 있었고, 미노스는 자신이 신들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라는 증거를 보이기 위해 포세이돈에게 바다에서 황소 한 마리를 보내달라고 기도한다. 그는 그 황소가 나타나면 다시 포세이돈에게 제물로 바치겠다고 약속했고, 실제로 바다에서 아름다운 황소가 올라온다. 이 기적으로 미노스는 왕권을 인정받지만, 막상 황소가 너무 아름답자 다른 소를 대신 제물로 바치고 포세이돈이 보낸 황소는 자신의 무리에 남겨둔다. 약속을 어긴 대가는 그의 집안으로 돌아온다. 포세이돈은 황소를 사납게 만들고, 미노스의 아내 파시파에(Pasiphae)가 그 황소에게 욕망을 품게 한다.
파시파에는 아테나이에서 추방되어 크레테에 머물고 있던 장인 다이달로스(Daedalus)의 도움을 받는다. 다이달로스는 속이 빈 나무 암소를 만들어 파시파에가 그 안에 들어가 황소에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 그 결과 파시파에는 황소의 머리를 가진 존재 아스테리오스, 곧 미노타우로스(Minotaur)를 낳는다. 미노스는 다시 다이달로스에게 복잡한 미궁 라비린토스를 만들게 하고 미노타우로스를 그 안에 가둔다. 따라서 미노타우로스의 탄생은 괴물 하나가 우연히 태어난 이야기가 아니라, 미노스가 왕권을 얻기 위해 포세이돈과 맺은 약속을 어긴 결과가 다시 자신의 왕가 안으로 들어온 사건이다.
이 미궁에 아테나이의 젊은이들이 보내지게 된 데에는 미노스의 아들 안드로게오스(Androgeus)의 죽음이 놓여 있다. 안드로게오스가 아테나이에서 죽자 미노스는 그 책임을 묻기 위해 아테나이와 전쟁을 벌이고, 결국 아테나이는 일정한 수의 젊은 남녀를 크레테로 보내 미노타우로스의 먹이가 되게 하는 조건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때 아테나이 왕 아이게우스의 아들 테세우스(Theseus)가 희생자들 가운데 들어가 크레테로 향한다. 따라서 앞에서 크수토스가 혼인으로 연결되었던 아테나이 왕가의 후대에서 나온 테세우스와, 도로스의 혈통이 들어간 크레테의 미노스 왕가가 여기에서 하나의 사건으로 맞물린다.
그리고 미노스의 딸 아리아드네(Ariadne)가 테세우스에게 마음을 품는다. 아리아드네는 다이달로스에게 미궁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을 알아낸 뒤 테세우스에게 실을 건네주고, 테세우스는 그 실을 입구에 묶은 채 미궁으로 들어가 미노타우로스를 죽인다. 그는 실을 따라 다시 밖으로 나와 아리아드네와 함께 크레테를 떠난다. 이후 낙소스에서 아리아드네와 테세우스의 길이 갈라지고, 아리아드네는 디오니소스와 연결된다. 이렇게 미노스 왕가의 한 딸은 테세우스의 미노타우로스 살해와 크레테 탈출을 가능하게 하며 다시 아테나이 신화와 디오니소스 신화에 접속한다.
또 다른 딸 파이드라(Phaedra)는 훗날 테세우스의 아내가 된다. 따라서 미노스 왕가와 테세우스의 관계는 아리아드네의 도움으로 끝나지 않는다. 테세우스는 미노스의 한 딸 아리아드네와 함께 크레테를 탈출한 뒤, 다시 다른 딸 파이드라와 결혼한다. 파이드라는 테세우스가 아마존 힙폴뤼테 혹은 안티오페에게서 낳은 아들 힙폴뤼토스(Hippolytus)를 사랑하게 되고, 거절당한 뒤 그가 자신을 범하려 했다고 모함한다. 그 결과 테세우스는 아들을 저주하고, 힙폴뤼토스는 죽음에 이른다. 미노스의 딸들을 따라가면 크레테의 미궁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아테나이 왕가 내부의 비극까지 계속 이어지는 셈이다.
하지만 미노스의 자식 가운데 이 글에서 가장 중요한 가지는 트로이 전쟁의 함선까지 직접 내려가는 혈통이다. 미노스의 아들 데우칼리온은 크레테 왕통을 이어가고, 그의 아들이 바로 이도메네우스(Idomeneus)이다. 이 데우칼리온은 앞에서 대홍수를 살아남았던 프로메테우스의 아들 데우칼리온과는 다른 인물이다. 한편 미노스의 다른 아들 몰로스(Molus)에게서는 메리오네스(Meriones)가 태어난다. 따라서 미노스의 집안에서 갈라진 두 가지가 트로이 전쟁 세대에 이르러 이도메네우스와 메리오네스라는 두 지휘관으로 다시 만난다. 아폴로도로스 역시 미노스에게 데우칼리온을 비롯한 여러 아들과 아리아드네·파이드라 등의 딸이 있었다고 전한다.
『일리아스』 2권에서 이도메네우스와 메리오네스는 크노소스, 고르튀스, 뤽토스, 밀레토스, 뤼카스토스, 파이스토스, 뤼티온을 비롯한 크레테의 여러 도시를 이끌고 트로이 원정에 참가한다. 호메로스가 이들에게 배정한 함선은 80척이다. 그러므로 헬렌의 첫째 아들 도로스에게서 시작한 이 가지는 텍타모스와 아스테리오스를 거쳐 제우스와 에우로페의 혈통을 받아들이고, 미노스 왕가에서는 한쪽으로 미노타우로스·다이달로스·아리아드네·테세우스의 이야기와 연결되며 다른 한쪽으로 데우칼리온과 몰로스를 지나 이도메네우스·메리오네스의 크레테 80척까지 내려온다.
┃ 결론
『일리아스』 2권의 함선 카탈로그를 읽기 위해 시작한 이야기는 뜻밖에도 트로이 전쟁보다 훨씬 이전인 티탄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이아페토스(Iapetos)의 아들 프로메테우스(Prometheus)와 에피메테우스(Epimetheus)에게서 갈라졌던 이야기는 데우칼리온(Deucalion)과 퓌라(Pyrrha)의 결혼으로 다시 만나고, 대홍수를 살아남은 두 사람에게서 헬렌(Hellen)이 태어난다. 그리고 헬렌의 세 아들 도로스(Dorus)·크수토스(Xuthus)·아이올로스(Aeolus)를 통해 하나였던 그리스인의 계보는 여러 집단과 왕가로 갈라지기 시작한다.
이 계보를 따라가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 신화의 수많은 이야기가 생각보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프로메테우스와 판도라, 대홍수, 미노스와 미노타우로스, 테세우스 같은 익숙한 이야기는 각각 독립된 신화처럼 보이지만, 혈통과 혼인, 왕권의 이동을 따라가면 서로의 다음 장면이 되기도 한다. 이름만 적힌 족보에서는 보이지 않던 연결이 그 사이의 이야기를 복원하는 순간 하나의 긴 흐름으로 바뀐다.
그리고 첫 번째 가지인 도로스의 혈통은 마침내 크레테(Crete)에 도착한다. 도로스에서 시작된 왕가는 텍타모스와 아스테리오스를 지나 제우스와 에우로페의 혈통을 받아들이고, 미노스(Minos)의 집안에서 다시 여러 신화로 갈라진다. 한쪽에서는 미노타우로스와 아리아드네, 테세우스의 이야기가 이어지고, 다른 한쪽에서는 미노스의 아들 데우칼리온과 몰로스를 거쳐 이도메네우스(Idomeneus)와 메리오네스(Meriones)가 등장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일리아스』 2권에서 크레테의 여러 도시를 이끌고 80척의 함선과 함께 트로이로 향한다.
처음에는 1,186척이라는 거대한 숫자로만 보였던 함선 카탈로그의 배 한 척 한 척에도 결국 이런 오래된 이야기가 실려 있다. 함선 목록은 갑자기 등장한 지역과 영웅들의 명단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갈라지고 이동하고 다시 만났던 그리스 신화의 여러 혈통이 트로이 전쟁이라는 한 장소에 집결하는 장면에 가깝다.
첫 번째 가지에서 크레테의 80척까지 도착했다. 이제 다음 편에서는 헬렌의 둘째 아들 크수토스(Xuthus)에게서 갈라진 아카이오스(Achaeus)와 이온(Ion)의 혈통을 따라가며, 아카이아인과 이오니아인의 이동이 어떻게 펠로폰네소스와 아테나이, 그리고 다시 『일리아스』의 함선들로 이어지는지 살펴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