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브는 그 너머에 머문다 / 필립 K. 딕 / 권력은 어떻게 획득되는가
┃ 도서 정보

| 제목 | 워브는 그 너머에 머문다 |
| 저자 | 필립 K. 딕 |
| 번역가 | 조호근 |
| 출판사 / 시리즈 | 폴라북스 |
| 출간일 | 2015.07.30 |
| 페이지 | 13p |
| 장르 | SF문학 |
| 국가 | 미국 |
| ISBN | 9788993094992 |
| Original Title | Beyond Lies The Wub |
| Original Author | Philip K. Dick |
| Original Date | 1952 |
┃ 들어가며
「워브는 그 너머에 머문다」는 폴라북스에서 출간한 필립 K. 딕의 단편집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실린 첫 번째 이야기이다. 작품은 ‘권력은 어떻게 획득되는가’라는 질문을 우주 돼지 워브를 통해 보여준다. 단순히 낮은 지위에 있던 자가 권력을 얻은 뒤 변질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워브는 상대의 정신을 읽고, 그가 믿는 가치와 언어를 이용해 자신을 보호하며, 끝내 육체와 지위까지 차지한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서 워브의 무해함은 본성이 아니라 전략이다. 가장 약해 보이는 존재가 어떻게 타인의 언어를 빌려 권력의 중심으로 이동하는지, 그리고 권력을 얻은 순간 왜 더 이상 자신의 가면을 유지하지 않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 작가 소개
필립 K. 딕(Philip K. Dick, 1928~1982)은 현실과 인간의 정체성, 권력, 기억, 인식의 불확실성을 탐구한 미국의 SF 작가이다. 초기에는 잡지에 단편을 발표하며 활동했고, 이후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유빅』, 『높은 성의 사나이』, 『흘러라 내 눈물, 경관은 말했다』 등을 통해 현대 SF를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 잡았다. 그의 작품은 인간과 기계, 현실과 환상, 진실과 조작의 경계를 끊임없이 흔들며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유명하다. 「워브는 그 너머에 머문다」 역시 단순한 외계 생명체 이야기가 아니라, 언어와 권력, 그리고 인간의 심리가 어떻게 이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초기 단편이다.
┃ 줄거리
화성에서 임무를 마친 우주선 승무원들은 현지인에게서 거대한 돼지처럼 생긴 외계 생명체 워브를 사들인다. 선장 프랑코는 워브를 식량으로 여기지만, 승무원 피터슨은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고 철학과 신화를 이야기하는 워브에게 관심을 갖는다. 워브는 자신이 평화롭고 채식주의적인 종족이라고 주장하며, 민주주의와 도덕, 오디세우스 이야기를 꺼내 피터슨과 대화를 이어간다. 그러나 워브를 바라보는 피터슨과 프랑코의 태도는 끝내 충돌하고, 우주선 안의 긴장은 점점 커진다.
┃ 작품 해석
필립 K. 딕의 단편 소설 「워브는 그 너머에 머문다」에는 제목에서부터 작가의 교묘한 미스디렉션이 작동한다. 그 장치는 바로 주인공의 이름인 ‘워브(Wub)’이다. Wub은 사전에 존재하는 영어 단어가 아니다. 그러나 둔탁하면서도 부드러운 음성적 어감은 커다랗고 온순한 생물이 내는 소리처럼 들리며, 아기가 ‘I love you’를 혀 짧게 발음하는 소리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 낯설고 귀여운 이름은 워브를 순진하고 무해한 존재처럼 받아들이게 만든다. 즉, ‘워브’라는 이름 자체가 독자의 경계를 풀고 이 생물이 전혀 위협적이지 않다고 믿게 만드는 심리적 장치인 셈이다.
하지만 워브는 결코 무해한 존재가 아니다. 작품이 시작되자마자 독자는 ‘우주 돼지’라는 외형과 귀여운 이름 때문에 워브를 자연스럽게 약자의 위치에 놓는다. 우주선을 지배하는 것은 무장한 선원들이고, 워브는 그들에게 잡혀 식탁에 오를 처지의 가축처럼 보인다. 독자는 처음부터 워브를 동정하고, 그가 위험한 존재일 가능성은 거의 의심하지 않는다. 이처럼 독자가 워브를 믿게 되는 과정은 작품 속 인물들이 그에게 경계를 푸는 과정과 겹친다. 필립 K. 딕은 이름과 외형을 통해 워브를 보호받아야 할 존재처럼 제시하지만, 그 무해함은 곧 상대의 내면으로 진입하기 위한 가면이었음이 드러난다.
그러나 초반의 인상은 워브와 프랑코 선장의 대화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금이 가기 시작한다. 워브는 인간의 언어인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자신이 상대의 ‘의미론적 집합체(semantic warehouse)’를 탐구할 수 있다고 밝힌다. 이는 단순히 언어를 빠르게 학습하는 능력이 아니다. 워브는 상대의 정신 속에 축적된 단어와 개념뿐 아니라 가치관과 사고방식까지 읽어내고, 이를 자신의 생존과 목적을 위해 이용한다. 그가 영어를 말할 수 있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 어떤 언어를 사용해야 하는지를 이미 알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대 종족의 민주주의 원칙을 생각하며, 모두 함께 제비를 뽑는 등의 해결책이 더 합당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어쨌든 민주주의는 바로 이런 경우에 처한 소수의 집단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아니오.“
― 필립 K. 딕, 『마이너리티 리포트』, 폴라북스, p.15
워브는 프랑코의 정신에서 민주주의와 문명, 도덕이라는 언어를 끌어와 그의 심리를 조정한다. 자신이 믿는 가치를 정직하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자가 거부하기 어려운 가치와 논리를 훔쳐 자신의 생존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워브의 대화는 단순한 설득이 아니다. 상대의 사고 체계를 먼저 파악한 뒤, 그 체계 안에서 가장 효과적인 말을 골라내는 심리적 지배에 가깝다. 가장 무해해 보였던 존재는 사실 가장 먼저 상대의 사고방식을 분석하고 있었으며, 독자가 느꼈던 안도감 역시 작가가 의도한 미스디렉션이었음이 드러난다.
워브가 상대에 따라 언어를 바꾼다는 사실은 피터슨과의 대화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프랑코 선장에게는 그의 가치관에 맞는 논리를 사용했던 워브가, 피터슨에게는 오디세우스와 신화의 이야기를 꺼낸다. 워브가 처음부터 오디세우스에 특별한 관심을 가진 존재라기보다, 피터슨의 지적 호기심과 사고방식에 맞는 언어를 선택했다고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 그는 상대가 무엇에 관심을 가지며 어떤 이야기에 마음을 여는지 파악한 뒤, 그에 맞는 주제를 제시한다.
피터슨에게 오디세우스 이야기를 건넨 목적은 단순히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워브는 신화와 철학을 함께 논할 수 있는 존재로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피터슨이 자신을 가축이나 식량이 아닌 지적 생명체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그 결과 피터슨은 워브에게 호의를 보이는 수준을 넘어 그를 이해하고 보호하려는 우군이 된다. 워브의 철학적 대화는 순수한 지적 교류라기보다 상대의 관심과 욕망을 읽고 자신에게 필요한 관계를 만들어 내는 포섭의 과정에 가깝다. 워브는 자신의 언어로 상대를 설득하지 않는다. 상대의 언어를 먼저 훔친 뒤, 그 언어로 경계심을 낮추고 자신에게 유리한 역할을 맡긴다.
그러나 이처럼 상대의 심리를 이용한 언어적 회유가 실패하자, 워브는 더 이상 설득을 이어 가지 않는다. 그는 곧바로 프랑코 선장의 몸을 마비시키며 물리적 강제력을 행사한다. 이는 워브의 철학적 언어가 평화주의나 도덕적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한 첫 번째 수단이었음을 보여준다. 말로 상대를 움직일 수 있을 때는 설득을 택하지만, 그 방법이 통하지 않으면 곧바로 상대의 선택 능력 자체를 제거하는 것이다.
이 장면에서 워브의 지배는 언어와 정신의 영역을 넘어 육체로 확장된다. 그는 상대의 사고 체계 안으로 들어가 심리를 조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필요할 경우 몸의 자유까지 빼앗는다. 따라서 프랑코의 마비는 뒤이어 벌어질 육체 탈취와 단절된 돌발 행동이 아니다. 상대의 언어를 훔쳐 정신을 장악하고, 정신적 지배가 실패하자 육체를 통제한 뒤, 끝내 그 육체와 지위까지 차지하는 일련의 과정이 권력 획득의 구조로 그려진다.
“아무래도 아주 즐거은 식사 시간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겠군. 내가 지금까지 들었던 보고는 모두 사실이었어. 워브의 맛에 대한 이야기 말이지. 아주 훌륭해. 하지만 과거에는 이런 맛을 즐길 도리가 없었으니까.“
― 필립 K. 딕, 『마이너리티 리포트』, 폴라북스, p.20
워브의 마지막 목표는 단순히 프랑코의 몸을 차지하는 데 있지 않다. 그가 빼앗는 것은 육체와 함께 선장의 지위, 그리고 그 지위가 가진 권력이다. 선장의 몸으로 깨어난 워브는 더 이상 설득도 위장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미 배의 권한을 손에 넣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는 프랑코의 몸을 차지한 채 식탁에 오른 자신의 옛 육체를 맛있게 먹는다. 처음에는 인간에게 잡아먹힐 처지였던 존재가 이제는 인간의 몸과 입을 빌려 자신이 버린 육체를 먹는 것이다. 이 장면에서 포식자와 먹잇감의 위치는 완전히 뒤집힌다. 프랑코는 워브의 몸을 먹으려 했지만, 결국 워브가 프랑코의 몸을 차지한 채 그 식사를 완성한다. 초반 내내 가장 약하고 보호받아야 할 존재처럼 보였던 워브는 선장의 육체와 지위뿐 아니라 포식자의 자리까지 빼앗으며 공동체의 최상위 권력에 오른다.
이 순간 피터슨에게 건넸던 오디세우스 이야기 역시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워브는 오디세우스 이야기를 통해 자신을 신화와 철학을 논할 수 있는 지적인 존재로 드러내며 피터슨의 신뢰를 얻었다. 그러나 선장의 몸과 권력을 차지한 뒤에는 더 이상 그러한 언어나 위장이 필요하지 않다. 처음에는 철학과 신화, 민주주의와 도덕의 언어를 빌려 가장 평화롭고 문명화된 존재처럼 행동했지만, 목적을 이루는 순간 그 가면은 벗겨진다. 권력을 획득한 워브는 더 이상 설득하는 존재가 아니라 지배하는 존재가 된다. 처음의 무해함과 마지막의 노골적인 지배를 연결하는 무기는 바로 언어였다.
┃ 결론
필립 K. 딕은 워브를 통해 권력이 단순히 힘이 강한 자의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권력은 상대를 먼저 이해하는 데서 시작된다. 상대가 믿는 가치와 언어를 읽고, 그 언어를 이용해 신뢰를 얻으며, 필요할 때는 물리력을 행사하고, 끝내 그 육체와 지위까지 차지하는 과정이 하나의 권력 획득 과정으로 그려진다. 워브는 인간의 몸과 권력만 빼앗은 것이 아니다. 자신을 먹으려 했던 포식자의 자리를 차지한 뒤, 그 몸으로 자신의 옛 육체를 먹으며 포식자와 먹잇감의 관계마저 뒤집는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 가장 무서운 능력은 상대를 압도하는 힘이 아니라, 상대의 정신 속으로 들어가 그의 언어와 욕망을 자신의 무기로 바꾸는 능력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워브가 반복해서 언급하는 오디세우스 역시 단순한 신화적 인용이 아니다. 오디세우스가 지혜와 언어로 위기를 극복하는 영웅이라면, 워브는 그 지혜를 타인을 지배하는 기술로 뒤틀어 사용한다. 그는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 언어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지배하기 위해 언어를 훔친다. 그리고 자신의 육체가 식탁 위에서 사라진 뒤에도 워브는 끝나지 않는다. 그는 프랑코의 몸과 언어, 지위와 권력 속으로 이동해 이전의 자신을 넘어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