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선 카탈로그 — 1,186척의 배 뒤에 숨은 그리스 신화 ⑩ : 미케네 part2 둘리키온, 엘리스

┃ 들어가며

『일리아스』 함선 카탈로그 연재를 상징하는 고대 그리스 함선 일러스트

앞에서는 아크리시오스(Acrisius)의 신탁에서 출발해 페르세우스(Perseus)미케네(Mycenae)를 요새화하고, 그의 후손들에게서 미케네 왕권과 헤라클레스(Heracles)의 운명이 갈라지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같은 페르세우스 왕가의 후손이지만 에우뤼스테우스(Eurystheus)는 왕좌에 앉았고, 헤라클레스는 그의 명령을 받아 성문 밖으로 나가 괴물들과 싸워야 했다.

첫 번째 과업에서 헤라클레스는 무기가 통하지 않는 네메아의 사자(Nemean Lion)를 맨손으로 죽였다. 두 번째 과업에서는 조카 이올라오스(Iolaus)와 힘을 합쳐 잘린 머리가 다시 자라나는 레르나의 히드라(Lernaean Hydra)를 쓰러뜨렸다. 그러나 이올라오스의 도움을 받았다는 이유로 두 번째 과업은 인정되지 않았고, 히드라의 독만이 헤라클레스의 화살에 남아 이후의 이야기들을 따라간다.

이제 에우뤼스테우스의 명령은 아르카디아(Arcadia)의 산악 지대로 향한다. 세 번째와 네 번째 과업에서 헤라클레스는 죽여야 할 괴물이 아니라 산 채로 붙잡아야 하는 두 동물과 마주한다. 하나는 아르테미스(Artemis)에게 속한 케뤼네이아의 암사슴(Ceryneian Hind)이고, 다른 하나는 산에서 내려와 주변을 황폐하게 만들던 에리만토스의 멧돼지(Erymanthian Boar)이다. 하나는 신성한 동물이기 때문에 다치게 해서는 안 되고, 다른 하나는 깊은 눈과 산악 지형을 이용해 제압해야 한다.

그러나 멧돼지를 잡으러 가는 길에 이야기는 크게 옆으로 갈라진다. 폴로에(Pholoe)에서 헤라클레스가 연 포도주 항아리 때문에 싸움이 벌어지고, 레르나에서 얻은 히드라의 독화살이 벌써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이 싸움은 케이론(Chiron)과 폴로스의 죽음, 살아남은 네소스(Nessus), 그리고 훗날 헤라클레스 자신의 마지막까지 이어지는 긴 결과를 만든다.

이번 글이 함선 카탈로그와 직접 만나는 곳은 다섯 번째 과업의 무대인 엘리스(Elis)이다. 헤라클레스가 엘리스 왕 아우게이아스(Augeas)의 외양간을 청소하고도 약속한 보수를 받지 못하면서 왕가 내부의 갈등이 시작된다. 아우게이아스의 아들 퓔레우스(Phyleus)는 헤라클레스의 편에서 사실을 증언했다가 둘리키온(Dulichium)으로 추방되고, 그의 아들 메게스(Meges)는 그곳에서 40척을 이끌게 된다. 반면 엘리스에 남은 왕가와 동맹 가문에서도 네 명의 지휘관이 각각 10척씩, 모두 40척을 이끌고 출항한다.

이번 글에서는 인정받지 못한 두 번째 과업의 결과에서 출발해 케뤼네이아의 암사슴과 에리만토스의 멧돼지, 폴로에의 켄타우로스들을 차례로 따라간다. 이어 아우게이아스의 외양간을 둘러싼 약속과 배신, 헤라클레스와 엘리스의 전쟁을 살펴보고, 그 사건에서 갈라진 두 왕가가 어떻게 둘리키온 40척과 엘리스 40척으로 이어지는지 확인해 보자.


┃ 인정받지 못한 두 번째 과업

곤봉을 든 헤라클레스가 레르나의 다머리 히드라와 싸우는 안토니오 델 폴라이올로의 회화
헤라클레스와 히드라(Hercules and the Hydra), 안토니오 델 폴라이올로(Antonio del Pollaiuolo), 1475년경, 출처 : Wikimedia Commons

히드라를 쓰러뜨린 헤라클레스는 다시 에우뤼스테우스에게 돌아갔지만 이번 과업은 그대로 인정되지 않았다. 에우뤼스테우스는 헤라클레스가 자신의 힘만으로 히드라를 죽인 것이 아니라 이올라오스의 도움을 받았다는 이유로 이 과업을 열 개 가운데 하나로 계산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열 개였던 헤라클레스의 과업이 뒤에 열두 개로 늘어나게 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두 번째 과업이었다.

그렇다고 레르나에서 얻은 결과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히드라의 몸은 죽었지만 그 독은 헤라클레스의 화살에 남았다. 이후 이 독화살은 다시 여러 신화 속 인물들에게 향하게 되며, 헤라클레스 자신의 마지막과도 연결되는 긴 결과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레르나의 히드라는 두 번째 과업에서 제거되고 끝나는 괴물이 아니라, 죽은 뒤에도 자신의 독을 헤라클레스의 무기 안에 남겨 이후의 이야기로 계속 따라가는 존재가 된다.

그리고 헤라클레스가 레르나에서 과업을 마치자, 에우뤼스테우스가 다음으로 명령한 것은 괴물을 죽이는 일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아르테미스에게 속한 케뤼네이아의 암사슴(Ceryneian Hind)을 산 채로 붙잡아 오라는 명령이었다. 네메아와 레르나에서는 괴물을 죽였지만, 세 번째 과업에서는 죽여서는 안 되는 신성한 동물을 상대해야 했다.

케뤼네이아의 암사슴은 타위게테(Taygete)에 의해 아르테미스에게 봉헌되었다. 타위게테는 아틀라스(Atlas)플레이오네(Pleione)의 딸들인 플레이아데스(Pleiades)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제우스와의 사이에서 라케다이몬(Lacedaemon)을 낳은 인물이기도 하다. 라케다이몬은 훗날 스파르테와 라케다이몬 왕가의 계보로 이어지므로, 헤라클레스가 쫓는 한 마리의 사슴에도 이미 펠로폰네소스의 다른 왕가와 연결되는 이름이 붙어 있는 셈이다.

아르테미스와 사슴의 연결 역시 이 과업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아르테미스는 산과 야생동물, 사냥을 관장하는 여신으로 반복해서 등장한다. 따라서 케뤼네이아의 암사슴은 단순히 값비싼 황금 뿔을 가진 희귀한 짐승이 아니라 아르테미스의 영역 안에 들어 있는 동물이었다. 헤라클레스가 함부로 죽이거나 다치게 할 경우 과업을 완수하더라도 다시 여신의 분노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 세 번째 과업, 케뤼네이아의 암사슴

케뤼네이아의 암사슴 위에 올라 황금 뿔을 붙잡은 헤라클레스를 묘사한 하인리히 알데그레버의 판화
헤라클레스와 암사슴(Hercules and the Hind), 하인리히 알데그레버(Heinrich Aldegrever), 1550년, 출처 : Wikimedia Commons

헤라클레스는 암사슴을 발견한 뒤 곧바로 무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아르테미스의 신성한 동물을 죽이거나 상처 입히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려 한 해 동안 계속 뒤를 쫓았다. 네메아의 사자는 동굴의 입구를 막고 맨손으로 목을 졸라 죽였고, 히드라는 이올라오스와 함께 머리를 잘라 불로 지지면서 쓰러뜨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같은 힘을 사용할 수 없었다. 아무리 오래 걸리더라도 살아 있는 상태 그대로 붙잡아야 했기 때문에 사슴이 지칠 때까지 추적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긴 추격 끝에 지친 암사슴은 아르테미시온산(Mount Artemisium)으로 피신한 뒤 다시 라돈강(Ladon River)으로 내려간다. 라돈은 아르카디아를 흐르는 강으로, 헤라클레스는 암사슴이 강을 건너려는 순간 마침내 활을 사용한다. 그러나 그의 목적은 사슴을 죽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사슴이 물을 건너기 직전에 활을 쏘아 움직임을 멈추게 한 뒤 붙잡았고, 살아 있는 사슴을 어깨에 메고 아르카디아를 지나 미케네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암사슴을 붙잡았다고 해서 과업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헤라클레스가 사슴을 메고 돌아가던 길에 아르테미스와 아폴론(Apollo)이 직접 나타난다. 아르테미스는 자신의 신성한 동물을 죽이려 했다고 생각하여 헤라클레스를 꾸짖고 사슴을 빼앗으려 했다. 헤라클레스는 자신이 원해서 한 일이 아니라 에우뤼스테우스의 명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수행하고 있는 과업이라고 설명하며 책임을 에우뤼스테우스에게 돌렸다. 결국 아르테미스의 분노가 가라앉으면서 헤라클레스는 암사슴을 그대로 미케네까지 데려갈 수 있게 된다.

이 장면은 앞의 두 과업과는 다른 방식으로 에우뤼스테우스와 헤라클레스의 관계를 보여준다. 네메아와 레르나에서는 에우뤼스테우스가 지정한 괴물을 제거하면 되었지만, 세 번째 과업에서는 왕의 명령과 신의 소유권이 직접 충돌한다. 헤라클레스가 아르테미스의 동물을 함부로 죽였다면 에우뤼스테우스의 요구를 완수할 수 없었고, 그대로 놓아주면 과업을 수행할 수도 없었다. 결국 그는 사슴을 살아 있는 채 붙잡은 뒤 여신에게 자신이 이 일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고 설명함으로써 두 요구 사이를 빠져나간다.

그렇게 헤라클레스는 한 해 동안 쫓아다닌 케뤼네이아의 암사슴을 마침내 산 채로 미케네에 가져왔다. 첫 번째 과업에서는 죽인 사자의 가죽을 가져왔고, 두 번째에서는 히드라 자체보다 그 죽음에서 얻은 독이 이후의 이야기로 남았다. 세 번째 과업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상대의 생명을 보존해야 했다. 에우뤼스테우스가 내린 명령은 같은 ‘포획’이나 ‘퇴치’의 반복이 아니라 매번 다른 조건을 가진 형태로 바뀌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과업에서 헤라클레스는 다시 산 채로 동물을 데려와야 한다. 이번에는 아르테미스의 신성한 암사슴보다 훨씬 사나운 에리만토스의 멧돼지(Erymanthian Boar)이다. 그런데 멧돼지를 만나기 전에 헤라클레스가 지나가는 폴로에(Pholoe)에서 이야기가 크게 옆으로 갈라진다. 그곳에서 켄타우로스 폴로스(Pholus)를 만나고, 술항아리 하나 때문에 켄타우로스들과 싸움이 벌어지면서 히드라의 독화살이 벌써 다시 튀어나온다.


┃ 멧돼지를 잡으러 가는 길에 만난 켄타우로스들

폴로스의 포도주를 둘러싸고 헤라클레스와 켄타우로스들이 뒤엉켜 싸우는 샤를 르브룅의 회화
켄타우로스들을 죽이는 헤라클레스(Hercules Slaying the Centaurs), 샤를 르브룅(Charles Le Brun), 1660년경, 출처 : Wikimedia Commons

에우뤼스테우스가 헤라클레스에게 내린 네 번째 과업은 에리만토스(Erymanthus)의 멧돼지를 산 채로 잡아 미케네로 가져오는 일이었다. 앞의 케뤼네이아 암사슴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상태로 붙잡아야 했다. 그러나 아르테미스에게 바쳐진 신성한 암사슴을 다치지 않게 쫓아야 했던 세 번째 과업과 달리, 에리만토스의 멧돼지는 산에서 내려와 프소피스(Psophis) 일대를 황폐하게 만들던 거대한 야생동물이었다.

에리만토스는 펠로폰네소스 북서부의 아르카디아와 아카이아 사이에 놓인 산악 지대였다. 에리만토스강은 람페이아산(Mount Lampeia)에서 발원하여 아르카디아를 지나 알페이오스강(Alpheus River)으로 흘러갔다. 이 강은 프소피스 가까이를 흐르고, 한쪽에는 폴로에산(Mount Pholoe)이 자리한다. 따라서 에리만토스의 멧돼지는 막연한 산속 괴수가 아니라 프소피스와 에리만토스강, 폴로에산이 이어지는 아르카디아 서북부의 산악 지대에서 활동하던 짐승이었다.

그러나 헤라클레스는 곧바로 에리만토스산에 올라 멧돼지를 쫓지 않았다. 그곳으로 향하는 길에 먼저 폴로에를 지나게 되었고, 여기에서 켄타우로스 폴로스를 만난다. 폴로스는 실레노스(Silenus)와 물푸레나무 님프 사이에서 태어난 켄타우로스였으며, 다른 켄타우로스들과 달리 헤라클레스를 자신의 동굴로 맞아들여 음식을 대접한다. 폴로스는 헤라클레스에게 익힌 고기를 내놓고 자신은 날고기를 먹었다. 문제는 식사 도중 헤라클레스가 포도주를 찾으면서 시작되었다.

폴로스에게는 켄타우로스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포도주 항아리가 있었다. 그는 이 항아리를 마음대로 열어도 되는지를 두려워했지만 헤라클레스는 걱정하지 말라며 직접 항아리를 열었다. 그러자 포도주의 향기가 퍼져나갔고, 냄새를 맡은 다른 켄타우로스들이 폴로스의 동굴로 몰려왔다. 그들은 돌과 전나무를 무기로 들고 있었으며, 안키오스(Anchius)아그리오스(Agrius)가 가장 먼저 동굴 안으로 들어오려 했다. 헤라클레스는 처음에는 불붙은 장작을 던져 이들을 몰아낸 뒤, 달아나는 켄타우로스들을 활로 쏘며 추격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바로 앞의 레르나에서 얻은 히드라의 독이 다시 등장한다. 헤라클레스의 화살에는 이미 히드라의 독이 묻어 있었으므로, 그 화살에 맞는 것은 단순한 상처로 끝나지 않았다. 달아난 켄타우로스들은 멀리 말레아(Malea)까지 도망쳤고, 그곳에서 케이론에게 몸을 숨겼다. 케이론 역시 켄타우로스였지만 다른 켄타우로스들과는 성격이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그는 의술과 음악, 사냥과 여러 기술에 능한 현자였으며 수많은 영웅들의 스승으로 등장한다. 특히 훗날 트로이 전쟁의 중심이 되는 아킬레우스(Achilles) 역시 케이론에게서 성장하며 교육받았으므로, 에리만토스의 멧돼지를 잡으러 가는 길에서 이미 다시 트로이 전쟁 세대의 계보와 연결될 인물이 나타나는 것이다.

헤라클레스가 달아나는 켄타우로스들을 향해 화살을 쏘던 중 한 발이 엘라토스(Elatus)의 팔을 관통한 뒤 케이론의 무릎에 박혔다. 헤라클레스는 자신이 케이론을 맞혔다는 사실을 알고 곧바로 달려가 화살을 뽑고 치료하려 했다. 케이론 자신도 약을 만들어 상처에 사용했지만 히드라의 독이 들어간 상처는 치료할 수 없었다. 더 큰 문제는 케이론이 불사의 존재였다는 점이었다. 상처를 고칠 수도 없고 죽어서 고통에서 벗어날 수도 없었기 때문에 그는 지속되는 통증 속에 남게 된다. 이 사건은 다시 프로메테우스(Prometheus)의 이야기와 연결된다. 케이론이 죽음을 원했지만 불사 때문에 죽을 수 없자,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에게 자신이 케이론 대신 불사의 운명을 받는 방식으로 교환이 이루어지고 케이론은 마침내 죽을 수 있게 된다. 따라서 헤라클레스가 멧돼지를 잡으러 가다가 우연히 벌인 켄타우로스들과의 싸움은 케이론의 죽음과 프로메테우스의 운명까지 이어지는 또 하나의 가지를 만든다.

달아난 켄타우로스들도 여기에서 모두 사라지지 않는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말레아로 도망갔고, 에우뤼티온(Eurytion)은 폴로에로, 네소스는 에우에노스강(Evenus River)으로 갔다. 이 가운데 네소스는 훗날 헤라클레스 자신의 죽음과 연결되는 중요한 인물로 다시 등장한다. 따라서 레르나에서 만들어진 히드라의 독화살이 케이론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힌 사건과, 이 싸움에서 살아남은 네소스가 훗날 헤라클레스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사건은 서로 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같은 폴로에의 싸움에서 갈라져 나간 두 가지이다.


┃ 네 번째 과업, 에리만토스의 멧돼지

에리만토스의 멧돼지를 메고 온 헤라클레스와 항아리 안으로 숨는 에우뤼스테우스를 그린 고대 그리스 흑회식 암포라
헤라클레스, 에우뤼스테우스와 에리만토스의 멧돼지(Herakles, Eurystheus and the Erymanthian Boar), 안티메네스 화가(Antimenes Painter), 기원전 525년경, 출처 : Wikimedia Commons

켄타우로스들을 쫓아낸 뒤 헤라클레스가 다시 폴로에로 돌아왔을 때에는 자신을 처음 맞아주었던 폴로스마저 죽어 있었다. 폴로스는 싸움이 끝난 뒤 죽은 켄타우로스의 몸에서 헤라클레스의 화살 하나를 뽑아 들고 살펴보다가, 이렇게 작은 화살이 어떻게 그토록 큰 켄타우로스를 죽일 수 있는지 놀라워했다. 그런데 손에서 미끄러진 화살이 그의 발에 떨어졌고, 화살촉에 묻어 있던 히드라의 독 때문에 폴로스는 그 자리에서 죽었다.

헤라클레스는 폴로스의 시신을 장사 지냈다. 폴로스의 이름은 그가 살던 폴로에산의 지명과도 연결된다. 이렇게 보면 두 번째 과업에서 히드라를 죽인 뒤 얻은 독은 벌써 네 번째 과업으로 넘어와 케이론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고 폴로스를 죽인다. 히드라는 레르나에서 이미 죽었지만 그 독은 헤라클레스의 활에 남아 다른 신화의 죽음을 계속 만들어내고 있었다.

폴로스를 장사한 뒤에야 헤라클레스는 원래의 목적인 에리만토스의 멧돼지를 찾아 나선다. 멧돼지는 에리만토스산에서 내려와 프소피스의 땅을 황폐하게 만들고 있었지만 에우뤼스테우스의 명령은 죽이라는 것이 아니라 산 채로 데려오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헤라클레스는 활이나 곤봉으로 짐승을 죽이지 않고 산속에서 계속 추격했다.

헤라클레스는 숲속에 숨어 있던 멧돼지를 큰 소리로 몰아내어 밖으로 나오게 한 뒤 계속 뒤쫓았다. 추격 끝에 지친 멧돼지가 깊은 눈 속으로 들어가자 움직임이 둔해졌고, 헤라클레스는 그 순간 짐승을 붙잡아 묶었다. 앞의 케뤼네이아 암사슴을 한 해 동안 추격해 지치게 만든 것과 비슷하게, 네 번째 과업에서도 힘으로 죽이는 대신 오랜 추격과 지형을 이용해 살아 있는 동물을 잡은 것이다.

헤라클레스는 그렇게 붙잡은 거대한 멧돼지를 산 채로 미케네까지 가져갔다. 후대 미술에서는 헤라클레스가 멧돼지를 어깨에 메고 나타나자 겁에 질린 에우뤼스테우스가 커다란 청동 항아리 속으로 숨어버리는 모습이 자주 그려진다. 에우뤼스테우스는 헤라클레스에게 위험한 짐승을 산 채로 가져오라고 명령했지만, 정작 그 명령을 수행해 실제 짐승을 가져온 헤라클레스를 마주하면 두려워하는 왕으로 묘사된 것이다.

이렇게 네 번째 과업은 에리만토스의 멧돼지를 붙잡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나 실제 이야기를 따라가면 멧돼지 사냥 자체보다 그곳으로 가는 길에서 벌어진 사건이 훨씬 길다. 폴로스의 술항아리에서 시작된 싸움은 켄타우로스들을 여러 지역으로 흩어놓았고, 히드라의 독은 케이론과 폴로스의 죽음으로 이어졌으며, 살아남은 네소스는 훗날 헤라클레스 자신의 죽음에 다시 등장한다. 하나의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에리만토스로 향한 길에서 이미 헤라클레스의 과거와 미래가 동시에 연결된 셈이다.

그리고 다음 과업의 장소는 엘리스(Elis)이다. 에우뤼스테우스는 이번에는 괴물도 사슴도 멧돼지도 아닌, 엘리스 왕 아우게이아스(Augeas)가 소유한 거대한 가축 우리를 하루 안에 청소하라고 명령한다. 그런데 이 다섯 번째 과업은 그냥 똥 치우고 끝낼 수가 없다. 아우게이아스 왕가를 따라가면 퓔레우스가 둘리키온으로 쫓겨나고, 결국 그 아들 메게스의 40척과 엘리스의 40척까지 한꺼번에 배에 태울 수 있다.


┃ 다섯 번째 과업, 아우게이아스의 외양간

알페이오스강의 물길을 돌려 아우게이아스의 외양간을 청소한 헤라클레스를 그린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의 회화
알페이오스강의 물길을 돌리는 헤라클레스(Hercules Diverting the Course of the River Alpheus),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Francisco de Zurbarán), 1634년, 출처 : Wikimedia Commons

에우뤼스테우스가 헤라클레스에게 내린 다섯 번째 과업은 엘리스의 왕 아우게이아스가 소유한 외양간을 단 하루 안에 청소하는 일이었다. 앞의 네 과업에서는 사자와 히드라, 암사슴과 멧돼지처럼 직접 상대해야 할 동물이 과업의 중심에 있었지만, 이번에는 수많은 가축이 남긴 오물을 치워야 했다. 아우게이아스는 너무 많은 소와 염소를 소유하고 있어 가축의 배설물 때문에 땅의 상당 부분을 경작할 수 없을 정도였다. 따라서 다섯 번째 과업은 단순히 더러운 외양간 하나를 청소하는 일이 아니라, 왕이 소유한 거대한 가축 떼가 오랫동안 남긴 오물을 하루 안에 제거하는 일이었다.

엘리스는 펠로폰네소스 서부에 자리한 지역으로, 아우게이아스는 이곳을 지배하던 왕이었다. 그는 엘리스 왕 엘레이오스(Eleius)의 아들이며, 막대한 가축을 소유한 인물이었다. 바로 이 가축 떼가 헤라클레스의 다섯 번째 과업과 연결된다.

헤라클레스는 에우뤼스테우스의 명령을 그대로 밝히지 않은 채 아우게이아스에게 접근했다. 그는 외양간을 하루 안에 깨끗하게 치우는 대신 가축의 10분의 1을 보수로 달라고 요구했고, 아우게이아스는 그 일이 하루 안에 가능하다고 믿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였다. 헤라클레스는 나중에 약속을 부정하지 못하도록 아우게이아스의 아들 퓔레우스를 증인으로 세웠다. 이때까지만 해도 퓔레우스는 아버지의 왕국에 남아 있던 왕자였지만, 이 증언이 훗날 그를 엘리스에서 쫓겨나게 만들고 다시 『일리아스』의 함선 카탈로그까지 이어진다.

헤라클레스는 가축의 배설물을 직접 퍼내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는 외양간의 기초 일부를 무너뜨려 물이 들어갈 통로를 만들고, 근처를 흐르던 알페이오스강과 페네이오스강(Peneus River)의 흐름을 돌려 외양간 안으로 끌어들였다. 반대편에는 다시 물이 빠져나갈 통로를 만들었고, 두 강에서 밀려든 물이 오랫동안 쌓인 오물을 한꺼번에 밖으로 씻어냈다. 이 방법으로 헤라클레스는 약속한 하루 안에 외양간을 청소했다.

네메아의 사자에서는 무기가 통하지 않는 상대에게 맨몸으로 맞섰고, 히드라에서는 잘린 머리의 재생을 불로 막았으며, 에리만토스의 멧돼지는 깊은 눈을 이용해 붙잡았다. 다섯 번째 과업에서도 헤라클레스는 직접 오물을 하나씩 퍼내지 않고 주변의 물길을 이용해 단시간에 문제를 해결했다. 자신의 힘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장소의 지형과 물의 흐름을 이용한 것이다.

그러나 외양간을 깨끗하게 만들었다고 해서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아우게이아스는 헤라클레스가 에우뤼스테우스의 명령을 받아 이 일을 수행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약속했던 보수를 지급하지 않았다. 그는 처음부터 보수를 주겠다고 약속한 사실 자체를 부정했고, 결국 이 문제를 판정받기로 한다. 이때 증인으로 나선 사람이 바로 퓔레우스였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유리하게 거짓말하지 않고, 아우게이아스가 실제로 헤라클레스에게 보수를 약속했다고 증언했다. 그러자 분노한 아우게이아스는 판결이 나오기도 전에 헤라클레스와 자신의 아들 퓔레우스를 모두 엘리스에서 쫓아냈다.

이 사건 때문에 다섯 번째 과업 역시 에우뤼스테우스에게 인정받지 못했다. 에우뤼스테우스는 헤라클레스가 아우게이아스에게 보수를 요구했으므로 이 일을 순수하게 자신의 명령만으로 수행한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앞에서 레르나의 히드라를 죽일 때 이올라오스의 도움을 받았다는 이유로 하나의 과업이 제외되었다면, 이번에는 보수를 받기로 했다는 이유로 또 하나가 제외되었다. 처음 열 개였던 과업이 열두 개로 늘어나는 두 번째 이유가 여기에서 만들어진다.


┃ 헤라클레스와 아우게이아스의 전쟁과 둘리키온 40척

『일리아스』 함선 카탈로그의 이타케와 서부 섬·해안 권역을 표시한 그리스 지도

퓔레우스는 아버지의 약속을 사실대로 증언한 대가로 고향 엘리스에서 추방되었다. 그는 바다 건너 둘리키온(Dulichium)으로 가서 그곳에 정착했다. 호메로스도 『일리아스』 2권의 함선 카탈로그에서 퓔레우스가 아버지와 다툰 뒤 둘리키온으로 옮겨갔다고 직접 언급한다. 따라서 아우게이아스의 외양간을 둘러싼 보수 문제는 단순한 부자 갈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엘리스 왕가의 한 가지가 바다 건너 둘리키온으로 이동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 퓔레우스에게서 메게스(Meges)가 태어난다. 『일리아스』 2권에서 메게스는 둘리키온과 그 맞은편에 놓인 신성한 에키나데스 제도(Echinades Islands)의 군대를 이끄는 지휘관으로 등장한다. 호메로스는 그를 아레스에 견줄 만한 전사로 부르며, 아버지 퓔레우스가 아우게이아스와의 불화 때문에 둘리키온으로 옮겨갔다는 사실까지 함께 전한다. 그리고 메게스가 이끈 둘리키온과 에키나데스의 군대는 모두 40척의 함선을 타고 트로이로 향한다.

따라서 둘리키온의 40척은 갑자기 서부의 섬에서 나타난 독립된 세력이 아니다. 그 지휘관 메게스의 아버지는 원래 엘리스의 왕자였고, 헤라클레스와 아우게이아스 사이의 분쟁에서 헤라클레스의 약속을 증언했다는 이유로 엘리스에서 추방되었다. 아우게이아스 → 퓔레우스 → 메게스로 이어지는 혈통 하나가 헤라클레스의 다섯 번째 과업을 계기로 엘리스에서 둘리키온으로 이동했고, 다음 세대에 그 이동의 끝에서 40척의 함선이 트로이로 출항하게 되는 것이다.

헤라클레스가 엘리스에서 쫓겨났다고 해서 아우게이아스와의 싸움까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후 헤라클레스는 약속을 어긴 아우게이아스에게 복수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엘리스를 공격한다. 그러나 처음부터 쉽게 승리한 것은 아니었다. 아우게이아스에게는 강력한 동맹 세력이 있었고, 그 가운데 특히 악토르(Actor)의 아들 크테아토스(Cteatus)에우뤼토스(Eurytus)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두 사람은 헤라클레스의 군대를 여러 차례 물리쳤고, 아우게이아스는 아마륑케우스(Amarynceus)와도 동맹을 맺어 자신의 세력을 강화했다.

헤라클레스는 이후 크테아토스와 에우뤼토스를 따로 제거한 뒤 다시 엘리스를 공격한다. 그는 마침내 엘리스를 함락하고, 추방되어 있던 퓔레우스를 불러 엘리스의 왕으로 세웠다.

그러나 퓔레우스는 엘리스에 그대로 머물지 않았다. 그는 엘리스의 일을 정리한 뒤 다시 둘리키온으로 돌아갔고, 이후 아우게이아스의 아들 아가스테네스(Agasthenes)와 악토르 가문의 후손들이 엘리스의 왕권을 나누어 가지게 된다. 이 과정에서 앞서 헤라클레스와 싸웠던 악토르의 아들 크테아토스와 에우뤼토스의 혈통, 아우게이아스의 아들 아가스테네스의 혈통, 그리고 아마륑케우스의 혈통이 몇 세대 뒤 『일리아스』의 엘리스 지휘관들로 이어진다.


┃ 엘리스의 네 지휘관과 40척

일리아스 함선 카탈로그의 펠로폰네소스 권역을 빨간색으로 표시한 지도

『일리아스』 2권의 함선 카탈로그에서 엘리스는 부프라시온(Buprasion)과 엘리스 일대를 포함한 세력으로 등장하며, 호메로스는 이 지역의 군대를 네 명의 지휘관에게 나누어 맡긴다. 각각의 지휘관에게 열 척씩의 배가 배정되어 모두 40척을 이루며, 많은 에페이오이(Epeians)가 이 배들에 타고 있었다.

첫 번째 지휘관은 암피마코스(Amphimachus)이다. 그는 크테아토스의 아들이며 악토르의 혈통에 속한다. 두 번째 탈피오스(Thalpius)는 에우뤼토스의 아들로 역시 악토르의 혈통이다. 이 두 사람의 아버지인 크테아토스와 에우뤼토스는 바로 헤라클레스가 아우게이아스에게 복수하기 위해 엘리스를 공격했을 때 맞서 싸웠던 인물들이다. 따라서 헤라클레스와 직접 충돌했던 악토르 집안의 다음 세대가 훗날 엘리스군의 절반인 20척을 이끌고 트로이 원정에 참가한다.

세 번째 지휘관 디오레스(Diores)는 아마륑케우스의 아들이다. 아마륑케우스 역시 아우게이아스가 헤라클레스의 공격에 대비하면서 세력을 나누어주고 동맹으로 끌어들였던 인물이다. 따라서 디오레스의 10척 역시 헤라클레스와 아우게이아스의 전쟁 당시 형성된 엘리스의 정치적 세력 가운데 하나에서 이어진다.

마지막 지휘관 폴뤽세노스(Polyxenus)는 아우게이아스의 아들 아가스테네스의 아들이다. 즉 아우게이아스 → 아가스테네스 → 폴뤽세노스로 이어지는 직계 혈통이 트로이 전쟁 세대까지 남아 있었고, 폴뤽세노스는 나머지 10척을 이끌었다. 아우게이아스의 외양간을 청소한 사건에서 시작한 왕가가 몇 세대를 지난 뒤 다시 『일리아스』의 함선 카탈로그에 직접 등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엘리스의 40척은 네 명의 지휘관에게 정확히 열 척씩 나뉜다. 크테아토스의 아들 암피마코스 10척, 에우뤼토스의 아들 탈피오스 10척, 아마륑케우스의 아들 디오레스 10척, 아가스테네스의 아들 폴뤽세노스 10척이다. 엘리스의 함대는 네 가문의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렇게 다섯 번째 과업을 따라가면 하나의 외양간에서 두 갈래의 함대가 동시에 만들어진다. 아우게이아스의 아들 퓔레우스는 아버지의 약속을 증언했다가 추방되어 둘리키온으로 가고, 그의 아들 메게스는 그곳에서 40척을 이끌고 트로이로 향한다. 반면 엘리스에 남은 아우게이아스의 직계와 그의 동맹 가문들은 다음 세대에 네 갈래의 지휘부를 이루어 다시 40척을 보낸다. 헤라클레스가 하루 동안 외양간을 씻어낸 사건 하나에서 둘리키온 40척과 엘리스 40척, 모두 80척의 함선이 『일리아스』 2권의 목록으로 이어지는 셈이다.

그리고 헤라클레스의 다음 과업은 다시 펠로폰네소스 안쪽으로 이동한다. 에우뤼스테우스는 이번에는 스튐팔로스(Stymphalus)의 호수 주변을 뒤덮은 새들을 몰아내라고 명령한다. 스튐팔로스의 새는 지금까지의 과업처럼 왕가 하나가 바로 80척으로 터지는 종류는 아니지만, 장소를 따라가면 아르카디아와 다시 크게 연결된다.


┃ 결론

헤라클레스의 두 번째 과업은 이올라오스의 도움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정되지 않았지만, 레르나에서 얻은 히드라의 독은 이후의 과업을 계속 따라갔다. 케뤼네이아의 암사슴을 산 채로 붙잡은 뒤 에리만토스로 향한 헤라클레스는 폴로에에서 켄타우로스들과 싸웠고, 그의 독화살은 케이론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고 폴로스를 죽였다. 레르나에서 끝난 것처럼 보였던 히드라의 이야기는 네 번째 과업의 길 위에서 다시 여러 죽음으로 번졌다.

세 번째와 네 번째 과업에서 헤라클레스는 동물을 죽이는 대신 추격과 지형을 이용해 산 채로 붙잡았다. 케뤼네이아의 암사슴에게서는 신의 소유권을 침범하지 않아야 했고, 에리만토스의 멧돼지에게서는 깊은 눈을 이용해 움직임을 막아야 했다. 이어 다섯 번째 과업에서는 두 강의 물길을 돌려 아우게이아스의 외양간을 하루 만에 씻어냈다. 그러나 약속한 보수를 둘러싼 분쟁은 엘리스 왕가를 두 갈래로 갈라놓았다.

아우게이아스의 아들 퓔레우스는 헤라클레스의 편에서 사실을 증언했다가 둘리키온으로 추방되었고, 그의 아들 메게스는 그곳에서 40척을 이끌었다. 반면 엘리스에 남은 아우게이아스의 직계와 동맹 가문에서는 암피마코스, 탈피오스, 디오레스, 폴뤽세노스가 각각 10척씩을 맡아 다시 40척을 이끌었다. 미케네 왕의 명령으로 시작된 하나의 과업이 엘리스 왕가를 갈라놓고, 그 두 가지에서 모두 80척의 함선이 트로이로 향하게 된 것이다.

에우뤼스테우스의 명령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다음 목적지는 다시 아르카디아의 호수 지대이다. 그곳에서 헤라클레스는 스튐팔로스의 새들을 죽이기 전에 먼저 숲과 늪에서 끌어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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