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선 카탈로그 — 1,186척의 배 뒤에 숨은 그리스 신화 ⑮ : 테바이 part1

┃ 들어가며

고대 그리스 함선과 일리아스 함선 카탈로그를 상징하는 북디코드 표지

앞에서는 이나코스(Inachus)에게서 시작된 혈통 가운데 벨로스(Belus)의 가지를 따라 아르고스(Argos)와 미케네(Mycenae)의 왕가를 살펴본 뒤, 다시 그의 쌍둥이 형제 아게노르(Agenor)에게 돌아갔다. 아게노르의 딸 에우로페(Europa)가 황소로 변한 제우스에게 이끌려 크레테(Crete)로 건너가면서 그곳에서는 미노스(Minos)의 왕가가 시작되었고, 여러 자식과 후손을 거쳐 마지막에는 이도메네우스(Idomeneus)와 메리오네스(Meriones)가 이끄는 크레테의 80척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에우로페의 실종으로 갈라진 아게노르 왕가는 크레테에서 끝나지 않는다. 딸이 사라지자 아게노르는 세 아들 카드모스(Cadmus)·포이닉스(Phoenix)·킬릭스(Cilix)에게 누이를 찾아오기 전에는 돌아오지 말라고 명했고, 어머니 텔레파사(Telephassa)까지 이들과 함께 길을 나섰다. 하지만 에우로페를 찾지 못한 가족은 결국 각기 다른 지역에 머물게 되었고, 한 사람을 찾아 떠난 여행은 오히려 아게노르의 혈통을 여러 방향으로 흩어놓았다.

그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에우로페의 흔적을 따라간 인물이 카드모스이다. 그는 어머니 텔레파사와 함께 서쪽으로 이동한 뒤, 누이를 찾는 대신 새로운 신탁을 받으면서 그리스 중부의 보이오티아(Boeotia)로 들어간다. 그리고 카드모스가 정착하는 곳에서 앞으로 그리스 신화의 수많은 비극과 전쟁이 겹쳐질 또 하나의 왕가, 테바이(Thebes)가 시작된다.

테바이는 오이디푸스와 일곱 장수의 전쟁으로 익숙한 도시이지만, 그 왕가의 이야기는 그보다 훨씬 앞에서 시작된다. 카드모스와 하르모니아(Harmonia) 사이에서 태어난 네 딸 아우토노에(Autonoe)·이노(Ino)·세멜레(Semele)·아가베(Agave)와 아들 폴뤼도로스(Polydorus)의 가지를 따라가면, 테바이 안에서 시작된 혈통이 트라키아와 콜키스, 크레테와 낙소스, 다시 그리스 각지로 뻗어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앞에서 이미 지나온 여러 신화도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악타이온(Actaeon)과 오르페우스(Orpheus), 황금양털과 아르고호 원정, 디오니소스(Dionysus)와 아리아드네, 그리고 훨씬 뒤의 시대에 등장하는 오디세우스까지 서로 다른 이야기에서 보았던 이름들이 카드모스의 자식과 후손을 통해 테바이 왕가에 접속한다. 하나의 왕가를 따라가는데 여러 신화가 계속 교차하는 이유도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

이번 편에서는 먼저 에우로페를 찾아 떠난 카드모스가 어떻게 테바이 왕가를 열게 되는지에서 출발한다. 이어 카드모스의 자식 가운데 아우토노에와 세멜레, 이노에게서 갈라지는 세 가지를 따라가며, 테바이에서 시작된 혈통이 다른 지역의 신화들과 어디에서 다시 연결되는지를 살펴본다. 아가베와 폴뤼도로스에게서 이어지는 테바이 왕권의 중심 가지는 다음 편에서 계속된다.


┃ 이나코스에서 갈라져 나온 또 하나의 왕가, 테바이

이나코스와 암소로 변한 이오, 헤르메스가 등장하는 그리스 신화 회화
헤르메스와 이오(Mercury and Io), 코르넬리스 블루마르트(Cornelis Bloemaert), 1632년, 출처 : Wikimedia Commons

앞에서 함선 카탈로그의 여러 왕가를 따라가기 시작했을 때 첫 번째 출발점은 이아페토스(Iapetus)의 혈통이었다. 이아페토스의 아들 프로메테우스(Prometheus)와 에피메테우스(Epimetheus)에게서 각각 데우칼리온(Deucalion)과 퓌라(Pyrrha)가 태어났고, 두 사람은 대홍수를 살아남아 헬렌(Hellen)을 낳았다. 헬렌과 오르세이스(Orseis) 사이에서 태어난 도로스(Dorus)·크수토스(Xuthus)·아이올로스(Aeolus)에게서는 다시 그리스 각지의 집단과 왕가가 갈라져 나왔다. 그 가운데 도로스의 혈통은 텍타모스(Tectamus)와 아스테리오스(Asterius)를 거쳐 크레테에 도착했고, 아스테리오스가 에우로페와 결혼하면서 미노스의 왕가와 연결되었다.

그러나 함선 카탈로그의 모든 왕가가 헬렌의 세 아들에게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아르고스와 미케네, 크레테와 테바이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거대한 혈통은 오케아노스(Oceanus)와 테튀스(Tethys)의 아들인 강의 신 이나코스에게서 시작되었다. 이나코스와 멜리아(Melia) 사이에서 포로네우스(Phoroneus)가 태어났고, 포로네우스의 딸 니오베(Niobe)는 제우스(Zeus)와의 사이에서 아르고스를 낳았다. 아르고스와 에우아드네(Evadne)의 아들 에크바소스(Ecbasus)에게서는 아게노르가, 아게노르에게서는 백 개의 눈을 가진 아르고스 파놉테스(Argus Panoptes)가 태어났다. 파놉테스와 이스메네(Ismene) 사이에서 태어난 이아소스(Iasus)의 딸이 바로 이오(Io)였다.

이오는 제우스의 사랑과 헤라(Hera)의 분노 때문에 암소의 모습으로 아르고스를 떠나 이집트(Egypt)까지 방랑했고, 그곳에서 제우스의 아들 에파포스(Epaphus)를 낳았다. 에파포스와 멤피스(Memphis) 사이에서는 리비아(Libya)가 태어났으며, 리비아는 포세이돈(Poseidon)과의 사이에서 쌍둥이 아게노르와 벨로스(Belus)를 낳았다. 여기에서 이오에게서 이어진 혈통은 다시 두 갈래로 나뉘었다.

벨로스와 앙키노에(Anchinoe) 사이에서는 아이귑토스(Aegyptus)와 다나오스(Danaus)가 태어났다. 다나오스는 쉰 딸을 이끌고 아르고스로 돌아왔고, 그의 딸 히페름네스트라(Hypermnestra)와 아이귑토스의 아들 륑케우스(Lynceus) 사이에서 아바스(Abas)가 태어났다. 아바스의 쌍둥이 아들 프로이토스(Proetus)와 아크리시오스(Acrisius)에게서 왕통은 다시 갈라졌다. 프로이토스의 왕권을 나누어 받은 멜람푸스(Melampus)와 비아스(Bias)의 가문에서는 디오메데스(Diomedes)·스테넬로스(Sthenelus)·에우뤼알로스(Euryalus)가 나와 아르고스의 80척을 이끌었다. 아크리시오스의 딸 다나에(Danae)에게서는 페르세우스(Perseus)가 태어났고, 페르세우스가 세운 미케네의 왕권은 에우뤼스테우스(Eurystheus)와 아트레우스(Atreus)의 집안을 거쳐 아가멤논(Agamemnon)의 100척으로 이어졌다.

이제 벨로스와 함께 태어났지만 페니키아(Phoenicia)로 향했던 그의 쌍둥이 형제 아게노르에게 돌아가야 한다. 아게노르와 텔레파사 사이에서는 딸 에우로페와 아들 카드모스·포이닉스·킬릭스가 태어났다. 에우로페는 황소로 변한 제우스에게 이끌려 크레테로 건너갔고, 그곳에서 미노스·라다만튀스(Rhadamanthys)·사르페돈(Sarpedon)을 낳았다. 미노스의 왕가는 데우칼리온과 몰로스(Molus)의 가지를 거쳐 이도메네우스와 메리오네스가 이끄는 크레테의 80척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에우로페가 사라진 뒤 그녀를 찾아 고향을 떠난 형제들은 누이를 따라 크레테에 정착하지 않았다. 포이닉스와 킬릭스는 각자의 이름을 남긴 지역에 자리를 잡았고, 카드모스는 어머니 텔레파사와 함께 누이의 흔적을 찾아 계속 서쪽으로 이동했다. 이오에게서 시작되어 한쪽으로 아르고스와 미케네, 다른 한쪽으로 크레테까지 뻗었던 혈통이 이제 카드모스를 따라 보이오티아로 들어가며 테바이라는 또 하나의 거대한 왕가를 열기 시작한다.


┃ 카드모스와 테바이 왕가의 시작

카드모스가 용의 이빨을 땅에 뿌리고 스파르토이가 솟아나는 장면
용의 이빨을 뿌리는 카드모스(Cadmus Sowing the Dragon’s Teeth), 피터르 파울 루벤스 원작 계열(After Peter Paul Rubens), 1747년 이전, 출처 : Wikimedia Commons

에우로페를 찾아 나선 가족 가운데 가장 멀리까지 추적을 계속한 사람은 카드모스였다. 어머니 텔레파사와 함께 트라키아(Thrace)에 머물던 카드모스는 텔레파사가 죽자 그녀를 장사지낸 뒤 델포이(Delphi)로 가서 에우로페의 행방을 물었다. 그러나 신탁은 더 이상 에우로페를 찾지 말고, 대신 한 마리의 암소를 따라가다가 그 소가 지쳐 쓰러지는 곳에 도시를 세우라고 명했다. 카드모스는 포키스(Phocis)를 지나며 암소를 발견해 뒤따랐고, 그 소가 보이오티아의 한 장소에 주저앉자 그곳에 정착하기로 했다. 훗날 테바이가 되는 자리였다.

카드모스는 신탁을 이끈 암소를 아테나(Athena)에게 제물로 바치려 했고, 제사에 쓸 물을 구하기 위해 부하들을 아레스(Ares)의 샘으로 보냈다. 그러나 그 샘은 아레스의 자식이라고도 전해지는 거대한 용이 지키고 있었고, 용은 물을 길으러 온 사람들을 대부분 죽였다. 카드모스는 직접 용을 죽인 뒤 아테나의 명령에 따라 그 이빨을 땅에 뿌렸다. 그러자 땅에서 무장한 전사들이 솟아났는데, 이들을 스파르토이(Spartoi), 즉 ‘뿌려진 자들’이라고 불렀다. 전사들은 서로 싸우기 시작했고 끝내 에키온(Echion), 우다이오스(Udaeus), 크토니오스(Chthonius), 휘페레노르(Hyperenor), 펠로로스(Pelorus) 다섯 명만 살아남았다. 이 다섯 사람은 이후 테바이의 초기 귀족 가문을 이루는 인물들로 남는다.

그러나 카드모스가 죽인 용은 아레스의 신성한 샘을 지키는 존재였기 때문에, 그에게도 살해의 대가가 남았다. 아폴로도로스에 따르면 카드모스는 이 죄를 속죄하기 위해 아레스를 ‘영원한 한 해’ 동안 섬겼다. 당시의 한 해는 오늘날의 여덟 해에 해당했으므로, 카드모스는 모두 여덟 해 동안 아레스의 종으로 지낸 셈이다. 이 복무가 끝나면서 용을 죽인 죄에 대해 카드모스에게 내려진 형벌도 마무리되었다. 그 뒤 아테나는 카드모스가 새로 세운 땅의 왕권을 얻도록 도왔고, 제우스는 아레스와 아프로디테(Aphrodite)의 딸 하르모니아를 그의 아내로 주었다. 카드모스는 아레스의 용을 죽인 죄로 여덟 해 동안 그 신을 섬겼지만, 속죄를 마친 뒤에는 오히려 아레스의 딸과 혼인하여 새로운 왕가를 열게 된 것이다.

카드모스가 테바이의 땅에 뿌린 것은 용의 이빨 전부가 아니었다. 아테나는 카드모스가 죽인 용의 이빨을 뽑아 두 몫으로 나누었다. 그중 절반은 카드모스에게 주어 테바이의 땅에 뿌리게 했고, 나머지 절반은 콜키스(Colchis)의 왕 아이에테스(Aeetes)에게 건넸다. 훗날 황금양털을 얻기 위해 콜키스에 도착한 이아손(Jason)이 아이에테스의 명령에 따라 뿌린 것이 바로 이때 건너간 용의 이빨이었다. 따라서 카드모스와 이아손의 이야기에서 똑같은 장면이 우연히 반복되는 것은 아니다. 두 사람은 한 용에게서 나온 이빨을 서로 다른 땅에 뿌렸고, 두 밭에서는 모두 무장한 전사들이 솟아났다.카드모스가 뿌린 이빨에서 솟아난 전사들은 서로 싸웠고, 살아남은 다섯 명은 스파르토이라 불리며 테바이의 초기 귀족 가문을 이루었다. 이아손 역시 메데이아(Medea)의 조언에 따라 전사들 사이에 돌을 던져 서로를 공격하게 만들었지만, 콜키스에서는 살아남아 새로운 가문을 이루는 자가 없었다.

카드모스와 하르모니아 사이에서는 네 딸 아우토노에, 이노, 세멜레, 아가베와 아들 폴뤼도로스가 태어났다. 이 자식들의 이름을 하나씩 따라가면 서로 떨어져 있던 여러 신화가 모두 테바이 왕가에서 다시 만난다. 아우토노에에게서는 악타이온(Actaeon)과 오르페우스(Orpheus)의 이야기가 이어지고, 이노에게서는 황금양털과 이스트미아 경기(Isthmian Games)가 나오며, 세멜레와 아가베에게서는 디오니소스(Dionysus)와 펜테우스(Pentheus)의 비극이 시작된다. 아들 폴뤼도로스의 혈통은 라브다코스(Labdacus)와 라이오스(Laius)를 거쳐 오이디푸스(Oedipus) 왕가와 두 차례의 테바이 전쟁으로 이어진다.


┃ 아우토노에에서 악타이온과 오르페우스로

아르테미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사냥개들에게 공격당하는 악타이온
악타이온의 죽음(The Death of Actaeon), 티치아노 베첼리오(Titian), 약 1559–1575년, 출처 : Wikimedia Commons

아우토노에는 아폴론(Apollo)과 퀴레네(Cyrene)의 아들 아리스타이오스(Aristaeus)와 결혼한다. 퀴레네는 테살리아의 강신 페네이오스(Peneius)의 손녀이자 휩세우스(Hypseus)의 딸로, 펠리온산(Mount Pelion)에서 짐승을 사냥하며 자랐다. 아폴론은 맨손으로 사자와 싸우는 퀴레네를 발견하고 그녀를 리비아로 데려갔으며, 그곳에서 두 사람의 아들 아리스타이오스가 태어났다. 퀴레네가 정착한 땅에는 그녀의 이름을 딴 도시 퀴레네가 세워졌다.

아리스타이오스는 님프들에게 길러지며 우유를 굳혀 치즈를 만드는 법과 벌을 기르는 법, 올리브나무를 재배하는 법을 배웠다. 성장한 그는 이 기술들을 여러 지역에 전했고, 목자와 사냥꾼, 양봉가와 올리브 재배자를 보호하는 존재로 숭배받았다. 리비아에서 태어난 아리스타이오스가 보이오티아로 건너와 아우토노에와 혼인하면서, 테살리아에서 리비아로 옮겨갔던 아폴론의 혈통이 다시 카드모스의 테바이 왕가와 결합한다.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악타이온이다. 악타이온은 펠리온산의 케이론(Chiron)에게 사냥을 배워 뛰어난 사냥꾼으로 성장했다. 어느 날 그는 키타이론산(Mount Cithaeron)에서 사냥하다가 숲속 샘에서 목욕하던 아르테미스(Artemis)를 보게 된다. 아르테미스는 자신을 본 악타이온을 수사슴으로 바꾸었고, 주인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한 사냥개들은 그를 사냥감으로 여겨 뒤쫓았다. 인간의 정신을 그대로 지닌 악타이온은 자신이 악타이온이라고 외치려 했지만 사슴의 목에서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그는 자신이 기르고 사냥을 가르친 개들에게 붙잡혀 찢겨 죽었다.

사냥이 끝난 뒤에도 개들은 자신들이 죽인 사슴이 주인이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사라진 악타이온을 찾아 울며 헤매던 개들은 마침내 그에게 사냥을 가르친 케이론의 동굴까지 찾아갔다. 케이론이 악타이온의 모습을 본뜬 형상을 만들어 보여주자 개들은 그 앞에서야 주인을 찾는 일을 멈추었다. 아우토노에의 아들은 자손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의 아버지 아리스타이오스에게서는 또 하나의 거대한 신화가 이어진다.

아리스타이오스는 오르페우스의 아내 에우리디케(Eurydice)의 죽음에 관여한 인물이기도 하다. 오르페우스는 트라키아의 왕 오이아그로스(Oeagrus)와 무사이 여신 칼리오페(Calliope)의 아들로, 인간뿐 아니라 짐승과 나무와 바위까지 움직일 수 있는 음악가였다. 그는 이아손이 이끄는 아르고호(Argo) 원정대에도 참가했다. 원정대가 세이렌(Sirens)의 노래를 듣고 배의 방향을 잃을 위기에 놓이자 오르페우스는 리라를 연주하여 그 노랫소리를 덮었고, 아르고호의 영웅들이 세이렌에게 끌려가는 것을 막았다.

원정에서 돌아온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와 혼인한다. 그러나 아리스타이오스가 에우리디케를 뒤쫓으면서 두 사람의 삶은 무너진다. 아리스타이오스를 피해 강가의 풀밭을 달아나던 에우리디케는 발밑에 숨어 있던 뱀을 보지 못하고 밟았다가 물려 죽었다. 오르페우스가 아내를 되찾기 위해 저승으로 내려가는 이야기는 바로 이 죽음에서 시작된다.

오르페우스는 살아 있는 몸으로 저승에 들어가 리라를 연주했다. 그의 음악을 들은 망자들은 고통을 잊었고, 탄탈로스(Tantalus)는 물과 열매를 잡으려는 일을 멈추었으며, 익시온(Ixion)의 수레바퀴와 시시포스(Sisyphus)의 바위도 움직임을 멈추었다. 하데스(Hades)와 페르세포네(Persephone)마저 그의 노래에 마음을 움직여 에우리디케를 지상으로 돌려보내기로 했다. 다만 두 사람이 완전히 저승을 빠져나갈 때까지 오르페우스가 뒤따라오는 아내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는 조건이 붙었다.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를 뒤에 둔 채 지상으로 향했다. 그러나 출구를 눈앞에 두고도 아내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자 불안을 견디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 저승의 경계를 벗어나지 못했던 에우리디케는 다시 어둠 속으로 끌려갔다. 오르페우스가 손을 뻗었지만 붙잡을 수 없었고, 이번에는 아무리 노래하고 간청해도 저승의 문이 다시 열리지 않았다.

아내를 두 번 잃은 오르페우스는 다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트라키아를 떠돌았다. 결국 그는 디오니소스의 제의를 벌이던 키코네스(Cicones)의 여인들에게 붙잡혀 몸이 찢겨 죽었다. 그의 잘린 머리와 리라는 헤브로스강(Hebrus River)을 따라 바다로 흘러가 레스보스섬(Lesbos)에 닿았고, 죽은 뒤에도 오르페우스의 입에서는 에우리디케를 부르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의 머리는 레스보스에 묻혔으며, 리라는 하늘로 올라가 별자리가 되었다.

에우리디케와 함께 지내던 님프들은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아리스타이오스에게 대가를 요구했다. 그가 기르던 벌들이 한꺼번에 죽자 아리스타이오스는 테살리아의 페네이오스강(Peneius River)으로 가서 물속에 사는 어머니 퀴레네에게 도움을 청했다. 퀴레네는 모든 일의 원인을 알고 있는 바다의 예언자 프로테우스(Proteus)를 찾아가라고 알려주었다. 프로테우스는 붙잡힐 때마다 멧돼지와 호랑이, 뱀과 불과 물로 모습을 바꾸었지만, 아리스타이오스가 끝까지 놓아주지 않자 마침내 벌들이 죽은 이유를 밝혔다.

아리스타이오스는 에우리디케의 죽음에 대한 죄를 속죄하기 위해 네 마리의 황소와 네 마리의 암소를 제물로 바치고, 오르페우스에게는 검은 양과 망각의 양귀비를 바쳤다. 아홉째 날 그가 제물을 놓아둔 숲으로 돌아가자 죽은 소들의 몸에서 새로운 벌 떼가 솟아나 나뭇가지에 무리를 이루었다. 아리스타이오스가 에우리디케를 죽음으로 몰아넣으면서 오르페우스의 저승 여행이 시작되었고, 그 죽음에 대한 대가를 치른 뒤에야 죽었던 벌들도 다시 태어난 것이다.

아리스타이오스는 이후 케오스섬(Ceos)으로 건너가 시리우스(Sirius)가 떠오르는 계절마다 사람들을 괴롭히던 열기와 역병을 막았다. 그가 제우스에게 제사를 지내자 북쪽에서 에테시아 바람(Etesian Winds)이 불어와 뜨거워진 땅을 식혔다. 자신의 아들을 사냥개들에게서 구하지 못했던 아리스타이오스가 이번에는 ‘개의 별’이라 불리는 시리우스가 불러온 재앙에서 사람들을 구한 셈이다.

그는 다시 리비아로 돌아갔다가 사르디니아(Sardinia)와 시칠리아(Sicily)를 지나며 농경과 목축의 기술을 전했고, 마지막에는 트라키아에서 디오니소스를 만나 그의 비의에 입문한다. 카드모스의 딸 아우토노에에게서 시작된 가지는 악타이온과 아르고호 원정, 에우리디케의 죽음과 오르페우스의 저승 여행을 거친 뒤, 카드모스의 또 다른 딸 세멜레가 낳은 디오니소스에게 돌아온다.


┃ 세멜레에서 두 번 태어난 신 디오니소스로

신의 모습으로 나타난 제우스와 그 빛을 견디지 못하는 세멜레를 그린 회화
주피터와 세멜레(Jupiter and Semele), 귀스타브 모로(Gustave Moreau), 1889–1895년, 출처 : Wikimedia Commons

카드모스의 딸 세멜레는 제우스의 사랑을 받아 아이를 임신한다. 제우스는 헤라에게 들키지 않도록 몰래 세멜레를 찾아왔지만, 두 사람의 관계를 알아낸 헤라는 세멜레의 늙은 유모 베로에(Beroe)의 모습으로 변해 그녀에게 접근했다. 헤라는 세멜레의 연인이 정말 제우스인지 의심하게 만든 뒤, 제우스가 헤라를 만날 때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 달라고 요구해야 그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다고 부추겼다.

세멜레는 제우스에게 자신의 소원 하나를 반드시 들어달라고 부탁했다. 제우스가 스튁스강(River Styx)에 맹세하자 세멜레는 그에게 신의 위엄을 갖춘 모습으로 나타나 달라고 요구했다. 이미 맹세를 마친 제우스는 소원을 거둘 수 없었다. 그는 세멜레가 견딜 수 있도록 힘을 줄인 번개를 들고 나타났지만, 인간인 세멜레는 천둥과 불길을 견디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

제우스는 불길 속에서 아직 여섯 달밖에 자라지 않은 태아를 꺼내 자신의 허벅지에 꿰매 넣었다. 아이는 어머니의 몸에서 한 번, 제우스의 몸에서 다시 태어났고, 이 때문에 디오니소스는 ‘두 번 태어난 신’이 된다. 그러나 세멜레의 자매들은 그녀가 인간 남자와 관계를 맺고도 제우스의 아이를 가졌다고 거짓말했기 때문에 번개를 맞아 죽었다고 퍼뜨렸다. 훗날 디오니소스가 테바이로 돌아오는 이유에는 자신이 신이라는 사실뿐 아니라 어머니 세멜레가 거짓말쟁이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려는 목적도 들어 있었다.

제우스는 갓 태어난 디오니소스를 헤르메스(Hermes)에게 맡겼고, 헤르메스는 아이를 세멜레의 언니 이노와 그 남편 아타마스(Athamas)에게 데려갔다. 두 사람은 헤라의 눈을 피하기 위해 디오니소스를 여자아이처럼 꾸며 길렀다. 헤라가 아이의 행방을 알아내자 제우스는 디오니소스를 새끼 염소로 바꾸었고, 헤르메스는 그를 아시아의 뉘사산(Mount Nysa)에 사는 님프들에게 옮겼다. 님프들은 디오니소스를 숲속에 숨겨 길렀으며, 훗날 하늘로 올라가 휘아데스(Hyades) 성단이 된다.

성장한 디오니소스는 포도나무를 발견하고 포도로 술을 만드는 법을 알아냈다. 그러나 헤라는 그에게 광기를 내려 한곳에 머물지 못하게 했다. 디오니소스는 이집트와 시리아(Syria)를 떠돌다가 프뤼기아(Phrygia)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레아(Rhea)에게 광기를 씻어내는 정화를 받은 뒤 자신의 제의와 의식을 배웠다. 어머니를 죽게 하고 자신을 떠돌게 만든 광기는 이때부터 디오니소스가 인간에게 내리는 힘으로 바뀐다. 그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술과 축제 속에서 일상의 경계를 벗어났지만, 그의 신성을 거부한 사람들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광기에 빠졌다.

트라키아의 에도노이(Edonians)족을 다스리던 왕 뤼쿠르고스(Lycurgus)는 자신의 땅에 들어온 디오니소스를 몰아내고 그를 따르던 여성들과 사튀로스들을 붙잡았다. 쫓기던 디오니소스는 바다로 뛰어들어 네레우스(Nereus)의 딸 테티스(Thetis)에게 몸을 피했다. 그녀는 훗날 펠레우스(Peleus)와 혼인하여 아킬레우스(Achilles)를 낳는 바로 그 테티스이다. 그러나 곧 붙잡혔던 무리가 풀려났고, 뤼쿠르고스에게는 광기가 내려졌다. 그는 눈앞의 아들 드뤼아스(Dryas)를 포도나무로 착각하여 도끼로 베어 죽였다. 뤼쿠르고스가 정신을 되찾은 뒤에도 그의 땅에서는 곡식이 자라지 않았다. 에도노이족은 뤼쿠르고스를 팡가이온산(Mount Pangaeum)으로 끌고 가 결박했고, 그는 말들에게 짓밟혀 죽었다.

디오니소스는 트라키아를 지나 인도까지 진군하여 자신의 숭배를 퍼뜨린 뒤 다시 그리스로 돌아왔다. 그가 가장 먼저 자신의 신성을 인정받아야 했던 곳은 어머니의 고향 테바이였다. 그러나 당시 테바이의 왕이었던 펜테우스는 디오니소스를 신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펜테우스는 카드모스의 딸 아가베와 스파르토이 에키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으므로, 디오니소스에게는 이종사촌이었다. 세멜레를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했던 아가베의 아들이 이제 세멜레의 아들을 가짜 신으로 몰아세운 것이다. 두 사람의 충돌은 뒤에서 아가베의 혈통을 따라갈 때 다시 이어진다.

디오니소스가 이카리아(Icaria)에서 낙소스(Naxos)로 가기 위해 배를 구했을 때에는 튀르세노이(Tyrrhenians) 해적들이 그를 태웠다. 해적들은 목적지로 가는 대신 디오니소스를 노예로 팔기 위해 아시아로 배를 돌렸다. 그러자 배의 돛대와 노에는 뱀이 휘감겼고, 갑판에는 포도덩굴과 담쟁이덩굴이 뻗어 나갔으며, 어디선가 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겁에 질린 해적들은 바다로 뛰어들어 돌고래로 변했다. 이 사건 뒤 디오니소스는 바다를 건너는 사람들에게도 자신의 신성을 드러낸 존재가 된다.

낙소스섬에서 디오니소스는 테세우스에게 버려진 아리아드네(Ariadne)를 만난다. 아리아드네는 크레테의 왕 미노스와 파시파에(Pasiphae)의 딸이자, 카드모스가 찾아 나섰던 누이 에우로페의 손녀였다. 카드모스의 외손자 디오니소스가 에우로페의 손녀 아리아드네와 혼인하면서, 에우로페의 실종으로 갈라졌던 페니키아 왕가의 두 가지가 다시 한 가족 안에서 만난다. 제우스는 아리아드네를 죽지도 늙지도 않는 존재로 만들어 신들의 자리에 올렸고, 디오니소스가 그녀에게 준 관은 하늘로 올라가 북쪽왕관자리(Corona Borealis)가 되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오이노피온(Oenopion), 스타퓔로스(Staphylus), 토아스(Thoas), 페파레토스(Peparethus)가 태어났다. 이 가운데 토아스는 렘노스섬(Lemnos)의 왕이 되어 딸 휩시퓔레(Hypsipyle)를 낳는다. 렘노스의 여자들이 섬의 남자들을 모두 죽였을 때 휩시퓔레는 아버지 토아스를 몰래 살려 보냈고, 이후 렘노스에 도착한 이아손과 만나 두 아들을 낳았다. 휩시퓔레는 다시 네메아(Nemea)로 끌려가 어린 오펠테스(Opheltes)를 돌보다가 ‘테바이를 공격한 일곱 장수’를 샘으로 안내하게 된다. 세멜레의 아들 디오니소스가 아리아드네와 낳은 혈통이 렘노스의 아르고호 원정을 거쳐 다시 테바이 전쟁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디오니소스는 자신의 신성을 세상에 드러낸 뒤 저승으로 내려가 죽은 어머니 세멜레를 찾아냈다. 그는 세멜레를 지상으로 데려와 튀오네(Thyone)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었고, 함께 올륌포스로 올라갔다. 인간의 몸으로 제우스의 빛을 견디지 못해 불타 죽었던 세멜레는 아들이 신으로 인정받은 뒤 다시 살아나 신들의 자리에 들어간다. 세멜레를 거짓말쟁이로 만들었던 죽음은 디오니소스가 그녀의 말을 사실로 증명하면서 뒤집혔다. 아리아드네가 불멸을 얻은 데 이어, 세멜레는 디오니소스의 이야기 안에서 인간의 죽음을 넘어 신들의 자리에 오른 두 번째 여성이 되었다.


┃ 이노에서 황금양털과 바다의 여신 레우코테아로

광기에 빠진 아타마스가 레아르코스를 죽이고 이노가 멜리케르테스와 바다로 뛰어드는 장면
광기에 빠진 아타마스가 레아르코스를 죽이고 이노와 멜리케르테스가 바다로 뛰어드는 장면(The Insane Athamas Killing Learchus, While Ino and Melicertes Jump into the Sea), 안토니오 템페스타(Antonio Tempesta), 1606년, 출처 : LACMA

카드모스의 딸 이노는 보이오티아를 다스리던 아타마스와 결혼한다. 아타마스는 헬렌의 아들 아이올로스와 에나레테(Enarete)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시시포스와 크레테우스(Cretheus), 살모네우스(Salmoneus)의 형제였다. 카드모스의 테바이 왕가가 이노의 혼인을 통해 헬렌에게서 갈라져 나온 아이올로스 왕가와 결합한 것이다. 아타마스에게는 이노와 혼인하기 전에 구름의 님프 네펠레(Nephele)에게서 낳은 아들 프릭소스(Phrixus)와 딸 헬레(Helle)가 있었다. 이노는 두 아이를 제거하기 위해 보이오티아의 여자들을 설득하여 파종에 쓸 밀을 몰래 볶게 했다. 볶은 씨앗을 땅에 심어도 싹이 나지 않자 보이오티아에는 기근이 시작되었다.

아타마스는 기근을 끝낼 방법을 알아보기 위해 델포이로 사절을 보냈다. 이노는 사절들까지 매수하여 프릭소스를 제우스에게 희생해야 땅이 다시 곡식을 낼 것이라는 거짓 신탁을 전하게 했다. 주민들의 압박을 받은 아타마스가 아들을 제단으로 데려가자 네펠레는 헤르메스에게 받은 황금빛 털의 숫양을 보내 두 아이를 구했다. 프릭소스와 헬레는 황금 숫양의 등에 올라타 동쪽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두 대륙 사이의 좁은 바다를 건너던 중 헬레가 숫양의 등에서 떨어져 죽었다. 그녀가 빠진 바다는 이후 헬레의 바다라는 뜻의 헬레스폰토스(Hellespont)라 불리게 된다. 이 해협은 에게해에서 트로이 앞바다를 지나 흑해로 들어가는 길목이었다. 카드모스의 딸이 제거하려 했던 한 아이의 이름이 훗날 그리스군이 트로이로 향할 때 반드시 지나야 하는 바다에 남은 것이다.

홀로 살아남은 프릭소스는 콜키스에 도착하여 태양신 헬리오스(Helios)와 페르세이스(Perseis)의 아들 아이에테스의 보호를 받았다. 아이에테스는 키르케(Circe)와 파시파에의 형제였으므로, 콜키스의 왕가는 다시 크레테 왕 미노스의 아내 파시파에와 연결된다. 아이에테스는 프릭소스에게 자신의 딸 칼키오페(Chalciope)를 아내로 주었고, 프릭소스는 자신을 구해준 황금 숫양을 제우스에게 제물로 바쳤다. 숫양의 황금빛 가죽은 아이에테스에게 건네져 아레스의 숲에 있는 참나무에 걸렸다.

아이에테스는 이미 카드모스가 죽인 용에게서 나온 이빨의 절반도 가지고 있었다. 아테나가 테바이의 용에게서 뽑은 이빨을 카드모스와 아이에테스에게 나누어 주었기 때문이다. 이제 카드모스의 딸 이노가 죽이려 했던 프릭소스가 같은 아이에테스에게 황금양털까지 가져왔다. 훗날 이아손은 아이에테스가 보관하고 있던 용의 이빨을 땅에 뿌려 무장한 전사들과 싸운 뒤, 프릭소스가 남긴 황금양털을 가져가야 했다. 테바이에서 시작된 두 개의 사건이 콜키스의 왕 아이에테스에게서 하나로 합쳐진 것이다.

황금양털이 걸린 참나무를 지키는 용은 카드모스가 테바이에서 죽인 용과는 다른 존재였다. 카드모스의 용은 이미 죽었고, 그 이빨이 둘로 나뉘어 테바이와 콜키스로 건너갔다. 콜키스의 용은 잠들지 않는 눈으로 황금양털을 지키던 또 하나의 용이었다. 이아손은 메데이아의 도움을 받아 이 용을 잠재운 뒤에야 황금양털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프릭소스와 칼키오페 사이에서는 아르고스, 멜라스(Melas), 프론티스(Phrontis), 퀴티소로스(Cytisorus)가 태어났다. 네 아들은 콜키스에서 성장한 뒤 아버지의 재산을 찾기 위해 보이오티아의 오르코메노스(Orchomenus)로 향했다. 그러나 항해 도중 폭풍을 만나 배가 부서졌고, 아레스의 섬(Island of Ares)으로 떠밀려 갔다. 마침 콜키스로 향하던 아르고호 원정대가 이들을 발견하여 구해냈다.

프릭소스의 아들들과 이아손은 처음 만난 사이였지만 같은 아이올로스 왕가의 친족이었다. 프릭소스의 아버지 아타마스와 이아손의 할아버지 크레테우스가 형제였기 때문이다. 이아손은 아이올로스의 아들 크레테우스에게서 내려왔고, 프릭소스의 네 아들은 크레테우스의 형제 아타마스에게서 내려왔다. 콜키스에서 그리스로 돌아가던 프릭소스의 아들들은 다시 방향을 돌려 이아손과 함께 아이에테스의 왕궁으로 향했고, 그가 황금양털을 얻을 수 있도록 길을 안내했다. 이노가 프릭소스를 죽이려 했던 사건이 없었다면 황금양털도 콜키스에 가지 않았고, 프릭소스의 아들들이 이아손의 안내자가 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노와 아타마스 사이에서는 레아르코스(Learchus)와 멜리케르테스(Melicertes)가 태어났다. 세멜레가 죽은 뒤 제우스는 갓 태어난 디오니소스를 헤르메스에게 맡겼고, 헤르메스는 아이를 이노와 아타마스에게 데려갔다. 두 사람은 헤라의 눈을 피하기 위해 디오니소스를 여자아이처럼 꾸며 자신들의 집에서 길렀다. 그러나 헤라는 결국 세멜레의 아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디오니소스를 숨겨 기른 부부에게 광기를 내렸다. 광기에 사로잡힌 아타마스는 아들 레아르코스를 사슴으로 착각하여 활로 쏘아 죽였다. 이노 역시 어린 멜리케르테스를 끓는 솥에 넣어 죽인 뒤 그 시신을 안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아우토노에의 아들 악타이온이 사슴으로 변해 자신의 사냥개들에게 죽었다면, 이노의 아들 레아르코스는 아버지의 눈에 사슴으로 보였기 때문에 죽었다. 디오니소스를 둘러싸고 시작된 광기는 카드모스의 두 딸에게서 똑같이 아들을 사슴으로 만드는 죽음으로 나타난 것이다.

바다에 뛰어든 이노는 죽지 않고 레우코테아(Leucothea)라는 바다의 여신이 되었으며, 멜리케르테스도 팔라이몬(Palaemon)이라는 이름의 바다 신이 되었다. 한때 황금 숫양을 타고 바다를 건너던 두 아이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이노가 자신도 아들을 안은 채 바다에 떨어진 뒤, 난파한 항해자들을 구하는 여신으로 바뀐 것이다. 레우코테아는 훗날 트로이 전쟁이 끝난 뒤 고향으로 돌아가던 오디세우스(Odysseus)를 구한다. 칼륍소(Calypso)의 섬을 떠난 오디세우스가 포세이돈이 일으킨 폭풍을 만나 뗏목까지 잃을 위기에 놓이자, 레우코테아는 바닷새처럼 물 위에 솟아올라 나타났다. 그녀는 오디세우스에게 칼륍소가 준 무거운 옷을 벗고 뗏목을 버린 뒤 헤엄치라고 알려주며, 가슴에 두르면 물에 빠져 죽지 않는 자신의 베일을 건넸다. 오디세우스는 처음에는 또 다른 신의 함정이라고 의심했지만, 뗏목이 완전히 부서지자 마침내 그녀의 말을 따랐다. 그는 베일을 두른 채 헤엄쳐 파이아케스인(Phaeacians)의 땅에 도착했고, 육지에 오른 뒤 약속대로 베일을 바다에 던져 돌려주었다.

멜리케르테스의 시신은 돌고래에게 실려 코린토스(Corinth)의 지협에 닿았다. 아타마스의 형제이자 멜리케르테스의 작은아버지인 시시포스는 조카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르고, 팔라이몬이 된 멜리케르테스를 기리기 위해 이스트미아 경기(Isthmian Games)를 열었다. 훗날 올림피아·퓌티아·네메아 경기와 함께 그리스의 네 범그리스 경기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는 이스트미아 경기가 카드모스의 외손자 멜리케르테스의 죽음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노의 가지에서는 바다를 건넌 네 아이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갈라진다. 헬레는 바다에 빠져 헬레스폰토스라는 지명을 남기고, 프릭소스는 콜키스로 건너가 황금양털과 아르고호 원정을 시작한다. 레아르코스는 아버지의 광기 속에서 사슴으로 오인되어 죽으며, 멜리케르테스는 어머니와 함께 바다로 들어가 팔라이몬이 된다. 그리고 이 모든 사건을 일으킨 이노 자신은 레우코테아가 되어, 훗날 트로이에서 돌아오던 오디세우스가 바다에서 죽지 않도록 구해낸다.


┃ 결론

에우로페를 찾아 떠난 카드모스는 누이를 찾지 못했지만, 그 여정의 끝에서 테바이라는 새로운 왕가를 열었다. 아레스의 샘을 지키던 용을 죽이고 그 이빨을 땅에 뿌린 사건에서 스파르토이가 태어났고, 카드모스는 하르모니아와 혼인하여 여러 갈래의 혈통을 남겼다. 그 가운데 아우토노에의 가지에서는 악타이온의 죽음과 아리스타이오스의 이야기가 이어졌고, 다시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저승 이야기로 연결되었다. 아리스타이오스의 이동은 케오스와 리비아, 사르디니아와 시칠리아를 거쳐 다시 디오니소스에게 닿으면서 카드모스 왕가의 다른 가지와 만났다.

세멜레에게서는 디오니소스가 태어났다. 디오니소스는 여러 지역을 떠돌며 자신의 신성을 드러낸 뒤 다시 테바이로 돌아왔고, 낙소스에서는 아리아드네와 혼인했다. 카드모스의 외손자와 에우로페의 손녀가 결합하면서, 에우로페의 실종으로 갈라졌던 아게노르 왕가의 두 가지가 다시 한 가족 안에서 만났다. 이노의 가지에서는 프릭소스와 헬레의 도피가 헬레스폰토스와 황금양털로 이어졌고, 카드모스가 죽인 용의 이빨과 함께 훗날 이아손의 콜키스 원정으로 연결되었다. 이노 자신은 레우코테아가 되어 훨씬 뒤의 시대에 트로이에서 돌아오던 오디세우스를 바다에서 구한다.

이렇게 카드모스의 세 딸에게서 갈라진 혈통만 따라가도 테바이 왕가는 보이오티아 안에 머물지 않고 트라키아와 콜키스, 크레테와 낙소스, 오디세우스의 귀환길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카드모스의 자식 가운데 아직 아가베와 폴뤼도로스의 가지가 남아 있다. 다음 편에서는 아가베와 펜테우스의 비극에서 시작해, 폴뤼도로스에게서 라브다코스와 라이오스로 이어지는 테바이 왕권을 정리한다. 여기에서부터 테바이 신화는 오이디푸스 왕가와 두 차례의 테바이 전쟁으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일리아스 2권 함선 카탈로그의 그리스 중부 지역을 파란색으로 구분한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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