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선 카탈로그 — 1,186척의 배 뒤에 숨은 그리스 신화 ㉑ : 미케네와 스파르타 part2

┃ 들어가며

일리아스 호메로스 1,186척의 배 뒤에 숨은 그리스 신화를 소개하는 함선 일러스트

지난 편에서는 탄탈로스(Tantalus)에서 시작해 펠롭스(Pelops), 아트레우스(Atreus)튀에스테스(Thyestes)로 이어지는 왕가를 따라갔다. 신들의 식탁에서 시작된 탄탈로스의 이야기는 펠롭스의 혼인과 왕권, 아트레우스와 튀에스테스의 복수로 이어졌고, 마침내 아트레우스의 두 아들 아가멤논(Agamemnon)메넬라오스(Menelaus)스파르타(Sparta)틴다레오스(Tyndareus) 왕가와 혼인으로 연결되는 지점까지 왔다. 아가멤논은 클뤼타임네스트라(Clytemnestra)와, 메넬라오스는 헬레네(Helen)와 결혼하면서 펠롭스의 후손들은 미케네(Mycenae)와 스파르타라는 두 왕국의 중심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헬레네의 결혼은 한 왕가의 혼인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녀에게는 메넬라오스가 선택되기 전부터 그리스(Greece) 각지의 수많은 왕과 영웅이 구혼자로 몰려들었고, 틴다레오스는 딸의 남편을 정하는 순간 그들 사이에서 전쟁이 벌어질 가능성을 걱정해야 했다. 결국 구혼자들은 선택된 남편과 헬레네의 혼인을 지키겠다는 맹세로 묶인다. 당시에는 한 번의 결혼을 둘러싼 분쟁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약속이었지만, 훗날 이 맹세는 서로 다른 왕국의 군대를 하나의 방향으로 움직이는 장치가 된다.

같은 무렵 또 하나의 결혼식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진다. 인간과 신의 결혼식에 던져진 황금사과 하나가 세 여신의 다툼을 만들고, 그 선택은 트로이(Troy)의 왕자에게 넘어간다. 인간들은 헬레네의 결혼을 지키기 위한 장치를 만들어두었는데, 신들의 세계에서는 바로 그 결혼을 깨뜨릴 사건이 준비되고 있었던 셈이다. 두 흐름이 만나는 순간 헬레네를 둘러싼 개인적인 사건은 그리스 전체가 움직이는 전쟁으로 확대된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아트레우스의 두 아들은 서로 다른 역할을 맡는다. 아내를 잃은 메넬라오스는 전쟁의 직접적인 당사자가 되고, 형 아가멤논은 여러 왕국에서 모인 군대를 지휘하는 총사령관이 된다. 『일리아스(The Iliad)』 2권의 함선 카탈로그에 이르면 아가멤논은 미케네를 중심으로 100척을, 메넬라오스는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60척을 이끈다. 지난 편에서 왕가의 혼인으로 만났던 두 형제가 이제 모두 160척의 함선을 거느리고 같은 전쟁에 도착하는 것이다.

이번 「함선 카탈로그 — 1,186척의 배 뒤에 숨은 그리스 신화 ㉑ : 미케네와 스파르타 part2」에서는 헬레네의 구혼자들이 맺은 한 번의 맹세가 어떻게 그리스 연합군을 묶는 약속으로 바뀌었는지부터 살펴본다. 이어 펠레우스와 테티스의 결혼식에서 시작된 황금사과와 파리스의 선택, 헬레네가 트로이로 떠난 뒤 이루어진 원정군의 소집을 따라가며, 마지막에는 아가멤논의 100척과 메넬라오스의 60척이 함선 카탈로그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확인해보자.


┃ 헬레네의 구혼자들, 한 번의 맹세가 그리스 연합군이 되다

펠레우스와 테티스의 결혼식에 모인 신들과 황금사과 사건을 그린 루벤스의 신화화
펠레우스와 테티스의 결혼식(The Wedding of Peleus and Thetis),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1636년, 출처 : Wikimedia Commons.

헬레네가 혼인할 나이가 되자 스파르타에는 그리스 각지에서 수많은 구혼자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단순히 이름난 젊은 영웅들이 아니라 여러 지역의 왕과 왕자들이었고, 훗날 『일리아스』 2권의 함선 카탈로그에서 각자의 군대를 이끌고 다시 등장할 인물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틴다레오스에게는 딸의 남편을 고르는 일 자체가 위험한 문제가 되었다. 누구를 선택하든 탈락한 구혼자들이 결정에 불복한다면, 헬레네의 결혼 한 번 때문에 그리스 여러 왕가가 서로 전쟁을 벌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해결책을 제시한 인물로 오디세우스(Odysseus)가 등장한다. 오디세우스는 자신이 헬레네의 남편으로 선택될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대신 틴다레오스에게 구혼자들 사이의 분쟁을 막을 방법을 알려주는 대가로 이카리오스(Icarius)의 딸 페넬로페(Penelope)와 결혼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한다. 그의 제안은 헬레네의 남편을 결정하기 전에 모든 구혼자에게 하나의 맹세를 시키는 것이었다. 누가 헬레네의 남편으로 선택되든 그 결정을 인정하고, 훗날 헬레네와 그 남편의 혼인이 침해당할 경우 모두 힘을 합쳐 그들을 돕겠다는 약속이었다. 틴다레오스는 말을 희생한 뒤 구혼자들을 그 조각 위에 세워 맹세하게 했다고 전한다.

이렇게 구혼자들의 동의를 확보한 뒤 헬레네의 남편으로 선택된 사람이 메넬라오스였다. 다른 구혼자들은 자신이 선택받지 못했음에도 이미 맹세를 했기 때문에 그 결혼을 받아들여야 했다. 당시에는 여러 구혼자 사이의 충돌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장치였지만, 이 약속은 훗날 전혀 다른 규모로 작동하게 된다. 헬레네가 파리스(Paris)와 함께 트로이로 떠난 뒤 메넬라오스가 아가멤논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아가멤논은 그리스의 왕들에게 사절을 보내 과거 헬레네를 두고 맺었던 맹세를 상기시킨다. 트로이 원정을 위한 병력 소집은 바로 이 맹세를 다시 불러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틴다레오스의 맹세는 트로이 전쟁이 시작된 뒤 급하게 만들어진 군사 동맹이 아니다. 전쟁이 일어나기도 전에 헬레네의 결혼을 둘러싸고 그리스 각지의 왕과 영웅들이 이미 하나의 약속으로 묶여 있었다. 나중에 『일리아스』의 함선 카탈로그에서 서로 다른 지역과 서로 다른 지휘관들이 하나의 그리스군으로 모여 있는 모습을 보게 되지만, 그들을 트로이까지 끌어당긴 연결선 가운데 하나는 이미 이 결혼식 이전에 만들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이 헬레네의 결혼을 둘러싼 분쟁을 막기 위해 맹세를 만들고 있을 무렵, 신들의 세계에서는 오히려 또 다른 결혼식이 전쟁의 원인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결혼식의 주인공은 인간 펠레우스(Peleus)와 바다의 여신 테티스(Thetis)였다. 테티스는 아버지보다 위대한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는 예언 때문에 제우스(Zeus)포세이돈(Poseidon)이 결혼을 포기하고 인간 펠레우스에게 보내진 여신이며, 두 사람 사이에서 훗날 아킬레우스(Achilles)가 태어난다. 여러 신들이 이 결혼식에 초대되었지만 불화와 다툼을 상징하는 여신 에리스(Eris)는 초대받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에리스는 자신을 제외한 결혼식에 황금사과 하나를 던진다. 그 사과에는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 주어진다는 뜻의 말이 적혀 있었고, 헤라(Hera)아테나(Athena), 아프로디테(Aphrodite)가 모두 자신이 그 주인이라고 주장하면서 다툼이 시작된다. 제우스는 직접 판정을 내리는 대신 헤르메스(Hermes)에게 세 여신을 트로이 왕자 파리스, 곧 알렉산드로스(Alexandros)에게 데려가도록 한다. 결국 한 인간이 세 여신 가운데 누가 가장 아름다운지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파리스는 『일리아스』에서 알렉산드로스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이 이름 때문에 훗날의 알렉산드로스 대왕(Alexander the Great)을 떠올리기 쉽지만 두 인물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흥미로운 점은 ‘알렉산드로스’라는 이름이 알렉산드로스 대왕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사용되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기원전 13세기경 히타이트(Hittites) 문헌에는 트로이와 연결되는 윌루사(Wilusa)의 왕 알락산두(Alaksandu)가 등장하는데, 이 이름은 알렉산드로스와 매우 유사해 오래전부터 파리스의 또 다른 이름과 비교되어 왔다. 따라서 파리스의 알렉산드로스라는 이름은 후대의 마케도니아(Macedonia) 왕과 연결된다기보다, 오히려 트로이와 아나톨리아(Anatolia) 세계의 오래된 이름 전통을 떠올리게 하는 흔적으로 볼 수 있다.

세 여신은 파리스에게 각각 자신의 선택에 대한 대가를 제시한다. 헤라는 권력과 왕권을, 아테나는 전쟁에서의 승리를, 아프로디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을 약속한다. 파리스는 아프로디테를 선택했고, 아프로디테가 그에게 약속한 여성이 바로 헬레네였다. 문제는 그때 헬레네가 이미 메넬라오스와 결혼해 스파르타의 왕비가 되어 있었다는 데 있었다. 인간 세계에서는 수많은 구혼자가 헬레네의 결혼을 지키겠다고 맹세해 놓았는데, 신들의 세계에서는 아프로디테가 바로 그 헬레네를 다른 남자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이 두 사건을 나란히 놓으면 트로이 전쟁으로 향하는 구조가 선명해진다. 틴다레오스의 맹세는 헬레네의 결혼이 깨질 경우 움직일 수많은 인간을 이미 묶어두었고, 에리스의 황금사과에서 시작된 파리스의 심판은 바로 그 맹세를 작동시킬 사건을 만들어낸다. 한쪽에서는 전쟁이 일어났을 때 움직일 사람들을 준비하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들을 움직이게 할 원인을 준비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이 결혼식에는 『일리아스』를 생각하면 더욱 기묘한 점이 하나 남는다. 에리스가 황금사과를 던진 장소는 다름 아닌 펠레우스와 테티스의 결혼식이었다. 그 사건에서 파리스의 심판이 나오고, 파리스가 헬레네를 얻으면서 트로이 전쟁이 시작되며, 그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그리스 영웅이 되는 사람이 바로 이 결혼식에서 태어나게 될 두 사람의 아들 아킬레우스이다. 아킬레우스를 탄생시킨 결혼식이 동시에 아킬레우스가 죽게 될 전쟁의 가장 오래된 발화점 가운데 하나가 된 것이다.

파리스는 이후 아프로디테의 약속을 믿고 스파르타로 향한다. 그리고 그가 헬레네와 함께 트로이로 떠나는 순간, 오래전 틴다레오스가 구혼자들에게 받아두었던 맹세가 효력을 갖기 시작한다. 헬레네를 두고 한때 서로 경쟁했던 남자들은 이제 그녀를 되찾기 위해 같은 방향으로 움직여야 했다. 스파르타의 한 결혼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약속이 마침내 그리스 각지의 왕과 영웅, 그리고 수백 척의 함선을 트로이로 불러모으는 장치로 바뀌는 순간이다.


┃ 파리스와 헬레네, 결혼의 맹세가 전쟁의 동원이 되다

트로이 왕자 파리스와 스파르타의 헬레네가 함께 있는 모습을 그린 신고전주의 회화
파리스와 헬레네(Paris and Helen), 자크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 1788년, 출처 : Wikimedia Commons.

아프로디테에게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을 약속받은 파리스는 결국 스파르타로 향한다. 그는 트로이의 왕자라는 신분으로 메넬라오스의 궁정에 들어갔고, 메넬라오스는 그를 손님으로 받아들인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손님과 주인 사이의 관계인 크세니아(xenia)는 단순한 환대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낯선 이를 보호하고 대접한 주인은 그에 대한 예의를 기대할 수 있었고, 손님 역시 자신을 받아들인 집의 질서를 침해해서는 안 되었다. 따라서 파리스가 메넬라오스의 집에서 헬레네와 관계를 맺고 그녀를 데리고 떠나는 사건은 한 왕의 아내를 빼앗은 일인 동시에 손님이 주인의 신뢰를 깨뜨린 행위이기도 했다.

당시 메넬라오스는 크레테(Crete)로 떠나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 사이 파리스는 헬레네와 함께 스파르타를 떠나 트로이로 향한다. 그러나 헬레네가 어떤 방식으로 파리스를 따라갔는지는 고대 전승에서도 하나로 정리되지 않는다. 어떤 이야기에서는 파리스가 헬레네를 강제로 납치한 것으로 나타나고, 다른 전승에서는 아프로디테의 힘에 이끌린 헬레네가 스스로 그와 함께 떠난 것으로 묘사된다. 또 파리스가 메넬라오스의 재물까지 가지고 떠났다는 이야기 역시 전해진다. 따라서 흔히 말하는 ‘헬레네 납치’라는 표현은 사건 전체를 이해하기 위한 편리한 이름이지만, 고대 신화 안에서는 헬레네의 의지와 책임을 두고 이미 여러 다른 해석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 사건이 개인적인 부부 문제로 끝날 수 없었던 이유는 앞에서 살펴본 틴다레오스의 맹세 때문이었다. 메넬라오스는 헬레네를 되찾기 위해 형 아가멤논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아가멤논은 과거 헬레네에게 청혼했던 왕과 영웅들에게 사절을 보내 그들이 했던 약속을 상기시킨다. 당시에는 헬레네의 남편을 둘러싼 구혼자들 사이의 싸움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맹세였지만, 이제 그 약속은 선택된 남편의 혼인을 지키기 위한 의무로 돌아왔다. 한때 서로 경쟁자였던 사람들이 같은 전쟁에 참가해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맹세가 있었다고 해서 모든 영웅이 기꺼이 전쟁터로 달려온 것은 아니었다. 오디세우스는 페넬로페와 결혼해 어린 텔레마코스(Telemachus)를 두고 있었고, 트로이 원정에 참가하지 않기 위해 미친 사람처럼 행동했다는 전승이 전해진다. 그는 소와 나귀를 함께 쟁기에 매고 밭을 갈거나 소금을 뿌리며 광기를 가장했지만, 팔라메데스(Palamedes)가 그 행동을 시험하면서 위장이 드러난다. 앞에서 다나오스(Danaus)의 딸 아미모네(Amymone)에게서 이어진 혈통을 따라가며 만났던 바로 그 팔라메데스이다. 서로 다른 계보를 따라가며 등장했던 인물들이 트로이 원정의 소집 단계에서 다시 하나의 사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아킬레우스 역시 처음부터 전쟁에 나선 것은 아니다. 테티스는 아들이 트로이에 가면 짧지만 영광스러운 삶을 살게 되고, 가지 않으면 오래 살 수 있다는 운명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킬레우스를 스퀴로스(Scyros)섬의 왕 뤼코메데스(Lycomedes)에게 보내 여자들 사이에 숨겼다는 후대 전승이 생긴다. 그러나 오디세우스가 무기와 장신구를 섞어놓고 전쟁의 나팔을 울려 아킬레우스가 본능적으로 무기를 집어 들게 하면서 그의 정체가 드러났다고 전해진다. 펠레우스와 테티스의 결혼식에서 시작된 황금사과의 사건이 결국 그 결혼에서 태어난 아들까지 다시 전쟁으로 불러들이는 것이다.

그리스의 여러 왕과 영웅들은 이렇게 하나씩 원정에 합류하고, 최종적으로 아울리스(Aulis)에 모인다. 여기에서 『일리아스』 2권의 함선 카탈로그가 보여주는 거대한 연합군의 실체가 만들어진다. 미케네의 아가멤논과 스파르타의 메넬라오스, 아르고스(Argos)디오메데스(Diomedes), 이타케(Ithaca)의 오디세우스, 크레테의 이도메네우스(Idomeneus)메리오네스(Meriones), 살라미스(Salamis)아이아스(Ajax), 아테나이(Athens)메네스테우스(Menestheus), 프티아(Phthia)의 아킬레우스 등 지금까지 서로 다른 혈통과 지역을 따라가며 만났던 인물들이 하나의 항구에 집결하기 시작한다.

이때 그리스군 전체의 중심에 선 사람이 아가멤논이다. 그는 헬레네의 남편이 아니었지만 가장 강력한 왕 가운데 하나였고, 미케네를 기반으로 다른 왕들을 묶어 원정을 지휘하는 총사령관의 자리에 오른다. 반면 전쟁의 직접적인 당사자는 동생 메넬라오스이다. 펠롭스에게서 갈라진 두 형제가 한쪽에서는 미케네의 군사적 중심을, 다른 한쪽에서는 스파르타의 혼인 문제를 맡으면서 트로이 원정의 중심축을 이루게 된 것이다.

따라서 트로이 전쟁은 파리스가 헬레네를 데려간 한 사건만으로 갑자기 만들어진 전쟁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보다 앞서 틴다레오스의 맹세가 여러 왕을 하나의 약속으로 묶어두었고, 펠레우스와 테티스의 결혼식에서 에리스가 던진 황금사과는 파리스의 심판을 낳았으며, 아프로디테의 약속은 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헬레네를 파리스에게 연결했다. 그리고 파리스가 실제로 스파르타의 질서를 깨뜨리는 순간, 그동안 서로 떨어져 있던 약속과 예언, 왕가와 혼인 관계가 한꺼번에 작동하기 시작한다. 이제 미케네와 스파르타를 각각 다스리게 된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를 따라가면, 펠롭스의 후손들이 왜 『일리아스』 2권의 함선 카탈로그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 가운데 하나로 등장하는지를 직접 확인할 수 있다.


┃ 아가멤논의 100척과 메넬라오스의 60척, 펠롭스의 후손들이 함선 카탈로그에 도착하다

일리아스 함선 카탈로그의 펠로폰네소스 권역을 빨간색으로 표시한 지도

트로이 원정을 위해 그리스 각지의 왕과 영웅들이 모이면서 펠롭스의 후손인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는 서로 다른 위치에서 전쟁의 중심에 선다. 메넬라오스는 헬레네를 잃은 직접적인 당사자였고, 아가멤논은 여러 지역에서 모인 군대를 하나로 묶어 이끄는 총사령관이 되었다. 같은 아트레우스의 두 아들이지만 『일리아스』 2권의 함선 카탈로그에서 두 사람이 차지하는 위치와 세력의 규모는 같지 않다.

먼저 아가멤논이 이끄는 지역은 미케네를 중심으로 한다. 호메로스는 미케네와 코린토스(Corinth), 클레오나이(Cleonae), 오르네이아이(Orneae), 아라이튀레아(Araethyrea), 시퀴온(Sicyon), 휘페레시에(Hyperesia), 고노에사(Gonoessa)아이기온(Aegium)을 비롯해 펠로폰네소스(Peloponnese) 북동부와 북부의 여러 지역을 그의 세력권으로 묶는다. 그리고 이들에게 배정된 함선은 100척이다. 함선 카탈로그에 등장하는 그리스 지휘관 가운데 가장 많은 수의 배를 거느린 인물이 아가멤논이다.

이 수치는 아가멤논이 단순히 메넬라오스의 형이기 때문에 원정의 지휘자가 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는 그리스군 전체에서 가장 큰 규모의 세력을 직접 이끌고 있었다. 호메로스 역시 아가멤논의 병력이 가장 많았다고 강조하며, 그가 자신의 사람들을 이끌고 다른 그리스군 사이에서 뛰어난 존재로 나타난다고 묘사한다. 트로이 전쟁의 이유는 메넬라오스에게 있었지만, 그 전쟁을 실제 대규모 원정으로 조직할 수 있는 힘은 미케네의 아가멤논에게 있었던 셈이다.

여기에는 앞에서 살펴본 미케네 왕권의 긴 이동이 그대로 쌓여 있다. 미케네는 처음에는 페르세우스(Perseus)가 세운 왕국으로 시작했고, 그의 후손 스테넬로스(Sthenelus)에우뤼스테우스(Eurystheus)로 이어졌다. 그러나 에우뤼스테우스가 죽은 뒤 왕권은 그의 외삼촌인 아트레우스에게 넘어갔고, 아트레우스와 튀에스테스의 싸움을 거쳐 결국 아가멤논이 다시 미케네의 왕이 된다. 따라서 카탈로그에서 아가멤논의 이름 아래 놓인 100척은 한 영웅 개인의 군사력만을 보여주는 숫자가 아니다. 페르세우스 왕가에서 펠롭스 왕가로 넘어온 미케네의 왕권이 트로이 전쟁 시점에 얼마나 큰 세력으로 성장했는지를 보여주는 결과이기도 하다.

반면 메넬라오스의 세력은 라케다이몬(Lacedaemon), 곧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다. 호메로스는 파리스(Pharis)와 스파르타, 메세(Messe), 브뤼세이아이(Bryseae), 아우게이아이(Augeiae), 아뮈클라이(Amyclae), 헬로스(Helos), 라아스(Laas), 오이튈로스(Oetylus)를 비롯한 라케다이몬의 여러 지역을 그의 지휘 아래 놓고, 모두 60척의 함선을 배정한다. 아가멤논의 100척보다는 적지만 결코 작은 규모는 아니다. 무엇보다 메넬라오스의 군대는 다른 부대와 따로 진을 치고 있었다고 호메로스는 덧붙이며, 그 자신이 분노에 차 병사들을 독려했다고 묘사한다. 이 전쟁이 메넬라오스에게는 다른 왕들의 원정과 달리 개인적인 싸움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메넬라오스가 이 60척을 이끌 수 있게 된 과정 역시 혼인과 왕위 계승을 통해 만들어졌다. 그는 본래 미케네의 아트레우스 왕가 출신이지만 헬레네와 결혼하면서 스파르타 왕가에 들어갔고, 틴다레오스에게서 왕권을 이어받아 라케다이몬을 다스리게 되었다. 따라서 트로이 전쟁 당시 스파르타군의 왕은 라케다이몬의 오래된 왕가에서 직접 내려온 사람이 아니라 미케네에서 건너와 혼인으로 왕위를 얻은 펠롭스의 후손이었다. 아트레우스의 두 아들이 각각 미케네와 스파르타라는 두 거대한 세력의 왕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이렇게 보면 펠롭스 왕가가 트로이 원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하다. 아가멤논의 미케네 세력 100척과 메넬라오스의 라케다이몬 세력 60척을 합치면 두 형제에게서만 160척의 함선이 나온다. 물론 함선 카탈로그에서 각 부대는 독립된 지역 세력으로 기록되지만, 혈통을 따라가면 이 두 대규모 부대를 하나의 아트레우스 왕가가 동시에 이끌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탄탈로스에서 시작해 펠롭스와 아트레우스까지 내려왔던 한 가문의 혈통이 이제 그리스 연합군의 가장 큰 중심 가운데 하나가 된 셈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펠롭스라는 이름 자체도 다시 의미를 갖는다. 소아시아(Asia Minor)에서 그리스로 건너와 오이노마오스(Oenomaus)를 꺾고 새로운 왕가를 세웠던 펠롭스의 이름은 훗날 펠로폰네소스라는 넓은 지역의 이름으로 남는다. 여러 세대가 지난 트로이 전쟁 시점에는 그의 후손들이 그 펠로폰네소스의 핵심 지역들을 실제로 지배하면서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다시 소아시아의 트로이를 향한다. 조상이 동쪽에서 그리스로 건너왔던 왕가가 수 세대 뒤 거꾸로 서쪽에서 동쪽을 향해 군대를 보내는 모양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더구나 이 전쟁에는 펠롭스 가문의 오래된 갈등까지 함께 실려 있다. 아가멤논이 트로이에 머무는 동안 미케네에는 튀에스테스의 아들 아이기스토스(Aegisthus)가 남아 있었고, 클뤼타임네스트라와의 관계를 통해 다시 아트레우스 집안에 접근한다. 트로이 전쟁이 끝나고 아가멤논이 귀환하면, 전쟁보다 훨씬 오래된 아트레우스와 튀에스테스의 싸움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따라서 아가멤논의 100척은 트로이를 향해 떠나는 미케네의 거대한 군사력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대규모 원정을 위해 아가멤논이 왕국을 비운 사이 미케네 내부의 오래된 복수가 다시 살아날 조건이 만들어졌음을 함께 떠올리게 한다.

탄탈로스에서 시작한 혈통은 이렇게 펠롭스와 아트레우스,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를 거쳐 마침내 『일리아스』 2권의 함선 카탈로그에 도착한다. 탄탈로스의 후손들은 더 이상 한 왕가의 비극 속에만 머무는 사람들이 아니다. 한 사람은 100척을 이끌고 그리스군 전체를 지휘하고, 다른 한 사람은 60척을 이끌고 자신의 아내를 되찾기 위해 트로이로 향한다. 펠롭스 가문의 오래된 살인과 왕위 경쟁, 혼인과 복수가 이제 그리스 전체가 움직이는 전쟁의 중심으로 확대된 것이다.


┃ 결론

헬레네의 결혼을 둘러싸고 만들어진 틴다레오스의 맹세는 처음부터 트로이 전쟁을 위해 준비된 약속이 아니었다. 수많은 구혼자 가운데 한 사람을 선택했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왕가들의 충돌을 막기 위한 장치였다. 그러나 메넬라오스가 헬레네의 남편으로 선택되고, 파리스가 그녀를 트로이로 데려가면서 이 오래된 약속은 전혀 다른 규모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한 여인의 혼인을 지키기 위해 맺었던 맹세가 그리스 여러 지역의 왕과 영웅을 하나의 원정군으로 묶어내는 동원의 근거가 된 것이다.

그 맹세의 반대편에서는 펠레우스와 테티스의 결혼식에서 시작된 또 하나의 흐름이 움직이고 있었다. 에리스가 던진 황금사과는 세 여신의 다툼과 파리스의 심판으로 이어지고, 아프로디테가 약속한 헬레네 때문에 인간들이 만들어둔 맹세가 실제로 작동한다. 더욱 기묘한 것은 이 모든 사건이 시작된 결혼식에서 태어난 아킬레우스가 훗날 바로 그 전쟁의 가장 강력한 영웅 가운데 하나가 된다는 점이다. 구혼자들 사이의 전쟁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인간의 약속과 전쟁의 원인을 만들어낸 신들의 다툼이 서로 다른 자리에서 준비되다가 헬레네를 통해 하나로 합쳐진다.

그리고 함선 카탈로그에 도착하면 이 연결은 실제 병력의 규모로 모습을 드러낸다. 아가멤논은 미케네와 주변 지역에서 100척을 이끌고 그리스군 전체의 총사령관이 되며, 메넬라오스는 라케다이몬의 60척을 이끌고 자신의 아내를 되찾기 위한 전쟁에 참가한다. 아트레우스의 두 아들이 지휘하는 배만 모두 160척이다. 지난 편에서 탄탈로스와 펠롭스, 아트레우스와 튀에스테스의 왕가를 따라왔을 때에는 한 집안 안에서 반복되는 살인과 복수처럼 보였던 혈통이, 이제는 그리스 전체의 전쟁을 움직이는 거대한 군사 세력으로 바뀌어 있다.

조상 펠롭스는 소아시아에서 그리스로 건너와 새로운 왕가를 만들었다. 그리고 여러 세대 뒤 그의 후손들은 미케네와 스파르타의 왕이 되어 다시 반대 방향으로 바다를 건너 소아시아의 트로이를 향한다. 한 가문의 이동과 혼인, 왕권과 복수가 수 세대를 지나 160척의 함선으로 돌아오는 셈이다. 「함선 카탈로그 — 1,186척의 배 뒤에 숨은 그리스 신화 ㉑ : 미케네와 스파르타 part2」는 바로 이 지점에서 끝난다. 이제 미케네와 스파르타에서 잠시 시선을 돌려, 다음 편에서는 아테나이의 오래된 왕가와 그곳에서 출항한 함선의 뒤를 따라갈 차례이다.


일리아스 2권 함선 카탈로그의 펠로폰네소스 지역을 빨간색으로 구분한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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