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선 카탈로그 — 1,186척의 배 뒤에 숨은 그리스 신화 ㉘ : 아르카디아
┃ 들어가며

함선 카탈로그라는 이름만 놓고 보면 자연스럽게 바다부터 떠올리게 된다. 항구가 있는 도시와 섬, 배를 타고 살아온 사람들이 각자의 함대를 이끌고 트로이로 향하는 목록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긴 배의 행렬 속에는 조금 어울리지 않는 땅도 끼어 있다. 바로 아르카디아(Arcadia)이다.
지난 편에서는 프티아(Phthia)의 왕가를 따라가며 아이아코스에게서 펠레우스와 아킬레우스로 이어지는 혈통이 마침내 뮈르미도네스의 50척에 도착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바다의 여신 테티스와 연결된 왕가답게 프티아의 이야기는 결국 트로이로 향하는 함대와 자연스럽게 만났다. 그런데 이번에 따라갈 아르카디아는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아르카디아를 따라가면 계속해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바다가 아니라 산과 숲이다. 왕가의 오래된 이야기에는 늑대와 곰이 나타나고, 그 후손들의 이야기에서도 사냥과 야생의 이미지가 끊임없이 되풀이된다. 함선 카탈로그를 읽고 있는데 어느 순간 배보다 짐승과 산 이야기가 훨씬 많아지는 이상한 구간인 셈이다.
그렇다고 이 긴 신화가 함선 카탈로그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다. 산과 숲에 흩어져 있던 여러 혈통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결국 트로이 전쟁 세대의 한 지휘관에게 도착하고, 그때서야 왜 이 내륙의 사람들이 함선 목록 한가운데에 들어와 있는지도 보이기 시작한다. 바다와 별로 친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어떻게 트로이 원정군의 일부가 되었는지를 확인하는 것 역시 이번 편의 재미 가운데 하나이다.
「함선 카탈로그 — 1,186척의 배 뒤에 숨은 그리스 신화 ㉘ : 아르카디아」에서는 아르카디아의 가장 오래된 왕가에서 출발해 산과 숲을 오가는 여러 세대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려고 한다. 함선을 찾아 시작한 길이 어쩌다 늑대와 곰, 멧돼지가 뛰어다니는 산속까지 들어가게 되었는지는 이제부터 천천히 살펴보자.
┃ 뤼카온에서 아르카스까지, 늑대가 된 왕의 집안에서 곰자리가 태어나다

아르카디아의 오래된 왕가를 따라가면 가장 먼저 펠라스고스(Pelasgus)와 그의 아들 뤼카온(Lycaon)을 만나게 된다. 펠라스고스는 이 지역의 가장 오래된 조상 가운데 하나로 기억되며, 그의 아들 뤼카온은 훗날 아르카디아라고 불리게 될 땅을 다스리는 왕이 된다. 그러나 뤼카온의 이름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왕국을 얼마나 잘 다스렸는가가 아니라 제우스(Zeus)를 자신의 식탁으로 불러들여 벌인 기괴한 시험이었다.
뤼카온은 자신의 앞에 나타난 존재가 정말 제우스인지 확인하려 했다. 신이라면 인간이 알아차릴 수 없는 것까지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그는 인간의 살을 음식에 섞어 식탁에 올린다. 제우스가 그것을 모르고 먹는다면 신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고, 알아차린다면 비로소 자신의 앞에 있는 존재가 진짜 신이라는 사실이 증명되는 방식이었다. 신의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 인간을 죽여 음식으로 만든 셈이다.
이 장면은 앞에서 만났던 탄탈로스(Tantalus)를 떠올리게 한다. 탄탈로스 역시 신들이 정말 모든 것을 알아볼 수 있는지를 시험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 펠롭스(Pelops)를 죽여 음식으로 내놓았다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신에게 인간의 고기를 먹이려 했고, 그 목적에는 상대가 정말 신인지 시험하려는 태도가 들어 있다. 신과 인간 사이의 경계를 확인하려고 벌인 일이 오히려 자신이 넘지 말아야 할 경계를 넘어버리는 행동이 된 것이다.
그러나 제우스는 식탁에 올라온 음식의 정체를 즉시 알아차린다. 그는 분노하여 식탁을 뒤엎고 뤼카온의 집을 파괴한다. 그리고 뤼카온은 인간의 모습을 잃고 늑대로 변한다. 인간의 지성과 언어를 이용해 신을 속이려 했던 왕이 이제 인간 사회 밖의 짐승이 되어 숲으로 밀려나는 것이다. 뤼카온이라는 이름 자체가 그리스어로 늑대를 뜻하는 말과 연결되어 있으며, 훗날 인간이 늑대로 변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라이칸스로피(lycanthropy)’라는 말 역시 이 이름과 같은 뿌리를 가진다.
하지만 뤼카온의 집안 이야기는 늑대가 된 왕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의 딸 가운데 한 사람이 칼리스토(Callisto)였다. 칼리스토는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인간과 짐승 사이의 경계를 넘어가게 된다. 뤼카온이 자신의 행동에 대한 벌로 늑대가 되었다면, 칼리스토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사건들에 휘말리면서 곰의 모습으로 살아가게 된다.
칼리스토는 사냥의 여신 아르테미스(Artemis)를 따르며 산과 숲을 돌아다니던 젊은 여성이었다. 아르테미스를 따르는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혼인과 남성을 멀리하고 여신과 함께 사냥하며 살아가고 있었지만, 어느 날 제우스가 그녀에게 접근한다. 제우스는 칼리스토를 얻기 위해 아르테미스의 모습으로 나타났다고도 하며, 결국 칼리스토는 제우스의 아이를 가지게 된다.
처음에는 임신 사실을 숨길 수 있었지만 몸의 변화까지 계속 감출 수는 없었다. 어느 날 아르테미스와 다른 여성들이 함께 목욕하게 되면서 칼리스토가 아이를 가진 사실이 드러난다. 아르테미스와 함께 살아가던 집단에서 칼리스토는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자리에 머물 수 없게 되었고, 결국 그 곁에서 쫓겨난다. 숲에서 여신을 따라 자유롭게 사냥하던 삶 역시 여기에서 끝난다.
그리고 칼리스토는 아들을 낳는다. 그 아이가 바로 아르카스(Arcas)이다. 뤼카온에게서 한 세대가 내려와 태어난 이 아이의 이름은 훗날 이 지역 전체의 이름과 연결된다. 아직 우리가 알고 있는 ‘아르카디아’라는 이름에 도착하기 전, 먼저 그 이름을 가진 한 사람이 태어난 것이다. 하지만 칼리스토에게 아들의 탄생이 평온한 삶을 돌려주지는 않는다. 제우스와 관계하여 아이까지 낳았다는 사실은 헤라(Hera)의 분노를 불러왔고, 칼리스토는 인간의 모습을 잃고 곰으로 변한다. 아버지 뤼카온이 늑대가 된 데 이어 딸 칼리스토까지 짐승의 모습으로 숲을 떠돌게 된 것이다. 한 세대를 사이에 두고 같은 집안에서 왕은 늑대가 되고 그의 딸은 곰이 된다.
그러나 곰의 몸을 갖게 되었다고 해서 칼리스토의 정신까지 짐승으로 바뀐 것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여전히 인간으로 살았던 기억이 남아 있었다. 한때 자신이 사냥하던 숲을 이제는 사냥감의 모습으로 돌아다녀야 했고, 다른 짐승들을 두려워하면서도 인간 사냥꾼에게 발견되는 것 역시 피해야 했다. 사냥의 여신을 따라 활을 들고 숲을 돌아다니던 여성이 이제 자신과 같은 사냥꾼의 화살을 피해 숨어야 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동안 아르카스는 어머니의 운명을 알지 못한 채 성장한다. 그는 사냥에 능한 젊은이가 되었고 어느 날 숲에서 커다란 곰 한 마리를 발견한다. 눈앞의 곰이 자신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알 수 없었던 아르카스는 자연스럽게 무기를 들고 그 짐승을 겨눈다. 반면 곰이 된 칼리스토에게 눈앞의 사냥꾼은 자신이 낳았던 아들이었다. 말을 할 수 없으니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줄 방법도 없었다.
뤼카온의 집안에서 또다시 부모와 자식 사이에 죽음이 놓이는 순간이었다. 할아버지 뤼카온은 인간의 살을 제우스의 식탁에 올렸고, 이제 손자 아르카스는 아무것도 모른 채 자신의 어머니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 다만 이번에는 마지막 순간에 제우스가 개입한다. 아들이 어머니를 죽이는 일을 막기 위해 칼리스토와 아르카스를 인간 세계에서 떼어내 하늘로 올려보낸 것이다.
칼리스토는 하늘에서 큰곰자리(Ursa Major)가 된다. 그리고 아르카스 역시 어머니와 함께 별자리로 올라가 곰 또는 곰을 지키는 존재와 연결된다. 오늘날 익숙한 이야기에서는 칼리스토를 큰곰자리, 아르카스를 작은곰자리(Ursa Minor)와 연결하기도 한다. 또 다른 오래된 이야기에서는 아르카스를 큰곰자리 곁에서 움직이는 목동자리(Boötes), 곧 ‘곰을 지키는 자’로 설명한다. 어느 모습으로 놓든 하늘에서도 어머니와 아들은 서로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곰과 그 곰을 따라 움직이는 별자리로 함께 남게 된다.
그래서 아르카디아 왕가의 시작에는 유난히 늑대와 곰이 함께 붙어 있다. 뤼카온은 인간의 살을 이용해 제우스를 시험한 뒤 늑대가 되었고, 그의 딸 칼리스토는 제우스의 아이를 낳은 뒤 곰이 되었으며, 그 아들 아르카스는 성장한 뒤 자신의 어머니인 줄도 모르고 그 곰을 사냥하려 한다. 한 집안의 세 세대가 인간과 야생동물, 사냥꾼과 사냥감의 자리를 계속 뒤바꾸며 이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가운데 땅에 남은 이름은 아르카스였다. 그가 성장하여 이 지역을 다스리게 되면서 이전에 펠라스고스와 뤼카온의 이름으로 이어져오던 땅은 그의 이름을 따라 아르카디아라고 불리게 된다. 훗날 『일리아스』의 함선 카탈로그에서 우리가 만나게 될 ‘아르카디아 사람들’이라는 이름의 가장 오래된 뿌리가 바로 여기까지 올라가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아가페노르의 60척까지는 몇 세대를 더 내려가야 한다. 하늘에는 칼리스토가 곰으로 남고, 땅에는 아르카스의 이름이 아르카디아로 남은 뒤 그의 자식들에게서 다시 여러 지역과 왕가가 갈라져 나온다. 이제 그 아르카스의 후손들을 따라가면 마침내 바다조차 없는 산악지대 아르카디아에서 60척의 함선을 이끌고 트로이로 향하는 아가페노르에게 도착하게 된다.
┃ 아르카스의 후손들, 갈라진 아르카디아에서 아탈란테까지

아르카스가 아르카디아의 왕이 된 뒤 그의 혈통은 다시 여러 갈래로 나뉘기 시작한다. 아르카스에게는 아잔(Azan), 아페이다스(Apheidas), 엘라토스(Elatus)라는 세 아들이 있었고, 아버지가 죽은 뒤 세 형제는 아르카디아의 땅을 나누어 가진다. 아잔은 자신의 이름을 따라 아자니아(Azania)라 불리게 되는 지역을 차지하고, 아페이다스는 테게아(Tegea)를 중심으로 한 땅을, 엘라토스는 퀼레네 산(Mount Cyllene)을 비롯한 북쪽 지역을 차지한다. 한 사람의 이름을 따라 아르카디아라 불리게 된 땅이 이제 그의 아들 세 명에게서 다시 여러 지역으로 갈라지는 것이다.
이 가운데 아페이다스의 혈통은 테게아의 왕가로 이어진다. 아페이다스에게서 알레오스(Aleus)가 나오고, 알레오스는 테게아의 왕이 되어 이 지역을 중요한 중심지로 만든다. 반면 다른 가지들은 아르카디아의 여러 산과 들판으로 퍼져나가면서 서로 다른 지역의 왕가를 만든다. 아르카디아라는 하나의 이름 아래 실제로는 여러 작은 지역과 왕가가 함께 존재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왕가의 시간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뤼카온의 집안에서 벌어진 일이 아르카디아 안에만 머물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이어진다. 제우스가 인간의 살을 식탁에 올린 뤼카온과 그의 아들들을 벌인 뒤, 살아남은 아들 가운데 뉙티모스(Nyctimus)가 왕위를 이어받는다. 그리고 바로 그의 시대에 데우칼리온(Deucalion)의 대홍수가 일어났다고 전해진다. 어떤 이야기에서는 이 홍수 자체가 뤼카온과 그의 아들들이 저지른 불경에 대한 벌이었다고 설명한다. 한 왕가가 신을 시험하기 위해 벌인 식탁의 사건이 결국 한 집안의 몰락을 넘어 인간 세계 전체를 덮는 재앙으로 확대되는 것이다.
제우스가 내린 비는 그리스의 넓은 지역을 물에 잠기게 했고, 프로메테우스(Prometheus)의 아들 데우칼리온과 그의 아내 퓌라(Pyrrha)는 미리 준비한 궤에 올라 살아남는다. 여러 날 동안 물 위를 떠돌던 두 사람은 마침내 높은 산에 닿았고, 홍수가 끝난 뒤 다시 인간들이 살아갈 세계를 시작한다. 뤼카온의 시대가 인간의 불경과 파괴로 닫힌다면, 데우칼리온의 홍수 뒤에는 새로운 인간 세대가 다시 시작되는 셈이다.
하지만 아르카디아의 왕가 역시 이 재앙으로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아르카스의 후손들은 다시 여러 지역에서 왕가를 이어가고, 그 가운데 테게아를 중심으로 한 혈통에서는 알레오스와 그의 아들 뤼쿠르고스(Lycurgus)가 등장한다. 뤼쿠르고스에게는 안카이오스(Ancaeus), 에포코스(Epochus), 암피다마스(Amphidamas), 이아소스(Iasus)라는 아들들이 있었고, 이들의 이름은 다시 여러 영웅 이야기로 갈라져 나간다.
특히 안카이오스는 훗날 칼뤼돈(Calydon)의 멧돼지 사냥에 참가한다. 앞에서 펠레우스와 에우뤼티온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이미 만났던 바로 그 사냥이다. 아르테미스가 칼뤼돈에 거대한 멧돼지를 보내자 그리스 여러 지역에서 영웅들이 모였고, 아르카디아에서는 안카이오스와 케페우스(Cepheus)가 참가한다. 안카이오스는 거대한 멧돼지를 상대하다 그 자리에서 죽는다. 하나의 아르카디아 왕가가 이때 이미 펠레우스(Peleus)가 속한 프티아, 살라미스(Salamis)의 텔라몬(Telamon), 스파르타(Sparta)의 디오스쿠로이(Dioscuri), 아테나이(Athens)의 테세우스(Theseus) 같은 다른 지역의 영웅들과 같은 사건 안에서 만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뤼쿠르고스의 또 다른 아들 이아소스에게서 이 왕가의 가장 유명한 여성 가운데 한 사람이 태어난다. 그의 이름이 아탈란테(Atalanta)이다. 이아소스는 아들을 원했기 때문에 딸이 태어나자 아이를 산에 버렸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버려진 아기는 죽지 않았다. 암곰 한 마리가 나타나 젖을 먹였고, 이후 사냥꾼들이 아이를 발견해 데려가면서 아탈란테는 산과 숲 속에서 성장한다. 왕의 딸로 태어났지만 왕궁에서 자라지 않고 야생의 짐승과 사냥꾼들의 세계에서 자란 것이다.
성장한 아탈란테는 혼인을 피하고 사냥을 하며 살아간다. 그녀에게 접근한 켄타우로스 로이코스(Rhoecus)와 휠라이오스(Hylaeus)가 강제로 그녀를 범하려 하자 아탈란테는 두 사람을 활로 쏘아 죽인다. 어린 시절부터 산에서 자란 아탈란테에게 숲은 보호받아야 할 낯선 공간이 아니라 자신이 가장 익숙하게 움직이는 장소였다. 다른 영웅들이 도시와 왕궁에서 출발해 산으로 들어간다면, 아탈란테는 처음부터 산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운 사람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아탈란테의 이름은 아르고호(Argo) 원정의 이야기와도 연결된다. 어떤 이야기에서는 그녀가 아르고호에 올라 이아손(Jason)과 다른 영웅들과 함께 콜키스(Colchis)로 향했다고 전해지지만, 다른 이야기에서는 아탈란테 자신은 원정에 참가하고 싶어 했으나 이아손이 한 여성이 수많은 남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면 다툼이 생길 것을 걱정해 그녀를 데려가지 않았다고 한다. 실제로 이아손이 아탈란테에게서 받은 창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남아 있어, 적어도 두 사람이 서로 알고 있었고 아탈란테가 아르고호 원정과 가까운 위치에 놓여 있었다는 흔적은 남는다.
그리고 아탈란테는 칼뤼돈의 멧돼지 사냥에서 다시 확실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칼뤼돈 왕 오이네우스(Oeneus)가 아르테미스에게 제사를 올리는 일을 빠뜨리자 여신은 거대한 멧돼지를 보내 그 지역을 황폐하게 만들었고, 멧돼지를 잡기 위해 그리스 전역의 영웅들이 모인다. 아탈란테 역시 이 사냥에 참가한다. 여성이 함께 사냥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영웅들도 있었지만 멜레아그로스(Meleager)는 그녀가 참가하도록 한다. 사냥이 시작된 뒤 멧돼지에게 가장 먼저 상처를 입힌 사람이 아탈란테였다. 그녀가 쏜 화살이 멧돼지의 등에 꽂혔고, 이후 다른 영웅들의 공격이 이어지다가 멜레아그로스가 마지막으로 멧돼지를 죽인다. 멜레아그로스는 가장 먼저 피를 낸 아탈란테에게 멧돼지의 가죽을 상으로 주지만, 일부 남성들이 여성이 상을 가져가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다시 싸움이 벌어진다. 한 마리의 멧돼지를 잡기 위해 모였던 영웅들의 사냥이 결국 사람들 사이의 갈등과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 사냥에는 앞에서 만났던 펠레우스 역시 참가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펠레우스가 장인 에우뤼티온(Eurytion)을 실수로 죽인다. 아이아코스의 후손을 따라갈 때에는 펠레우스 인생의 또 다른 추방을 만들어낸 사건으로 보였던 칼뤼돈의 사냥이, 이번에는 아르카디아의 아탈란테에게 가장 유명한 영웅적 승리를 안겨주는 사건으로 다시 등장한다. 같은 사건 하나가 서로 다른 왕가의 계보를 따라갈 때마다 전혀 다른 의미로 모습을 바꾸는 것이다. 아탈란테와 펠레우스는 이후 이올코스(Iolcus)에서도 다시 만난다. 죽은 펠리아스(Pelias)를 위한 장례 경기가 열렸을 때 두 사람은 레슬링 경기에 나섰고, 아탈란테가 펠레우스를 꺾었다고 전해진다. 앞에서는 아카스토스(Acastus)의 궁정에 들어간 펠레우스의 삶을 따라가며 지나쳤던 장례 경기가, 아탈란테의 이야기에서는 그녀가 남성 영웅을 직접 경기에서 이기는 장면으로 다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아탈란테가 아무리 사냥과 경기에서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도 결국 아버지와 다시 만나면서 혼인의 문제가 돌아온다. 아버지는 딸에게 결혼하기를 요구했고, 아탈란테는 이를 완전히 거절하는 대신 한 가지 조건을 내건다. 자신과 달리기 경주를 해서 이기는 남자와만 결혼하겠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아탈란테가 누구보다 빠른 사람이었다는 데 있었다. 그녀에게 진 구혼자는 죽어야 했기 때문에 결혼을 원하는 남자들은 목숨까지 걸고 달려야 했다. 수많은 구혼자가 아탈란테를 이기지 못한 채 죽은 뒤 멜라니온(Melanion), 다른 이야기에서는 히포메네스(Hippomenes)라고 불리는 남자가 도전한다. 그는 자신의 힘만으로 아탈란테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아프로디테(Aphrodite)에게 도움을 청한다. 아프로디테는 그에게 황금사과 세 개를 주고 달리기 도중 하나씩 떨어뜨리라고 알려준다.
경주가 시작되자 아탈란테는 예상대로 앞서나간다. 그러나 멜라니온이 황금사과를 하나 던질 때마다 그녀는 그것을 줍기 위해 잠시 달리기를 멈춘다. 사과 하나를 줍는 짧은 시간이 반복되면서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조금씩 좁혀지고, 결국 멜라니온이 먼저 결승선에 도착한다. 누구도 달리기로 꺾을 수 없었던 아탈란테가 힘이나 속도가 아니라 세 개의 작은 황금사과 때문에 처음으로 패배한 것이다. 두 사람은 약속대로 결혼한다. 그러나 이 결혼 역시 평범하게 끝나지 않는다. 멜라니온이 자신을 도와준 아프로디테에게 제대로 감사를 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두 사람이 신성한 장소에서 욕망을 참지 못하고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라고도 전해진다. 결국 신의 분노를 산 두 사람은 사자로 변한다. 어린 시절 암곰에게 젖을 먹고 살아남았던 아탈란테가 자신의 삶 끝에서는 다시 인간의 모습을 잃고 야생의 짐승이 되는 것이다.
뤼카온에게서 시작한 아르카디아의 왕가를 여기까지 따라오면 묘하게 반복되는 이미지가 보인다. 뤼카온은 늑대가 되었고, 그의 딸 칼리스토는 곰이 되었으며, 칼리스토의 후손들이 다스리는 아르카디아에서는 아탈란테가 암곰에게 길러진 뒤 마지막에는 사자로 변한다. 인간과 짐승 사이의 경계가 유난히 자주 무너지는 왕가인 셈이다. 하지만 아탈란테의 이야기는 아르카디아 왕가 전체의 한 가지일 뿐이다. 같은 뤼쿠르고스의 집안에서 이어지는 다른 후손들은 테게아와 아르카디아의 왕권을 계속 이어가고, 여러 세대 뒤 마침내 트로이 원정 시기의 왕 아가페노르(Agapenor)에게 도착한다. 이제 다시 이 왕가의 중심 계보로 돌아가면, 산과 들판으로 갈라졌던 아르카디아의 여러 지역이 어떻게 한 지휘관 아래 모여 60척의 함선을 트로이로 보내게 되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 안카이오스에서 아가페노르까지, 산악의 아르카디아가 60척의 함선을 띄우다

아탈란테의 이야기를 따라 잠시 옆길로 나갔지만, 이제 다시 아르카스의 왕가 본선으로 돌아가야 한다. 아르카스의 아들 가운데 테게아를 차지했던 아페이다스의 혈통에서는 알레오스가 태어나고, 알레오스에게서 다시 여러 아들과 딸이 갈라져 나온다. 이 집안은 이후 테게아를 중심으로 아르카디아에서 가장 중요한 왕가 가운데 하나가 되며, 우리가 찾고 있는 트로이 전쟁의 지휘관 역시 바로 이 가지에서 태어난다.
알레오스의 아들 가운데 한 사람이 뤼쿠르고스였다. 그는 아르카디아의 왕이 되었고 오랫동안 살아 왕권을 유지한다. 뤼쿠르고스에게는 여러 아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앞에서 이미 만난 안카이오스가 있었다. 안카이오스는 단순히 왕위를 이어갈 왕자가 아니라 아르카디아 밖의 영웅 세계에도 적극적으로 뛰어든 인물이었다. 안카이오스는 아르고호 원정에 참가한 영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이름을 올린다. 이아손이 황금양피를 찾아 콜키스로 향할 때 그 배에는 그리스 각지에서 모인 영웅들이 탔고, 아르카디아 왕가 역시 안카이오스를 통해 이 원정에 연결된다. 앞에서 아탈란테가 아르고호 원정에 참여했는지를 두고 이야기가 갈렸다면, 안카이오스는 이 영웅 집단 안에 훨씬 분명하게 자리 잡는 인물이다.
그리고 안카이오스는 다시 칼뤼돈의 멧돼지 사냥에도 참가한다. 아르카디아 왕가를 따라오면서 이 사냥은 계속해서 모습을 드러낸다. 아탈란테가 가장 먼저 멧돼지에게 상처를 입혔고, 펠레우스는 이곳에서 에우뤼티온을 실수로 죽였으며, 안카이오스 역시 같은 멧돼지를 잡기 위해 칼뤼돈에 모여 있었다. 서로 다른 왕가에서 출발한 영웅들이 한 사건에 계속해서 겹쳐 들어오는 것이다. 안카이오스는 이 사냥에서 특히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는 커다란 도끼를 들고 멧돼지에게 달려들었지만, 오히려 멧돼지의 공격을 받아 치명상을 입고 죽는다. 아르고호를 타고 먼 콜키스까지 다녀온 영웅이 결국 고향에서 멀지 않은 칼뤼돈의 사냥터에서 생을 마친 것이다. 뤼쿠르고스에게는 다른 아들도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자식들을 모두 앞세우고 아주 오래 살아남았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뤼쿠르고스가 죽었을 때 왕위가 곧바로 안카이오스의 아들에게 넘어간 것은 아니었다. 왕위를 이어받은 사람은 알레오스의 또 다른 아들 케페우스의 후손 에케모스(Echemus)였다. 에케모스는 케페우스의 손자였으므로 뤼쿠르고스와는 같은 알레오스 왕가의 다른 가지에 속했다. 왕위가 한동안 형제 계통의 다른 가지로 이동한 셈이다. 에케모스 역시 이름만 잠깐 지나가는 왕은 아니었다. 헤라클레스(Heracles)가 죽은 뒤 그의 후손들은 펠로폰네소스(Peloponnese)로 돌아오려 했고, 헤라클레스의 아들 휠로스(Hyllus)가 그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온다. 이에 맞서 에케모스가 아르카디아를 대표해 휠로스와 일대일 결투를 벌였고, 결국 그를 죽인다. 헤라클레스의 후손들이 펠로폰네소스로 돌아오는 시도가 이때 한 번 좌절되면서 아르카디아 왕가의 에케모스는 다른 지역의 왕권 문제에도 깊게 얽히게 된다.
그리고 에케모스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는 사람이 안카이오스의 아들 아가페노르이다. 이렇게 놓으면 아가페노르는 단순히 『일리아스』 2권에서 갑자기 등장하는 지휘관이 아니다. 제우스와 칼리스토 사이에서 태어난 아르카스에게서 시작해, 아페이다스와 알레오스, 뤼쿠르고스와 안카이오스를 거쳐 내려온 오래된 아르카디아 왕가의 후손이었다. 계보를 한 줄로 놓으면 흐름은 더욱 선명해진다. 아르카스 → 아페이다스 → 알레오스 → 뤼쿠르고스 → 안카이오스 → 아가페노르 중간에 왕권만 잠시 알레오스의 다른 아들 케페우스의 후손 에케모스에게 넘어갔다가 다시 안카이오스의 아들 아가페노르에게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아가페노르는 헬레네(Helen)의 구혼자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했다. 따라서 파리스(Paris)가 헬레네를 데리고 트로이로 떠난 뒤 틴다레오스(Tyndareus)의 맹세가 다시 효력을 갖게 되었을 때 아가페노르 역시 전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앞에서 아킬레우스가 이 맹세와 관계없이 별도의 이유로 전쟁에 끌려 들어갔다면, 아가페노르는 오디세우스(Odysseus)와 다른 여러 왕들처럼 과거 헬레네를 두고 했던 약속 때문에 원정에 참가하는 쪽이었다. 이렇게 아가페노르가 아르카디아 사람들을 이끌고 트로이로 향하게 되면서 마침내 이 오래된 왕가가 『일리아스』 2권의 함선 카탈로그에 도착한다. 호메로스는 퀼레네 산 아래의 아르카디아와 아이퓌토스(Aepytus)의 무덤 부근, 페네오스(Pheneos)와 양 떼가 많은 오르코메노스(Orchomenus), 리페(Rhipe)와 스트라티에(Stratia), 에니스페(Enispe), 테게아와 아름다운 만티네이아(Mantineia), 스튐펠로스(Stymphalus)와 파라시아(Parrhasia)를 차례로 열거한다. 지금까지 여러 왕과 여러 가지로 갈라져 있던 아르카디아의 지역들이 트로이 전쟁에서는 아가페노르 한 사람의 지휘 아래 묶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에게 배정된 함선은 모두 60척이었다. 숫자만 놓고 보면 메넬라오스(Menelaus)가 이끄는 라케다이몬(Lacedaemon)군과 같은 규모이며, 결코 작은 군대가 아니다. 그런데 아르카디아의 60척에는 다른 지역과 다른 독특한 설명이 하나 따라붙는다. 아르카디아는 펠로폰네소스 한가운데 자리한 산악지대였다. 이들의 삶은 바다와 배보다는 산과 육지 전투에 가까웠고, 호메로스(Homer) 역시 아르카디아 사람들이 배를 다루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이들이 사용할 함선을 준비한 사람이 따로 등장한다. 바로 그리스군의 총사령관 아가멤논(Agamemnon)이다.
아가멤논은 아르카디아 사람들에게 60척의 배를 마련해준다. 아가페노르는 병사들을 이끌 수 있었지만 바다가 없는 자신의 왕국에서 대규모 함대를 직접 준비할 수는 없었고, 원정 전체를 조직하던 아가멤논이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이다. 『일리아스』의 함선 카탈로그에서 지역별로 배의 숫자만 읽으면 지나치기 쉬운 대목이지만, 아르카디아 60척은 실제로는 다른 왕이 제공한 배에 내륙의 병사들이 올라타 만들어진 군대였다. 이 점은 아르카디아라는 지역이 지나온 긴 이야기와도 묘하게 어울린다. 처음에는 늑대가 된 뤼카온과 곰이 된 칼리스토의 산과 숲에서 시작했고, 아르카스의 후손들은 산과 들판을 여러 지역으로 나누어 살아왔다. 아탈란테 역시 숲에서 사냥하는 사람으로 성장했고, 안카이오스는 도끼를 들고 멧돼지에게 달려들었다. 이 왕가를 따라오는 동안 계속해서 등장한 것은 바다가 아니라 산과 숲, 사냥과 육지였다.
그런 사람들이 이제 트로이 전쟁에 참가하기 위해 거대한 함대에 올라탄다. 그리고 자신들의 배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던 아르카디아인들에게 배를 마련해준 사람이 바로 그 전쟁 전체를 지휘하는 아가멤논이었다. 산속에서 시작된 아르카스의 후손들이 마침내 아가멤논이 마련해준 60척의 함선을 타고 에게해(Aegean Sea)를 건너 트로이(Troy)로 향하게 된 것이다.
┃ 결론
아르카디아의 60척까지 도착하고 나면 함선 카탈로그가 단순히 항구 도시와 섬의 함대를 세는 목록이 아니라는 사실이 다시 한번 드러난다. 이번에 따라온 왕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바다보다 산에 가까웠다. 펠라스고스와 뤼카온에게서 시작한 오래된 왕가는 아르카스의 이름을 따라 아르카디아가 되었고, 그의 후손들은 테게아를 비롯한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 각자의 혈통을 이어갔다.
그 과정에서 이 왕가에는 유난히 야생의 이미지가 반복되었다. 뤼카온은 늑대가 되고 칼리스토는 곰이 되었으며, 아탈란테는 암곰에게 길러졌다가 끝내 사자로 변한다. 안카이오스는 아르고호를 타고 먼 원정에 참가했지만 결국 멧돼지 사냥에서 죽었다. 서로 다른 세대의 이야기를 하나씩 따라가다 보면 아르카디아의 왕가에는 산과 숲, 사냥꾼과 짐승의 세계가 끊임없이 겹쳐져 있었다.
그러나 그 오래된 산악 왕가 역시 트로이 전쟁의 시대가 되자 함선 카탈로그 안으로 들어온다. 안카이오스의 아들 아가페노르는 아르카디아의 여러 지역에서 모인 사람들을 하나의 군대로 이끌었고, 그들은 60척에 나뉘어 트로이로 향했다. 다만 그들에게는 결정적으로 배가 없었다. 그래서 함선 카탈로그 안에서 보기 드문 장면이 만들어진다. 지휘관도 병사도 아르카디아에서 나왔지만, 그들이 바다를 건널 함선은 총사령관 아가멤논이 마련해준 것이다.
이 때문에 아르카디아의 60척은 숫자만으로 볼 때보다 훨씬 재미있는 함대가 된다. 바다를 삶의 중심에 두지 않았던 산악의 사람들이 다른 왕이 준비한 배에 올라 트로이로 향했기 때문이다. 함선 카탈로그의 한 줄 뒤를 거슬러 올라갔을 뿐인데 늑대와 곰에서 시작해 아탈란테의 사냥과 안카이오스의 죽음을 지나, 마지막에는 아가멤논이 배까지 마련해주는 거대한 원정군에 도착한 셈이다.
「함선 카탈로그 — 1,186척의 배 뒤에 숨은 그리스 신화 ㉘ : 아르카디아」에서 따라온 것은 결국 산의 왕가가 바다에 도착하는 과정이었다. 아르카스에게서 이름을 얻은 땅의 후손들이 수많은 세대를 지나 아가페노르의 군대가 되고, 스스로 마련하지도 않은 60척의 함선에 올라 트로이를 향한다. 함선 카탈로그가 아니었다면 좀처럼 한 줄에 놓이지 않았을 산과 숲, 사냥과 바다의 이야기가 여기에서 하나로 이어진다.

